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PC 통신, 그리고 세계
남녀공학, 교복, 급식...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 몇 가지다. 급식은 당시에 보편화된 것이 아니었고, 고등학교도 남녀공학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분리된 것이 더 일반적이지만, 교복은 내 또래 혹은 그 이후 세대들에게는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내가 가게 된 고등학교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 교복이 아예 없어서 늘 사복으로 등교했다. 두발도 자유였다. 그런데 그 학교는 아직까지도 교복이 없다고 한다. 왜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는 교복을 입는 학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는 대부분 교복을 입었기에 사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초반에는 좀 어색하기도 했다. 종종 같은 중학교 출신의 다른 학교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교복이 부럽기도 했었다.
반면 친구들은 내가 부러웠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복이라고는 해도 다들 대체로 후줄근하게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딱히 패션의 유행이란 것이 있었던가 싶다. 뭔가 유행이란 것이 등장한 건 적어도 1992년 이후인 것 같다.
두발이 자유긴 했어도 장발이나 염색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한 중에도 머리를 기르던 같은 반 아이가 있었는데 늘 담임이나 학생주임에게 지적을 받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롸커입니다.
자기 말마따나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에서 헤비메탈에 가까운 락을 지르던 그 녀석이 문득 생각난다.
나는 남중, 남고를 나왔다. 중1 때 안양에서 서울로 한 번 전학을 갔었는데 집 근처 중학교들은 모두 남녀공학이었지만 내가 배정된 중학교만 당시 유일하게 남자중학교였다. 전학 가기 전에도 남자중학교였지만, 그래도 서울로 전학 간다고 내심 기대했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좀 들었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남자아이들만 있다 보니 아무래도 대체로 좀 거칠었고, 불량한 학생, 순한 학생 등등 다양한 학생들이 섞여 있었다. 마치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처럼, 그러한 환경에서 나름 적응하며 중학생 시절을 보내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영등포구 당산동에 살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고등학교가 별로 없어서 그 동네 학생들은 대부분 한강을 넘어 마포구, 서대문구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가야 했다. 나 또한 서대문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는데 의외로 그게 좋았다. 중학교 내내 거의 동네 근처, 좀 더 멀리 가봐야 영등포 중심지 정도나 가보는 정도였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활동 반경이 훨씬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과 학교 사이에 홍대, 신촌, 이대 등이 있었고, 근거리에 종로와 광화문까지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놀기를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부만 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I did it my way."
중학생 때는 공부도 곧잘 했다고 생각한다. 반에서 1, 2등은 했었으니까 고등학교에 가서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고 1 중간고사 이후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고 1 중간고사에서 나는 반에서 10등 밖으로 밀려났고, 전교등수가 800여 명 중에서 100 등 중반이 되었다.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께서는 서울대에 들어간 이종사촌형을 내 과외선생님으로 붙여주셨다. 영어와 수학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사촌형을 평소에도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과외 분위기는 영 어색했다. 게다가 그 형의 성격도 까칠한 편이어서 과외시간 내내 관계가 불편했다. 결국 과외는 두 달 정도만에 그만두었다. 기말고사 성적도 딱히 오르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2학기 때는 다른 분과 과외를 하게 됐다. 여자분으로 기억하는데 전공이 국문과라고 했었나? 그래서 국어, 영어, 수학을 다 봐줬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외도 얼마 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과외 체질은 아닌 것 같다고, 그냥 혼자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 뒤로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대신 2학기가 되면서 성적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서울 소재 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 그러한 부모님의 마음과 달리 나는 별로 걱정을 안 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방식을 고수했다.
고 1 때까지는 대입 모의고사나 학교 시험이 모두 학력고사 방식과 유사했다. 그러나 우리 때부터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을 본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게 뭔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란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고 2 때부터 본격화되었지만 그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나는 컴퓨터를 일찍 접했다. 1984년에 처음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당시 아버지께서는 금성에서 나온 FC-150(패미콤 호환 기종)이라는 기종을 내게 사주셨고,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애플 II로 BASIC을 배웠다. 친구들 중에도 애플 II나 MSX 2 (대우에서 IQ2000이라고 판매하기도 함)가 있었는데, 그래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아이들끼리는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친구들 집에 다니면서 게임을 구경하거나 BASIC 프로그래밍을 공유하기도 했었다. 중 1 때 컴퓨터 실습 시간에는 삼성에서 나온 SPC-1500이라는 8비트 PC로 배웠는데, 이때까지가 8비트를 사용했던 마지막 경험이었다.
