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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Mar 11. 2024

민태기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민태기 박사의 <판타 레이>를 먼저 리뷰했어야 했는데 그의 근작인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을 먼저 이야기하게 되었다. 조만간 <판타 레이>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겠지만 이번에는 우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제목이다.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이라니... 이 두 고유명사가 과연 어울리기나 할 법하며, 어떤 접점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에서의 조선은 우리가 아는 조선, 즉 왕조의 조선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에서 원래의 명칭으로 회귀한 조선을 의미한다. 이 책의 내용이 19세기말부터 시작하니 그 시기는 조선말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또 아인슈타인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저 제목에 한정한다면 시기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제목으로부터 또 한 가지 잘 못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조선에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왔거나 혹은 아인슈타인을 만났는가 하는 것인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차차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한다.


아무튼 제목에서부터 흥미를 느꼈고, 특히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의 국내 과학사에 대한 내용이라니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을 나오자마자 구입했음에도 이제야 읽었음을 고백한다)


저자인 민태기 박사는 기계공학, 특히 유체역학을 전공한 공학자이며 누리호 로켓 엔진을 개발하는 연구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유체과학사를 다룬 <판타 레이>를 냈을 때 (그 이전부터 그 내용을 개인 블로그에 연재했다고 한다) 기대가 컸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과학사 대중서를 낼 수 있는 전문가가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타 레이>를 읽고 감탄한 건 단지 그의 해박한 지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탁월한 솜씨가 있었고, 특히 시대와 인물,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에 뛰어났다. 각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보는 동시에 각 인물들은 또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려주는 것을 보면서 전율을 느낄 정도였으니... 그러나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


그래서 그가 우리나라 근현대 과학사를 다룬 책을 낸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됐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기대에 충분히 기대했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안 것 같고, 자신이 잘하는 것을 그렇게 풀어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다가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전한 1950년 6월 26일 자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장면에서 '자연과학은 학제'라는 칼럼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장면은 당시 신문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국가의 비상사태와 국가의 과학기술에 대한 논고가 나란히 실린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당시에는 그로 인한 전쟁의 피해가 그렇게 커질 줄 미처 몰랐다고는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과거의 시대를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생활 범위를 벗어난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당시에 그러한 과학기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일단 스쳐 지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러한 것을 포착해 낸 저자의 눈썰미도 놀랍지만, 그는 이 칼럼을 쓴 최규남 당시 문교부 차관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그가 일제강점기 하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대중에게 알리는 활동들을 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때 국내의 과학기술 운동을 조사하였고, 마침내 조선말기에서 해방 후까지 이어지는 과학사의 흐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이렇게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하지만 자료 조사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책 뒷부분에 참고문헌들이 나오지만, 그는 자료 조사를 위해 당시 신문기사들뿐만 아니라 학회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리고 박물관에나 있을법한 사료들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들을 원문에 가깝게 그대로 책에 옮기기도 했고, 여러 사진들을 통해 더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비로소 100여 년 전의 인물, 사건들과 현재의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일간지에서 그런 최신과학을 소개했다는 것도 흥미로웠고, 과학전문잡지도 정기적으로 나왔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100 년 전의 우리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하긴, 당시 해외의 최신뉴스도 거의 실시간으로 국내에 전해졌으니 말이다.


책의 분량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시대상이 담겨 있어서 내용은 그리 적지 않다. 하지만 작가의 필력이 좋아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도 이 책의 소개를 간단히 해보겠다. (편의상 이름 뒤에 호칭은 생략한다)




이 책은 1895년, 서재필의 귀국으로 시작한다. 잘 알려진 대로 서재필의 독립협회 활동 및 만민공동회 활동은 구한말 외세로부터 자주성을 지키려는 움직임이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 만민공동회에서 부각된 인물이 안창호이며, 안창호는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가면서 당시 UC 버클리에 재학 중이던 황진남을 만나게 된다. 황진남은 이 책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다. 


황진남은 하와이에서 성공한 집안의 아들로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됐지만 학교를 자퇴하고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안창호를 따라 상해임시정부로 향한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내분에 회의를 느끼고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다. 


황진남은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동아일보에 4회에 걸쳐서 소개한다. 이때가 1920년대 초이므로 당시 과학계의 최신 지견을 국내에도 발 빠르게 소개한 것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한 상황인 베를린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지만 결국 학업을 마치지는 못한다 (박사학위를 받기 불과 1년 전이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로 가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러다가 1940년에 국내로 돌아온다. 


그는 이후 함흥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는데 해방 직후 여운형을 만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왔다가 삼팔선으로 분할되는 바람에 프랑스인 아내와 아들은 함흥에 남겨둔 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여운형과 함께 활동을 하다가 여운형 암살 이후 프랑스, 미국 등과의 교류 활동을 하다가 전쟁 중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VUNC라는 대북 선전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그 뒤 행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1970년 5월 13일,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되어 파주의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나 후손이 없어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2023년 5월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황진남의 이야기이다.




사실 상대성이론은 황진남이 자세히 소개하기 이전에 이미 신문기사 등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었고, 특히 1922년에 아인슈타인이 일본의 초청으로 강연을 가게 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국내에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상대성이론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행보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이스라엘 지역 (국가가 성립되기도 전에)에 대학을 세운 것이 이슈가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성립을 염원한 것이었으며, 이 사실은 독립을 꿈꾸던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도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그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물론 상대성이론으로 인한 것은 아니고 그전에 발표했던 광전효과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일본에 도착한 아인슈타인의 인기는 치솟았고, 조선인들이 아인슈타인을 조선에 초청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강연료 및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별로 내켜하진 않았을 것 같다.


