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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Feb 22. 2024

벵하민 라바투트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재밌게 읽었다. 과학사를 기반으로 한 픽션이지만 픽션과 논픽션이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뒤섞여 읽는 이로 하여금 혼미할 정도로 빨려 들게 하는 그의 필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물론 그 책에 포함된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의 신작 <매니악>도 망설임 없이 읽게 되었는데 사실 어떤 내용인지,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단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역시나 그의 스타일답게 긴박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몰입도가 높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그랬다.


책의 구성은 전작과 유사했다. 1부 파울 또는 비이성의 발견, 2부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 3부 세돌 또는 인공지능의 망상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는데 제목에 나온 대로 주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파울 에렌페스트,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 (본명은 야노시, 또는 연치라고 불리며, 미국으로 건너가 이름을 존으로 바꾸었는데 이 책에서는 주로 조니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세돌이다. 그리고 한 명 더 넣자면 딥마인드의 창립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를 들 수 있겠다. 


각각의 이야기는 연관성이 없지만 그나마 물리학과 전산, 그리고 인공지능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을까 싶다. 다소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배경지식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1부에 등장하는 파울 에렌페스트는 이론물리학자로서 양자역학의 발전에 기여했음에도 당시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여러 물리학자들처럼 혼란스러워했고,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게 양자역학은 이성적이지 않았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정신이 이상해졌고, 막내아들과 함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순히 양자역학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평생 멜랑콜리와 우울증을 알았다고 하니까. 


이론물리학이 가는 방향은 그의 지향점과 정반대였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직관이 무차별 포격으로 대체되었고, 물질과 원자와 에너지의 자리에 수학공식이 들어섰다. 파울은 "하이젠베르크-보른-디랙-슈뢰딩거의 무한 소시지 기계 공장"이 유발한 소화불량을 경멸했던 것만큼이나 헝가리 천재 존 폰노이만처럼 "무시무시한 수학무기와 난해한 공식 장치로 무장한 부류를 질색했다. 


파울은 이 정신 나간 이성, 과학의 영혼을 따라다니는 유령을 보았다. 형체 없는 망령 같기도, 악령 같기도 한 그 존재는 회의와 학회에 참석한 동료들의 머리 위를 떠다녔고, 동료들이 방정식을 적어 내려갈 때 어깨너머로 빼꼼 구경하다 슬그머니 옆구리를 찌르곤 했다. 실로 사악한 이 힘은, 논리적인 동시에 지독하게 비이성적이었고, 아직은 다 자라지 않아 잠잠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라바투트는 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풀어냈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작품의 앞머리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결말, 그리고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은 다시 맞물린다. 


여기에서는 양자역학 자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전작에서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파울 에른페스트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을까. 라바투트는 과학사에서 천재들의 광기가 어떻게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그 사례를 찾으려 했던 것 같고, 마침 폰 노이만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그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라바투트는 주로 20세기 초중반의 과학의 격변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책의 중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2부는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분량 때문인지 2부는 다시 시 세 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특이하게도 폰 노이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의 가족, 친구, 동료들이 그에 대해 회고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들의 시각에서 폰 노이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인데 물론 이는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을 했거나 글을 쓴 것은 아니고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고 그들과 폰 노이만의 관계를 기반으로 최대한 근사하게 재창조한 것이리라.


세상에는 두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연치 폰 노이만과 우리 나머지. 


존 폰 노이만.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하고 전설과 같은 인물이다. 천재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하고. 이 책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그의 비범함을 증언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의 그런 모습들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들도 같이 다루고 있는데 특히 일상생활에서의 어수룩함이나 오히려 평범한 것에서 모자란 듯한 모습도 보였다. 


야노시가 훗날에 한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절망을 느낀다.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방법이 전혀 없었던 걸까? 굳은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면, 그의 안에 작디작은 씨앗을 하나라도 심어 싹을 틔우고 그걸로 그의 영혼을 일부나마 구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도 너무 겁에 질려 말을 건넬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 내가 그를 잘못 가르친 셈이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형편없었다. 우리 학문의 존엄함과 신성함을 전달하지 못했다. 나는 '순수수학'에서 말하는 '순수'가 정녕 무슨 뜻인지를 그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다. 패턴을 찾는 일도 아니며, 현실과 그 안의 여러 문제와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지적인 게임의 연속도 아니다. 그런 것과 확실히 다르다. 수학이란 신의 정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학문이다. 
그가 얼마나 정확히 미래를 내다보았는가를 지금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의 예지력은 정보를 처리하고 역사의 물결에서 현재의 알갱이들을 걸러내는 뛰어난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진심으로 안심했으며,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내 꺾였을 과신에 차 있었다. 야노시는 실로 한참을 앞서 있어 마치 모든 것을 과거의 일처럼 돌아보는 듯했다. 
조니는 내가 미국을 경멸한 만큼이나 미국을 사랑했다. 그 나라가 그에게 무슨 짓인가를 한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실성한 듯 무모한 낙관주의와 잔인함을 뒤에 감춘 천진난만함이 조니 내면에서 최악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잠들어 있던 악마를, 그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악몽이 속삭이던 은밀한 욕망을. 
그는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았고, 그게 그의 도덕적 판단을 상당 부분 물들였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카지노에서 돈을 따려고, 아니면 포커 게임에서 좀 이겨보려고 <게임과 경제 행동 이론>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동기를 완벽히 수학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류의 영혼 일부분을 수학으로 포착하려던 것이다. 


