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 진로 고민과 종교전쟁

그래도 좋았던 기억이 더 많은 나의 고 2 시절

by 칼란드리아
DALL·E 2024-03-18 10.49.55 - A modern young adult stands in the center of a brightly lit, spacious room, surrounded by symbols representing six distinct career paths, illustrating.jpg DALL-E로 생성한 이미지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업 성취도도 그리 우수한 편은 아니었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나 스스로도 그다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원만했지만 그렇다고 사교적인 편도 아니어서 고등학생 시절 동안은 친했던 몇 명과만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들은 많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장래희망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핵물리학자

생물학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신문기자

작가

초등학교 교사

해군 장교


각각이 거의 연관성이 없는 직업들이다. 게다가 문과, 이과계열이 섞여있다. 이 중에서 무엇을 가장 하고 싶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막연한 생각으로 지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지금의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장래희망들이 훗날 나의 모습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고 1 때 적성검사를 했다. 고 2 때 문/이과를 정하기 위한 기초 자료이긴 했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성검사 결과 나는 문과계열이 나와서 상당히 의외였다. 문과 쪽 일들도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과학을 좋아했고, 진로도 이과 쪽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과긴 했지만 적합한 진로가 1순위가 상경계열, 2순위가 법률계열, 3순위는 토목건축계열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고 2 올라가면서 이과반으로 가기로 했고, 그중에서도 생물반을 선택했다. 우리 학교는 과학 심화선택과목으로 생물과 지구과학이 있었는데 이과 7개 반 중에서 생물반이 3반, 지구과학반이 4개 반이었다.


부모님께서도 당연히 내가 이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문과 나와서는 취업도 안 되고 뭐 먹고살래?'라는 인식이 깔려 있으니 더 그러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관점은 고 3 때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진다.




고 2가 되면서 나는 과학과 문학 양쪽 모두에 더욱 심취했다. 과학은 물리학과 생물학을 좋아해서 학교 공부 이외에도 과학잡지 '뉴튼'이나 과학책들을 읽었고, PC 통신에서도 과학 관련 동호회에서 글들을 읽기도 했다. 그래서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는데 특히 핵물리학, 입자물리학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당시에 읽었던 이휘소 박사의 전기와 관련된 내용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분야가 너무 신기했다. 이휘소 박사는 그때 나의 우상이었다.


Screenshot 2024-03-19 at 13.37.03.JPG 이휘소 박사.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ms97906/222674687039


생물학의 경우에도 수업시간에 배우는 내용들에 흥미를 갖게 되어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에 관심이 생겼다. 그쪽으로도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다. 대학에 가서 물리학과 생물학 둘 다 공부해 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중에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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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cafe.naver.com/olddos/38153?art=ZXh0ZXJuYWwtc2VydmljZS1uYXZlci1zZWFyY2gtY2FmZS1wcg.eyJhbGciOiJIUzI1NiIsInR5cCI6IkpXVCJ9.eyJjYWZlVHlwZSI6IkNBRkVfVVJMIiwiY2FmZVVybCI6Im9sZGRvcyIsImFydGljbGVJZCI6MzgxNTMsImlzc3VlZEF0IjoxNzEwODI0OTk3NTU0fQ.ud6s5r5rriZd7WdtGBfGJw7GvWQdqyhxDAVBwj2iblQ


그러면서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도 지속했다. 당시 나는 '마이크로소프트웨어', '마이컴' 등의 잡지를 비롯해서 여러 잡지들도 구독하면서 거기 나온 코딩도 해보고 최신 동향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관련된 책들도 사서 보았는데 안철수 씨가 쓴 책들도 있었다. (잡지에 종종 기고도 했었다)


그 당시 안철수 씨가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바이러스 뉴스>라는 책도 냈었다. 책의 부록으로 백신 프로그램을 줬는데, 백신 1.0 버전은 그냥 Vaccine이라고 했지만 2.0 버전부터는 V2, 3.0 버전에서는 V3라고 했고, 그 이후로는 그냥 V3라는 제품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의사였던 안철수 씨는 이후 사업가로, 교수로, 그리고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모하였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그 역시 한때는 나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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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 photos (1).jpg 이 책들도 아직 갖고 있는데 출판 연도를 확인해 보니 1990년이다. 기억했던 것보다 좀 더 빨랐다.


