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 X세대라 불린 대학새내기

응답하라 1994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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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X세대였던 우린, 하루아침에 저주받은 학번이 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나왔던 대사다. 나도 당시 이 드라마를 매주 공감하며 봤었는데 딱 내 또래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1994년, 나의 날들도 그렇게 찬란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빛나기만 하지는 않았다. 내 안에서는 사회를 향한 분노도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을 상징하는 단어 두 가지를 고르라면 'X세대''오렌지족'이 아닐까 싶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렌지족을 X세대의 부분집합으로 보기도 한다. 오렌지족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X세대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듯하다.


나는 명백히 X세대에 해당한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게 분류된다. 그러나 X세대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사실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도 X세대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3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TV 광고에서도 나오고, 매스컴에서 자주 나오면서 갑자기 확산되어 내가 대학에 갈 무렵에는 이미 X세대라는 용어가 굳어져버렸다. 그리하여 94학번들부터는 X세대라는 인식이 더 강해졌다. 즉, 1970년대 초반생들은 소급적으로 X세대라는 구분이 지어진 것에 반해 1970년대 중반생들부터는 전향적으로 그러한 구분이 지어진 것이다.


다운로드 (2).jpeg 1993년에 등장했던 광고. X세대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X세대의 구분이나 특징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느낌이 든다. 화석이 되어버린 어느 시간들.




1994년, 나는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 비록 입학 전부터 수학을 비롯해서 몇 과목을 선수강해야 하는 예비학교에 다녀야 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이의 어정쩡함. 수능 첫 세대에 본고사도 치르지 않은(그 학교는 원래 본고사를 치른다고 했다가 결국 내신과 수능성적만으로 선발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학업능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혼란 속에서 대규모 미달 사태가 발생하면서 학생들의 성적 편차가 컸기에 학교로서는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우리 과도 정원이 50명이었지만 2 지망까지 채우고도 최종적으로는 45명 밖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학번은 선배들이나 교수님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으로 비치진 못했다.


입학 전,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꿈에 그리던 매킨토시 컴퓨터를 구입했다. LC475, 파워맥 이전의 마지막 매킨토시 기종이었다. 내가 다니게 될 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던 엘렉스컴퓨터 대리점에서 구입했다. 이 엘렉스컴퓨터 대리점에는 학교 다니는 동안에 자주 드나들면서 정보를 얻거나 프로그램을 구매하기도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기분이 좋으셨던 부모님께서는 결국 사주시기는 하셨지만 그게 부모님께는 정말 큰 부담이었을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생각만 했던 철부지였다.


당시 대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을 합쳐도 100 만원 중후반대(정확한 금액은 기억이 안 나지만 200 만원은 넘지 않았다)였는데 컴퓨터, 모니터, 프린터, 외장형 CD롬, 외장형 모뎀까지 합한 금액은 300만 원대 중반이었다. 그것을 최대한 길게 카드 할부로 구입해 주셨던 것이다. 아마 무이자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


물론 그보다 더 비싼 기종들도 있었으나 가정 형편상 무리였고, 이 정도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IBM PC 호환기종은 386SX 또는 386DX 기종들이 많이 이용되고 있었고 486 PC도 나오기 시작했는데 LC475는 386SX와 비슷한 정도의 성능이었다. 어쨌든 당시 386 기종들도 가격이 그리 저렴하지는 않았었기에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본체보다는 모니터나 프린터, CD롬, 외장형 모뎀 등의 가격이 비쌌던 탓이 있지만.


dsc_00272.jpeg 이미지 출처: https://oldcrap.org/2018/11/30/macintosh-lc475/#jp-carousel-3054


그러나 맥을 구입한 것은 명백한 나의 판단 미스였다. 공대생이 맥을 쓰는 것은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과제물이나 간단한 출력물이야 번들로 들어있던 Claris Works를 쓴다 쳐도 수식이 많이 들어간 물리, 화학실험 리포트나 전공과목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LaTeX을 익혀서 대부분의 리포트를 그걸로 편집해서 출력한 후 제출했다. LaTeX을 익혀둔 건 나쁘진 않았지만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게다가 컴퓨터 과목 시간에는 코딩도 해야 하는데 맥용 포트란이나 C 컴파일러를 구해서 했고, 그게 PC용 혹은 유닉스용과는 또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표준문법은 상관이 없지만 맥용으로 특화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나의 로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었다.




