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내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3 시절을 보낸다.
사람들에게 고3이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시기일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아마 '대입을 앞두고 가장 스트레스가 많아지는 때'일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입시제도가 계속 바뀌어도 결국엔 고3 때 그러한 것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기에.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름 즐거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공부만 했던 학생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부모님을 많이 속였다. 고 1~2 때는 토요일에 근처 전자상가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숨겼고, 고 2부터는 교회에 다녔던 것을 숨겼다. 그러다가 결국 종교적인 문제가 불거지자 나는 교회에 안 다니겠다고 했지만, 고 3 때부터 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로 옮겼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는 이화여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 교회는 이대 정문 근처에 있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다고 집에서 나왔지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좀 놀다가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갔다. 교회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0~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도 바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한두 시간 정도는 농구를 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농구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93년엔 아직 국내에 프로농구리그가 생기기 전이었지만 대학 농구팀이나 실업팀에서도 스타들이 많았다. 또한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학생들은 상당수가 농구를 좋아했다. 그러한 농구 열풍으로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까지 만들어졌다. (방영은 1994년 초)
그러다 보니 나도 농구를 잘하지는 못해도 경기하는 걸 좋아했고, 혼자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일요일에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기도 했지만, 심지어는 평일에도 일찍 등교해서 아침에 잠깐 농구를 하고 자율학습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 교회는 고 3 말 때까지 다녔다. 교회에 갔다가 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공부를 몇 시간 하고 집에 오면 당연히 피곤했지만 부모님께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온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이다. 교회를 옮겨서 다녔던 건 아마 지금도 모르고 계실 것 같다.
나는 수능을 가장 처음 경험했던 수능 1세대였고, 그 얘기는 예전에 쓴 적이 있다. 아마 상당 부분은 1993년도의 이야기와 겹칠 듯하여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의 글로 대신한다. 다만, 몇 가지 부분을 덧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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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그랬듯이 우리 학교도 아침 0교시, 그리고 야간 자율학습이 있었다. 그때도 '야자'라고 불렀었나? 기억은 정확하진 않지만 그냥 야자라고 하자. 야간 자율학습은 의무사항이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빠질 수가 없었다.
우리 학교는 고 1,2는 신관에서, 고3은 본관에서 수업을 받았다. 또한 고 1,2는 자기 교실에서, 고3은 별관의 독서실에 모아놓고 야자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했던 본관은 내부가 목조로 된 건물이었다. 복도와 교실이 모두 나무였기에 양말에 덧신을 신고 다녔는데 건물이 오래돼서 (내가 다닐 때도 거진 50년은 됐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발도 시렸다. 초등학생 때나 하던 마룻바닥 광내기를 고3 때 해본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화장실도 건물 밖에 따로 있었던가? 아무튼 불편함의 극치였다.
그러한 불편함 때문에 아마 독서실에서 야자를 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감시와 통제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야자에 불만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3년 내내 그에 따랐다. 밤 10시까지 야자를 마치고서야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덜 힘들었다.
야자를 위해선 하루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서 들고 다녀야 했는데 1학년 때는 그렇게 다니다가 짐이 많아 무겁기도 하고, 또 저녁쯤 되면 아무리 보온도시락이라고 해도 식거나 별로 맛이 없어져서 저녁은 학교 근처 분식점이나 음식점에서 먹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 근처 음식점들은 저녁때가 되면 학생들로 북적였다.
야자를 할 때는 이어폰을 꽂는 것이 금지사항이었는데, 영어 공부를 하는 경우만 예외였다. 그래서 가끔 카세트 플레이어로 이어폰을 꽂고 듣는 학생들이 있었고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중에 영어 공부를 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음악이나 라디오를 듣고 있다가 감독교사가 영어공부하는지 확인하려고 할 때만 플레이 버튼 눌러서 영어 공부 하는 척했으니까.