그때 나와 같이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던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친구였지만 각기 다른 고등학교로 가게 됐는데, 그럼에도 종종 자주 만나 프로그래밍에 대한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가 짠 프로그램을 보면서 평가해주기도 했다.


당시 나는 Quick Basic기반으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Turbo Pascal로 넘어갔는데, 그 친구와 Turbo Pascal로 할지, Turbo C로 할지 상의하다가 Turbo Pascal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대세는 C언어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Pascal이 C보다는 쉬웠기에. C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대신 어셈블리어도 공부했다.


지금 생각하면 Pascal이나 C나 시대에 많이 뒤처진 것이긴 했지만 당시엔 C 자체도 그렇게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었고 붐이 막 일어나던 참이었다. 어쩌면 내가 시류에 뒤처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친구와 비교해서도 내 코딩 실력은 많이 떨어졌다. 그 친구는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나보다 버그도 적고 더 간결하게 코딩을 했다. 그리고 PC 통신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의 코드도 나보다 나았다. 결국 나는 프로그래머로서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그쪽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은 어쨌거나 대학이나 대학원, 그리고 직장 생활하면서도 계속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어릴 때부터 해오던 그러한 감각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 2 때는 매킨토시를 알게 되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고등학생 때 내 인맥은 대체로 컴퓨터를 매개로 이어져 있었는데, 반 친구 중에 한 명이 맥을 사용하고 있었다. 모델명이 뭐였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마도 쿼드라 시리즈 중에 하나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컴퓨터로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는 가끔 학교에 CD롬들을 가지고 왔다. 맥에서는 CD롬으로 대용량의 데이터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너무 신기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5.25인치 디스켓을 이용하고 있었기에 마치 미개인 같았다.


그 친구를 통해 맥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됐고, 관련 잡지도 빌려보며 나중에 대학 갈 때는 꼭 맥을 사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결국 이루었지만...)


당시 매킨토시는 엘렉스컴퓨터라는 곳에서 국내 총판을 맡았다. 엘렉스 대리점에서 맥을 판매했고, 서비스도 진행했으며 관련된 교육도 했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코엑스 (당시에는 KOEX)에서 맥 전시회도 했었다. 정확한 명칭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맥 월드 코리아'였던가? 아무튼 그런 이름이었다. 엘렉스가 중심이 된 전시회였지만 맥 관련 여러 업체들이 참여한 꽤 큰 전시회였다.


엘렉스컴퓨터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할 기회가 있겠지만, 엘렉스에 의한 매킨토시 독점은 1998년에 애플코리아가 설립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 2 때부터는 글쓰기도 많이 했다. PC 통신상에서 문학동호회에도 가입했었는데 당시 꽤 큰 BBS였던 '한마을'에 있는 '시그림'이라는 동호회였다. '시'와 '그리움'이 합쳐진 단어로서 시와 수필을 위주로 활동하는 동호회였다.


그 동호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주로 종로에서 모였다), 각자가 쓴 시를 낭독하기도 하고, 합평을 하기도 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동호회였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 형과 누나들이 잘 대해줘서 정을 많이 붙이게 됐다. 뒤풀이도 갔지만,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술은 못 마시고 주스만 마셔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1년에 한 번씩은 그동안 써서 올린 시와 글들을 선별해서 문집으로 만들었다. 1992~1994년도까지 만들었던 세 권의 문집은 지금도 갖고 있는데 당시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추억이다. 비록 당시에 내가 썼던 시들이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동안 썼던 습작시만 해도 수백 편이 되지만 PC 통신 등에서 공개한 것은 많지 않다. 오래전에 내 개인 블로그에 잠깐 공개한 적이 있지만 그 전후로는 모두 공개한 적이 없다. 물론 내 브런치에서도 내가 썼던 시나 소설들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지나간 시간의 것들은 묻어두고 새로운 글들을 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내가 쓰던 시들은 목적을 갖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자아에 대한 성찰,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분노 등등. 순수 서정시라기보다는 그러한 불만과 분노의 표출이었다고 보인다.