게다가 늘 성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좌절을 겪기도 했으며, 그의 원대했던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윤리를 저버리고 목표지향적인 듯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의 도덕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특히 게임이론은 그가 과연 인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인가라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명확하지가 않고 독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사실 그 부분은 실제로도 규명하기가 쉽지는 않은 부분이기에.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삶을 다룬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나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오펜하이머>와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 사실 이 작품들에서는 폰 노이만이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라바투트는 폰 노이만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의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특히 리처드 파인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러나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는 없으며 사실 두 작품이 별개의 것이다. 다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이 책의 재미를 조금 더 증대시켜 줄 수 있으리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매니악'인 이유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광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중간에 폰 노이만이 개발한 컴퓨터의 이름이 MANIAC이어서 중의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 기계에 붙인 세례명은 수학 분석기와 숫자 적분기 및 계산기 Mathematical Analyzer,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였다. 짧게 하면, 매니악 MANIAC. 


3부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다루고 있는데 이세돌의 바둑인생을 간략하게 돌아보았고 그에 대해서 얘기했다.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는 이세돌이지만 외국인들은 아마 알파고와의 대국 이전에는 잘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은 이름은 모르고,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이긴 사람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이세돌, 쎈돌, 바둑 9단, 동시대 누구보다 창의적인 바둑기사, 첨단 인공지능 시스템과 대전을 치러 패배를 안긴 유일한 인간, 그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목소리를 잃었다. 
아직은 멀리 있어 희미해 보여도 이미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현재에 영향을 떨치는 미래 희망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래. 누군가는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고 믿지만, 대다수는 이 광기 어린 꿈이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영원히 머무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미래. 하지만, 언젠가 우리와 우열을 다툴 지능의 지시에 따르는 인간의 손으로 바둑판 위에 점판암 하나가 올려지는 순간, 그 미래의 첫 메아리는 이미 울려 퍼진 후였다.
이세돌은 자신이 인류 전체를 대표한다는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느꼈다. 전날 대국으로 몸도 마음도 고단해진 이세돌은 헐렁한 검정 양복에 하늘색 셔츠 차림으로 방을 나왔다. 옷이 몸집보다 두 치수는 커서 꼭 빼빼 마른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대회가 진행될수록 그는 점점 더 수척해졌다. 대국을 준비하고 치르면서 7킬로그램 가까이 살이 빠졌다. 
"그 수가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된대?" 
"0.0001." 주니어 연구원이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만 분의 일. 두 번째 대국에서 알파고가 획기적인 37수를 두며 바둑계에 존재감을 알렸을 때 자신의 수에 부여한 확률과 정확히 똑같았다. 결국엔 알파고 네트워크도 중국 프로기사 구리가 이세돌의 수에 붙인 이름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것은 실로 신들린 움직임, 신의 손길이 닿은 한 수였다. 인간은 만 명 중에 단 한 명만이 떠올릴 수 있었던 수. 이세돌의 끼움수에 알파고가 허둥댄 것은 그래서였다. 인간의 경험치를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알파고의 무한해 보이는 능력조차 초월한 수였으므로.


그런데 이세돌 못지않게 천재가 있었으니 딥마인드를 세운 데미스 허사비스다.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는데 이 책에 나온 내용을 통해 그 또한 엄청난 천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사실 두 인간 천재의 대결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3부에 더 흥미를 가질 수도 있을 듯하지만, 외국인들의 경우엔 3부에 얼마큼 흥미를 가질지는 모르겠다. 


다섯 번의 대국을 마치 현장 중계하듯 긴장감 있게 풀어냈는데 당시 대국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결과도 이미 알고 있기에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대국도 2016년에 이루어졌으니 벌써 8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동안 AI는 더 무섭게 발전했고, 이제는 바둑에서 인간은 AI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세돌의 이름이 더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이리라. 그 뒤에 마스터와 대국을 두었던 커제는 세 판을 내리 지며 더 이상의 인간대 AI의 대결은 무의미해졌다. 만약 이세돌이 다섯 판을 모두 졌다면 그의 이름 역시 잊혔으리라.


이세돌은 또다시 뉴스 1면을 장식했다. 살아 있는 인간 가운데 대회에서 첨단 인공지능 시스템을 두 번이나 이긴 것은 그가 유일했다. 세계 어느 선수도 근접하지 못한 위업이었다. 하지만 다음 대국에서 이세돌은 어떠한 우위도 점하지 못했고, 한돌은 보란 듯이 그를 무너뜨렸다. 


이 책은 '자가학습 알고리즘으로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마무리된다. 그 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라바투트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AI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 속에는 천재들의 통찰과 노력, 그리고 광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미래가 어떠할지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다소 어둡거나 끔찍하기까지 하다. 개인의 천재성, 광기가 한 인간을 넘어서 세계와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저자는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최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배제하려고 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의 주관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가 창조해 낸 스토리들은 엄격한 사실이 아니며,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의미나 가치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픽션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인간 경험에 전혀 의지하지 않은 채 이 모든 게임을 통달했다. 규칙만 알려주고 스스로 플레이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 다였다. 처음에는 무작위로 수를 두었으나 금세 무찌를 수 없는 존재로 진화했다. 이제 그것은 바둑과 체스와 쇼기에서 세계 최강의 존재가 되었다. 그것의 이름은 알파제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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