중 2 때 16비트 PC를 구매하게 됐다. 삼보에서 나온 TRIGEM POP이라는, 5.25" FDD 만 두 개 달린 XT 기종이었다. 이 기종의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어서 가장 비슷한 것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린모니터를 사용했었다. 당시 정부방침으로 컴퓨터 교육 열풍이 불기 시작했으며, 16비트 PC를 교육용 PC로 지정하면서 8비트 시대는 종식을 향해 갔다.
당시 개인용은 XT, 사무용은 AT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부터는 개인용으로 286 PC와 컬러모니터도 점차 보급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PC에 모니터와 키보드만 갖고 있었지만 점차 주변기기들도 갖춰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프린터였다. 엡슨에서 나온 24핀 도트 프린터를 중 3 때인가 고 1 때인가 구입했었고(당시에 삼보컴퓨터에서 엡슨프린터 총판도 겸했었다), 그다음이 마우스였다. 이건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당시 Kraft에서 나온 9/25핀 겸용 시리얼 볼마우스였다. (시리얼포트가 9핀과 25핀이 있었다)
예전에는 프린터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내게 프린트를 부탁하는 교사나 친구들도 있었다.
특히 나는 '보석글'이라는, 삼보컴퓨터에서 개발한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했었는데 이후 한글 워드프로세서 (속칭 '아래아 한글')를 알게 되어 0.9 버전 때부터 사용했었다. 처음 접했던 소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2 버전부터이며, 고 2 때 2.0 버전은 정식으로 구매했었다. 내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구매해 본 소프트웨어였지만 2.0 버전은 집에서 안 돌아가서 다른 친구에게 줬던 기억이 난다.
반면 마우스는 내겐 별로 쓸모가 없는 기기였다. XT 기기에서는 MS Windows (2.x 및 3.x)를 구동할 수 없었고, 마우스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별로 없었지만 그냥 갖고 싶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이미지가 있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그다음이 모뎀이었다. 처음에는 1200 BPS 모뎀을 구입했다가 1992년인가 2400 BPS 모뎀으로 바꾸었는데 사실 속도가 그렇게 많이 빨라졌던 것 같진 않다.
HDD는 어쩌면 가장 필요했던 주변기기일 수도 있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구입했다. 이건 1991년 중반 정도였던 것 같은데, 무려 10 MB라는 대용량이었고, 비로소 나는 플로피디스크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이었지만 부모님께선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가급적 사주시려고 하셨다. 책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다 사주셨을까 싶다. 내가 아빠가 되고 가장이 되어보니 부모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크셨던 것일 텐데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는지...
그렇게 나는 PC통신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대형 서비스로는 KETEL(나중에 하이텔로 합병됨)과 PC-SERVE(나중에 천리안으로 바뀜)가 있었는데 나도 둘 다 가입해서 활동했다. 게시판도 활용했지만 동호회도 가입해서 활동했던 기억이 난다. 주로 문학동호회 아니면 물리학동호회, 게임동호회였던 것 같다.
그 외에도 개인 또는 단체에서 운영하던 BBS에도 가입해서 활동했었다. 당시에 유명했던 엠팔이라든가 기타 소소한 BBS에도 들어가 보기는 했지만 엠팔 이외에는 별로 재미는 없었다. 일단 규모가 작으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 사용자 간의 교류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개인 BBS를 운영해 보겠다고 '호롱불'이라는 BBS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주제는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이었다.
집에 전화가 한 대뿐이니 밤시간에만 운영했는데 한 달 정도 운영했을까? KETEL이나 PC-SERVE 등에서 홍보를 했음에도 월 방문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냥 나 혼자 글 올리고 노는 수준 밖에 안 됐다. 게다가 가끔 집으로 전화하시는 분들이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모뎀을 사용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PC통신에 접속할 때뿐만 아니라 접속해 있는 상태에서 수화기를 들거나 혹은 접속 대기 중일 때 집으로 전화가 오면 자동으로 모뎀이 받아서 접속되는 소리가 난다) 부모님께 혼나기도 했었다. 결국 개인 BBS는 잠깐 동안의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내가 PC 통신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는데 우선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납득을 못 하셨고, 내가 공부하는 시간을 많이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하곤 했지만 전화요금은 정직했다. 그건 숨길 수가 없었다.