그러한 시들을 종종 모아서 '시모음집'을 만들었다.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편집하여 출력한 후 수작업으로 제본했다. 그리고는 내가 한 부 갖고, 내 친한 친구에게 (위에서 같이 프로그래밍하던 친구는 아니다) 한 부를 주었다. 그는 내 작품의 유일한 독자였는데 종종 작품(?)에 대한 평을 해주었다.


그는 당시에도 그랬고 그 이후까지도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고, 서로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친구. 그와는 고2, 3 때도 같은 반이어서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 그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손으로 쓰기도 했고, 컴퓨터로 쓰기도 했다. 편지의 분량은 꽤 길었고, 그도 아마 읽느라 고역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그 친구에게 당시 내 편지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또한 그 친구의 답장은 별로 없었다. 내가 열 번을 보내면 한 번 답장을 하는 정도.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까지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대신 내 편지에 대한 소감을 간단하게라도 얘기해 달라고만 했다.


편지는 주로 그 친구에게 보내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가끔 보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고등학생 시절의 대부분을 편지를 쓰면서 보냈던 것 같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했고,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지만, 정작 나는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만나서는 얘기를 그리 많이 하는 편도 아니다. 단지 글로 쓸 때만 그렇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 동안 글쓰기는 나를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고 2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수능체제로 전환되었다. 1992년에는 5,6,7차에 걸쳐서 수학능력시험 실험평가를 했다. 이 실험평가에는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능문제를 어떻게 출제할 것인지 정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계속 문제를 출제해 보고 학생들이 그 문제를 푸는 방식이었다. 어떤 문제들은 IQ 테스트 같기도 했고, 어떤 문제들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도 했다. 난이도는 들쭉날쭉이었고 종잡기가 어려웠다.


수능체제는 모두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 문제가 출제될지 몰라서 불안했고, 그것은 교사나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학력고사는 보다 명확한 것이 있었지만 수능은 그냥 블랙박스였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고 원칙도 알 수 없었다. 그러한 불안감 속에서 고 2, 고 3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불안감은 수능이 아니었다. 수능 이외에도 대학별 본고사 부활로 수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본고사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본고사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어떤 식을 나올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과거 본고사 기출문제집이나 혹은 일본의 대학입학 문제집이 유행했다. 우리는 수능과 본고사, 둘 다 처음 대하면서 어떻게든 그 속에서 목표를 이루어야 했다.


사설 모의고사도 수능식으로 바뀌었다. 수능의 가이드라인 자체가 명확하지 않으니 모의고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의고사는 여러 업체의 시험 중에서 학교가 선택하여 진행하였는데 이 역시 난이도가 들쭉날쭉했다. 성적이 어떻게 나오든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이 모의고사를 좋아했다. 모의고사를 볼 때 가상으로 대학과 학과를 지원해 볼 수 있었는데,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각기 다른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면서 내가 그중에서 석차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상위권 대학에도 넣어보고, 중위권 대학에도 넣어보았다. 대체로는 공대나 물리학과였다. 서울교대에 넣어본 적도 있다. 내가 넣는 곳들은 지원자가 그리 많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들 어차피 가상이니 상위권 대학 인기학과에 넣는지 몰라도 아무튼 대체로는 여유 있는 합격선이었다. 심지어 서울교대에 지원해 봤을 때는 지원자 5명 중에서 수석을 하기도 했었다. (당시에 서울교대에 남자 T/O가 따로 있었다) 물론 전혀 믿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니겠지만.


초등학교 교사는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직업적 안정성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더 재밌을지, 더 보람 있을지를 생각했던 때였다.


그런 면에서 해군장교는 좀 의외일 수도 있겠는데, 해군사관학교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해사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한 가지, 바다를 좋아했고 배를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사를 가겠다는 생각도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부모님께선 내가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셨다.