당시에는 소니의 워크맨이 가장 인기였고, 나는 파나소닉 제품을 썼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아래 그림의 제품과 비슷한 것 같다. 워크맨은 소니의 제품명이지만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였다. 그리고 국산 (삼성 마이마이 같은) 제품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다. 아무래도 디자인이나 기술적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일제 제품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당시에도 라디오를 좋아해서 공부할 때 라디오를 틀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밤늦게 혹은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는 경우도 있어서 심야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주로 클래식 FM 방송이었지만 가끔은 일반 방송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라디오를 좋아하고, 운전할 때나 집에 있을 때는 라디오 방송을 틀어 놓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지내셔서 그럴 수도 있겠다. 라디오는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고, 위로가 되었다.
1993년에는 대전에서 엑스포가 열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기간이 8월 초부터 11월 초까지였다. 1993년에는 수능을 8월에 한 번, 11월에 한 번을 치렀다. 그러다 보니 엑스포에 가고 싶었지만 시기가 참 애매했던 것이다.
사실 8월에 1차 수능이 끝나고 한 번은 가볼 수 있었을 법도 한데 결국 부모님께서는 데려가지 않으셨고, 나 혼자 다녀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결국 대전 엑스포에는 가지 못했고, 그것이 아직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한 해만 빨랐거나 늦었더라도, 아니면 시기가 좀 더 빨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고 3 때 제약은 그 외에도 많았다.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났을 때쯤이었나, 나는 PC 통신을 금지당했고, 부모님께 모뎀을 뺏겼다. 그때까지도 나는 PC 통신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선 그게 내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PC 통신이 내 성적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부모님의 불안요소였을 따름일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불만이었고, 고 3 기간 동안 부모님과 여러 번 부딪혔던 것 같다. 아니면 부모님을 속이거나.
그래도 가끔은 혼자, 또는 친구들과 등산을 가거나 혹은 연주회를 감상하러 가거나 혹은 영화를 보러 가기는 했었다. 그래봐야 그런 날이 1 년에 몇 번 되진 않지만 그마저도 못하게 하면 더 반항할 거라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의 고 3 수업은 다소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진도를 나가긴 했지만 수업이나 시험은 수능 준비나 본고사 준비 양쪽 모두를 대비하는 식이었는데 수능과 본고사의 성격이 너무 다르다 보니 다들 혼란스러워했다. 게다가 8월과 11월, 두 번의 수능을 치러야 했으니 1학기 때부터 압박감이 심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내 성적은 좀 더 올라서 1학기 때는 전교 10등, 2학기 때는 전교 5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내신은 2등급 (15 등급제)이었는데 아쉬웠지만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었다.
8월에 1차 수능을 보고 점수가 나왔을 때 지원 가능한 대학과 학과를 대략 추려볼 수 있었다. 2차 때 성적이 더 오를지 내려갈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1차 성적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아직 지원할 대학과 학과는 정하지 못했다. 고 3 때도 나는 여전히 모의고사 때 여기저기를 모의지원해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가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려했던 대로 2차 수능 때 점수가 대폭 하락해서 결국 1차 수능 점수로 대학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참 애매했다. 내신과 수능 점수가 높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상위권 대학에 지원해 볼 만 하기는 했다.
나는 물리학과와 생물학과를 놓고 고민하다가 물리학과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선 이번에도 "물리학과 나와서 취업이나 제대로 하겠냐? 그냥 공대로 가."라고 하시며 반대하셨다. 우리 부모님께서도 그러셨지만, 학부모들의 인식은 대체로 문과나 자연대나 거기서 거기였다. 특히 아버지께서 더 그러셨는데 결국 나는 공대로 가기로 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북핵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반도는 계속 핵전쟁의 불안에 휩싸이게 된 듯하다.