1990년 이전에는 전화요금이 도수제여서 한 번 접속되면 25원이었는데 1990년부터 종량제(시분제)로 바뀌면서 나처럼 전화요금의 눈치를 봐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종량제일 때부터 시작을 했지만 그렇게 바뀐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PC 통신을 통해 나는 세상에 좀 더 눈을 뜨게 됐고,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 생각해도 1990년대 초반이 그래도 온라인의 낭만적인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PC 통신은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많은 중요한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나의 인맥은 거의 컴퓨터를 통해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생 때 친해진 친구들은 대부분 컴퓨터를 통해서였는데, 특히 게임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XT에서 그린모니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게임을 종종 하는 편이었는데 특히 <페르시아의 왕자>가 인기였다. 또한 <삼국지> 시리즈도 좋아했었다. 고 2 때쯤 나왔던 <프린세스 메이커>는 우리 집에서는 안 돼서 친구집에 가서 하곤 했었는데 거의 구경만 하는 수준이어서 컬러로 표현되는 286 PC가 부러웠었다.
또한 당시에는 소프트웨어의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라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어색한 일이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프로그램을 복사해 주거나 혹은 업체를 통해서 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주로 업체를 많이 이용했었는데 한 군데는 당시 영등포로터리 근처에 있었던 삼보컴퓨터 대리점 겸 서비스센터였고, 다른 한 군데는 영등포유통상가 내에 있던 PC 조립 판매점이었다. 삼보 대리점을 알게 된 건 아마도 프린터 구매 및 프린터 소모품 구매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트 프린터는 리본과 전용지를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도 종종 들르면서 프로그램도 복사하고, 최신 동향도 알 수 있었다.
영등포유통상가 내에 있던 업체는 위에서 말했던 마우스를 구매하러 가면서 알게 됐던 것 같다. 영등포유통상가는 종로 세운상가나 용산 전자상가에 비해서 규모도, 업체수도 비할 바가 못되었지만 오락실에 납품되는 게임기 등에 특화되어 있었고, PC 업체들도 꽤 있었다.
부모님께는 비밀이긴 했지만 고 1 중반부터 고 2 초반까지, 나는 주말마다 그 업체에서 가서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비는 없는 대신 점심을 얻어먹고, 거기에 있는 PC들을 마음껏 사용해 볼 수 있었으며, 손님이 오면 PC나 주변기기들을 설명해 주는 일이었다. 프로그램을 복사하러 오는 손님들에게는 복사해주기도 했고, 게임 등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추천해 주거나 공략법을 알려주기도 했었다. 집에서는 게임을 하기가 어려우니 (시간도 안 되고 눈치도 보이지만, 무엇보다 안 돌아가는 게임이 많았다)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것.
구립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 줄 알고 계셨던 부모님을 속인 것은 죄송하지만 나는 그때의 일들이 즐거웠다. 부모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주말에 열심히 공부를 하러 다녔던 것으로 알고 계실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나도 사회도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물리적으로 더 넓어진 활동반경과 PC 통신이라는 더 넓은 온라인 세계에 눈을 뜨며 세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회는 노태우 정권 말기 레임덕과 권력 창출을 위한 정치인들의 대결, 그리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세상은 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90년에 발표된 3당 합당으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민주자유당이 되었는데 그 명맥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91년 4월 강경대 열사가 시위 도중 백골단의 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5월에 대규모 시위와 분신이 이어졌다. 고등학교가 아무래도 대학가와 종로, 광화문 등과 가깝다 보니 최루탄 냄새를 자주 맡았고, 지하철 안에까지 매캐함이 남아 있었다. 그때는 왜 시위를 하는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러나 시민들의 그러한 민주화의 열망은 1987년 6월 항쟁과 달리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1991년 전후로 국제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1990년 10월 독일의 통일과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일 것이다. 소련이 그렇게 순식간에 붕괴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라크와 다국적연합군 간 (사실상 미국) 걸프전이 있었다.
1990년대는 그렇게 모두가 혼란스럽게 시작했지만 그것은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