솔직히 내 고 2 때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1학년 때보다는 조금 오른편이긴 했어도 이과생 400여 명 중에서 30등 정도의 수준. 애매했다. 이대로라면 내신은 별로 안 좋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


어머니께서는 다시 내가 과외수업받기를 원하셨지만 그냥 혼자 하겠다고 했다. 학원도 다닐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더군다나 어머니께서는 내가 공부 대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것도, PC 통신을 하는 것도, 동호회 모임에 나가는 것도 싫어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것은 교회였다. 결국 그로 인해 어머니와 나는 충돌하고야 말았다.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이다. 부모님께서도 불교셨고, 나도 어릴 때부터 절에 다녔다. 초등학생 때는 절이 아직 지어지기 전이라 상가건물을 임대해서 만든 법당에 다녔고, 절이 완공된 뒤에는 그 절에 다녔다. 그 절의 총본산에도 몇 번 갔었다.


서울로 이사 간 뒤로는 절에도 가지 않게 되었지만 어려서부터 불교를 접하다 보니 나는 불교적 가치관에 익숙했고, 딱히 종교에 대한 생각은 없이 그렇게 지냈다.


고 1 때였던 1991년 10월의 어느 날, 중학생 때 친구가 내게 자신의 교회에 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가 교회의 '총전도 주일'이었다. 호기심에 그 제안에 응했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교회에 가보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가 본 교회는 신세계였다. 아마도 고등부 예배였을 것 같은데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고, 선물도 받았다. 그리고 성경공부도 했다. 또래가 많아서 그러한 분위기가 즐거웠다.


하지만 갈등이 생겼다. 나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어서 간 건 아니고, 그냥 분위기가 궁금해서, 호기심에 가본 것이었다.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되면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도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두 번 정도 그 교회에 갔지만 더 이상은 가지 않게 되었다. 내게 전도했던 그 친구는 아쉬워하며 이유를 물었지만 딱히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석 달 정도 지났을까, 겨울 동안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엔 가기로 결심했다. 이번 기회에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싶어서였다.


어머니께는 교회에 다닐 거라고 말씀을 드렸는지, 아니면 나중에 말씀을 드렸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1992년 2월부터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고, 매주 일반부 예배와 고등부 예배에 참석했다. 일요일 오전에 일반부 예배, 오후에 고등부 예배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별도의 공간에서 고등부 학생들과 같이 놀았다. 그리고 성가대에도 참여해서 연습하는 시간도 있었다.


고등부에는 여학생들도 많았었는데 그중에 관심이 가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관심 표명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답장은커녕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전에도 나를 본체만체 하긴 했지만 그 뒤론 더 그런 듯했다. 결국 잠깐동안의 관심은 그렇게 시들어버렸다.


그럼에도 교회 생활은 즐거웠고, 학교 생활과는 또 달랐다. 성경도 통독해 보겠다고 맘먹고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까지 열심히 읽었다. 성경공부를 위해 주석이 달린 성경도 구매했다. 그 성경책 역시 지금도 갖고 있고,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교리 공부도 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지만 나는 기독교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냥 재밌어서 다녔다고 할 수 있겠다.


1992년 하반기 어느 날이었던 걸로 생각된다. 어머니께 '기타를 배우고 싶다'라고 했다가 결국 폭발하시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쯤엔 어머니께서도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을 알고 계셨고, 처음엔 그냥 예배나 보고 올 줄 알았는데 거의 종일 교회에서 있다가 오니 그에 대해 불만이셨던 것이다. 게다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 분명 교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당시 고등부 남학생들 중에는 기타를 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선 교회를 당장 그만두라고, 공부에 더 집중하라고 하셨다. 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거라고. 나도 물러서진 않았다. 내 인생 내가 사는데 관여하지 마시라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했다.