그 해 하반기에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출간되었고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휘소 박사를 모티브로 했다는 얘기에 나도 읽었었는데 그 책을 읽고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 소설은 음모론적 내용이며, 이휘소 박사의 일화도 그냥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실제와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핵물리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 북핵문제나 국제 관계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핵무기 보유 당위성에 대해서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어린 치기에 그렇게 생각했었고, 참 순진했었다. 여담으로, 김진명 작가의 책은 그 뒤에 두 편인가 더 읽긴 했지만 더 이상은 읽기 않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원자력공학과를 진로로 선택하게 되었다. 물리학과와 비슷한 성격의 학과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핵물리학과 핵공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서도 원자력공학과로 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셨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서울소재 공대의 원자력공학과에 특차로 합격했고, 나의 고등학생 시절은 그렇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2차 수능과 학교 기말고사까지 일찌감치 끝난 뒤, 나는 다시 PC 통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주로 활동하던 시문학 동호회가 기존의 한마을 BBS에서 인디텔이라는 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아무래도 한마을 BBS가 유료인 데다가 동시 접속자수도 적고, 부산지역에서 운영한다는 점 등이 불편했었는데 그때 결국 한마을 BBS가 문을 닫았던가, 아무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옮겼다는 사실은 이미 친구를 통해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회원들은 그대로였고 글들도 옮겼기 때문에 기존의 분위기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인디텔은 1993년 7월에 시작된 서비스로, 인천지역의 여러 기관들이 합작하여 만든 서비스다. 주축은 인하대학교와 인천일보였지만 인천시청이나 기타 인천소재 기관들이 참여했다.
동호회를 인디텔로 옮기자 인천지역의 회원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이후에는 인천 쪽에서 모임을 갖게 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나는 연고가 없던 인천에 정이 생겼고, 이후에도 내 삶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자유시간이 많이 주어짐에 따라 대학 입학 전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고자 했다. 사실 그전부터 프랑스어를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1차 수능이 끝난 뒤에 EBS 방송을 보며 프랑스어 공부를 좀 하다가 2차 수능이 끝난 뒤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했다. 당시 EBS 프랑스어 강의에는 프랑스인 보조강사가 같이 출연했었는데 이름이 '이다 도시'라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어는 그렇게 독학으로 배울 수 있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 조금 공부해 둔 것이 뒤에 아주 가끔 도움이 되기는 했다.
또한 겨울에 석 달 정도 검도를 배웠다. 초반엔 시간 여유가 많았기에 오후반으로 다녔는데 대학 입학 후에는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새벽반으로 옮겼다. 하지만 새벽반은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고, 결국은 3개월 정도만에 그만두게 돼서 아쉬웠다. 의지가 부족한 탓이었겠지. 호구도 입어보고 싶었는데...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여 '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비로소 군부정권으로부터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3당 합당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아직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었고, 김영삼 정권은 초기부터 정통성의 문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정책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해체다. 하나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군 내 사조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핵심세력들이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그들을 숙청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결국 속전속결로 이루었다. 금융실명제 또한 비자금이나 불법자금들을 척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1993년에 추진된 정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쓰레기 종량제 실시와 분리수거제 실시다. 지금은 정착되어 있는 그 제도가 30여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렇게 정치, 사회적으로 개혁해나가는가 싶던 김영삼 정권은 금세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고 그립기도 하다. 그런데 뭐가 가장 아쉬운가?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었다면 나는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을까? 또는 다른 학과를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과 달라졌을까?
하지만 별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길로 갔더라도 (아예 문과계열로 가지 않는 한) 지금과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 같고, 비슷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의대를 가지는 못했을 거고, 자연대 아니면 공대였을 테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들께 반항도 많이 했지만 대체로는 순응하고 따르면서 보냈던 것 같다. 사회에 대한 불만도 많았고 때론 저급한 분노도 표출했지만 커피잔 속의 태풍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보면 그냥 평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이후 대학에 가면서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소용돌이가 되었다. 그때 내 인생의 분기점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장밋빛으로만 보이던 시기였으니까.
내 아이나 지금의 학생들이 본다면 나는 시대를 잘 만나서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고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요즘의 너무 복잡해진 입시제도에 비해 당시의 제도 변경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되는 것은 또 다를 것이다. 모든 고등학생들은 그때의 당사자였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