대신 일본 유학생들인 최윤식, 김영식, 한위건 등은 전국을 돌며 상대성이론 강연회를 연다. 이 강연회는 인기를 끌긴 했지만 사실 물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당시 서민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최신 이론이자 현재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특수/일반상대성 이론을 강의한다는 것이 쉬웠겠는가. 그래서 강연 후 이 강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를 독립운동으로 인식한 일제의 강압도 있어서 결국 1 년여 정도 이어지던 순회강연은 중단되었다.




이 책에서의 또 다른 중심인물은 최규남이다. 앞서 신문에 기고글을 쓴 인물인데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1932년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참고로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1926년에 미시간 대학에서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철이다. 


당시 연희전문 수물과는 수학과 물리가 합쳐져 있는 일본식 교육제도를 따른 곳으로써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물리학을 가르치던 곳이었다고 한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당시 첨단과학이었던 양자역학 및 핵물리학을 국내 대중에게 소개하는데 앞장선다. 이러한 과학의 대중화에 경쟁적으로 함께 했던 인물이 도상록인데, 그는 고등학교 교사신분이었지만 과학의 대중화와 학술적 연구 모두 열심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과학 대중화 운동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도상록은 이후 만주국으로 가서 신징공업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온다.


최규남은 이후 서울대 총장, 문교부 차관 및 장관까지 오르게 된다.




또 다른 중심인물은 우장춘이다. 우리에게는 '씨 없는 수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것은 그가 개발한 것은 아니고 국내에서도 육종학을 선보이기 위해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도 육종학으로 이미 유명했으며,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의 권유로 국내로 들어와 국내 육종학 및 품종개량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한다. 


그가 귀국한 시점은 한국전쟁 직전이었으나 마침 그의 연구소(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부산에 위치하여 전쟁의 영향을 덜 받았다. 그렇게 10년 간 육종학에 몰두하던 그는 1959년 8월에 병으로 사망한다.


얼핏 알고 있기는 했지만 우장춘의 아버지는 우범선으로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친일파였다. 우범선은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도피한 우범선은 일본인 여자와 결혼을 하여 우장춘을 낳았지만 고영근에게 암살된다.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자란 우장춘은 훗날 아버지의 친일 행각을 알고 사죄하는 의미로 국내에서 육종학과 품종개량에 애썼다고 하나 사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그를 따라다닌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괴롭혔을 것은 분명하다. 




최형섭의 경우도 우장춘의 사례와 비슷하다. 최형섭은 국내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후배 과학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의 아버지 최지환 역시 친일파였다.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 각지에서 의병 봉기가 일어났었는데, 최지환은 진주에서 의병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일제의 훈장을 받고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러한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미국 노터데임 대학을 거쳐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로 돌아와 국내 과학기술행정에 앞장선다. 한국원자력연구소, KIST,   대덕연구단지 등이 그에 의해 탄생하게 됐으며, 이후 과학기술처 장관까지 역임하였다.


나도 대학 다닐 때 그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읽은 적이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친숙한 편이지만, 그는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아무래도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의 아들이면서도 과학기술과 국가에 헌신했던 우장춘과 최형섭의 사례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사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 이긴 한데 이러한 것들도 모두 시대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민태기 박사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지만, 자신은 그러한 연좌제를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베를린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글학자 이극로 (영화 <말모이>의 실제주인공이다), 수학의 천재였던 이임학, 최초의 화학박사인 이태규 (교토제국대학), 화학박사인 리승기 (교토제국대학), 물리학박사인 박철재 (교토제국대학) 등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리고 이극로와 인연이 있었던 공병우의 한글타자기 개발 이야기도 실려있다. 롯데 설립자인 신격호의 이야기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시기까지 우리가 모르는 많은 과학자들이 있었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우장춘, 최규남, 최형섭, 이극로처럼 잘 알려진 사람들도 있지만, 황진남, 이임학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람들도 있다. (나만 몰랐던 것일 수도)


그러한 개개인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한 개인의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맞물린다. 그러한 구성이 흥미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다소 혼동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특히 이렇게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경우에는 더 그럴 수도. 


이 책은 과학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근현대사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책의 상당 부분은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차지하고 있으며, 과학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대에 속한 것들 중에 완전히 무관한 것은 없으므로 같이 알아두면 더 좋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역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서사가 좋았고, 특히 비사를 많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도 이념 갈등을 막지는 못했다.


1920년대부터 불거진 이념 갈등은 이후 국내의 모든 활동을 갈라놓는 불화의 씨가 되었고, 급기야 국토의 분단과 전쟁까지 이르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서울대학교가 탄생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이념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해방 이후 일본 및 해외에 있던 과학자들이 귀국하였고, 학교, 연구소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1946년에 미 군정은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을 발표하여 기존의 경성대학(구 경성제국대학), 경성의전,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들을 통합하여 현재의 서울대학교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교수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며 사표를 냈고, 월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결국은 서울대학교가 탄생했고, 월북한 교수들은 김일성종합대학의 설립에 합류한다. 결국 이념 갈등은 과학기술계마저 갈라놓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이렇듯 많은 비극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어쩌면 현재 이공계열에 있는 사람들의 선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중에는 분명 직접적인 스승 혹은 스승의 스승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그분들로 인한 혜택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다만 모든 개인과 조직은 공과가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과나 오판을 부정할 수는 없겠고, 개인의 선택이 아닌 것들에 대해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것들도 모두 우리의 역사, 그리고 과학사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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