그 갈등은 꽤 오래갔다. 그러나 '착한 아들 콤플렉스'로 결국 내가 손을 들고야 말았다. 어머니의 뜻대로 기타도 포기하고, 교회에 가는 것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대학에 가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종교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더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그리고 어머니께서 지금은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교회를 고등학교 근처로 옮겼다. 이건 또 다른 친한 친구 때문이었는데, 내가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결국 교회에 못 가게 된 것을 알고 자신의 교회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 얘기는 1993년도 얘기에서 더 자세하게 할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동안 기독교와 교회에 빠져 지내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자유분방함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어느 정도는 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물론 공부도 했지만, 그 외에도 동호회 활동을 하거나 전시회나 공연장에 가거나 등산을 가기도 했었으니까.


특히, 중고등학생 때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클래식 음반을 카세트테이프이나 LP, CD로 구매했었다. 집에는 아버지의 오디오 (보통 '전축'이라고 했다)가 있었고, 나는 카세트/CD 플레이어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이 제품이었을 것 같다. 이 플레이어는 고등학생 시절 나의 동반자나 마찬가지였다.


Screenshot 2024-03-19 at 12.58.34.JPG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soo99k/220413966842


용돈을 모아 클래식 음반을 사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렇게 모은 것들이 꽤 된다. 주로 신촌에 있던 '목마레코드'에서 구입했었다. 그때 목마레코드에서는 음반을 구입하면 종류별로 쿠폰을 하나씩 줬는데 그걸 몇 장 모으면 해당하는 음반을 무료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쿠폰을 모아두기만 했고 쓰진 않았는데 언젠가 폐점해 버려서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그 음반들 중 일부만 내가 갖고 있고, 나머지는 부모님께서 계신 시골집에 있는데 방치한 지 너무 오래돼서 아마 제대로 나올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가끔 공연장에 클래식 연주를 감상하러 갔었다. 저렴하게 표를 구할 수 있거나, 혹은 가장 저렴한 좌석으로 구해서. 그런 것들도 좋았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있던 나와 달리 여느 또래들은 팝이나 대중가요를 좋아했고, 그해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룹이 등장했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


NISI20140822_0010043603_web_99_20140822071403.jpg 이미지 출처: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3&aid=0006029365


TV에서 그들의 무대를 처음 보았을 때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리 감흥은 없었다. 당시 나는 대중가요에 대해 '클래식 음악보다 저급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편견은 고 3 후반쯤 돼서는 거의 사라졌고 지금은 전혀 없다. 가요, 그리고 지금은 K-POP이라는 장르가 된 음악을 좋아한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아마도 또래들보다 문화적 우월주의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화적 우월주의는 음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철학 등에서도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중2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가 센세이셔널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김건모, 박진영, 노이즈, 이소라, 이은미 등 여러 가수들이 데뷔했다. (이건 찾아봤다)


그러면서 1990년대 초반은 1980년대 후반과는 또 다른 대중문화가 만들어지게 됐고, 대중문화의 황금기로 이어지게 됐다. 이로 인해 또래들에게는 그러한 가수들의 동향이 늘 이슈이기도 했다. 뜬소문이긴 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몇 위를 했다더라'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당연히 그들이 빌보드 차트 순위에 오른 적은 없다. (내가 알기론)




1992년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해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쏘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은 여전히 낮았기에 그 위성도 대부분 외국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다른 나라가 로켓 발사할 때 낑겨넣듯 한 것이지만 그래도 최초의 국산 인공위성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p1065595399763400_219_thum.jpeg 우리별 1호. 이미지 출처: https://idsn.co.kr/news/view/1065595399763400


1992년에 기억나는 사건 중 하나는 소위 '휴거'다. 다미선교회라는 곳에서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형적인 사기극이었던 것. 그런데 우리 반 학생 중에 한 명이 그날 다미선교회로 가서 거기 있던 기물을 부순 일이 있었다. 자기 삼촌이 종말론에 빠져 있어서 화가 났다고 하는데 잠깐 TV 화면에도 나왔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주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국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지만 이전에 3당 합당으로 인한 원죄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정통성 논란을 낳은 김영삼 정부는 1993년 2월에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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