당시에는 대학에서 사용되던 용어들을 우리말 또는 순화된 표현으로 바꿔서 부르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러한 예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것들 역시 1990년대 초반부터 정착된 듯하다. (지금은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신입생 > 새내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 새내기 새로배움터 (줄여서 '새터')

MT > 모꼬지

동호회 > 동아리

단체 일기장 > 날적이

축제 > 대동제


2월 말에 새터를 갔었지만 어디로 갔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강원도쪽이었던 것 같은데 속초였나. 콘도에서 2박 3일을 보내면서 여러 행사를 가졌다. 그러나 밤마다 술을 엄청나게 마셨고, 계속 숙취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는 술을 마셔야 했고 마셨다. 나도 술자리를 좋아했기에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문화는 대학생활 내내 이어졌지만 19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달라지기 시작한 듯하다.


예비학교와 새터 덕분에 과 동기들 및 선배들과도 친해졌다. 그래서 학교 생활은 별다른 문제없이 잘 보낼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대학 생활을 소재로 한 청춘 드라마들도 꽤 많았는데, <내일은 사랑>, <우리들의 천국>, <질투>, <마지막 승부>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고등학생 때도 그런 드라마들을 통해 대학생활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고, 대학 생활은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부합하기는 했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과 다른 점들 또한 분명했다.


다운로드 (1).jpeg 드라마 <내일은 사랑> 중에서


대학 수업은 따라갈만했지만 재미는 없었다. 대부분 교양필수 과목들이었는데 일반물리학, 일반화학, 미적분학, 일반물리학 실험, 일반화학실험 등이었고, 컴퓨터개론, 영어, 그리고 필수영역 교양과목이 있었다. 유일하게 선택 가능했던 교양과목으로 나는 '종교와 철학'을 선택했다. 기대와는 달리 지루했고 재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A+을 받았다.


컴퓨터개론은 컴퓨터실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당시 컴퓨터실은 메인프레임에 연결된 단말기들이 놓여 있었다. 단말기는 말 그대로 모니터와 키보드만 놓여 있는 상태였고, 각기 유닉스 계정을 받아 그걸로 실습을 했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유닉스 명령어, 그다음이 VI 에디터였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포트란을 배웠다.


아, 메인프레임에 연결된 단말기에서 VI 에디터로 포트란을 배우던 시절이라니. 그런데 그러한 방식은 우리 학번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개인용 PC를 도입한 컴퓨터 실습실이 만들어짐에 따라 95학번들부터는 거기서 실습을 하게 됐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MS-DOS 환경이었거나 MS Windows 3.1 환경이었겠지)


그와는 별개로, 나는 다른 과 친구 (고등학생 때 같이 프로그래밍을 하던) 덕분에 워크스테이션실을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Sun SPARC 등이 있어서 MOSAIC로 웹브라우징도 가능했다.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이라는 것을 접해본 순간이었다. 물론 인터넷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컴퓨터 실습실에서 몰래 텔넷으로 외국 사이트에 접속해 본 적은 있었지만 WWW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그리고 1994년 후반에는 일반 가정에도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용요금은 좀 비쌌고 여전히 전화요금의 부담도 있었지만 나도 KORNET에 가입해서 이용하였다.




동아리는 '대학생활의 꽃'으로 불린다. 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되자 어느 동아리에 가입할지 고민을 했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동아리는 문학동아리, 검도동아리, 신문사였다. 그러나 문학동아리나 검도동아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신문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담이지만, 동아리 모집 시즌이 되면 기독교계열 모임에서는 신입생들에게 선교하러 다녔다. 좀 극성이다 싶을 정도로 달라붙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한두 번 얘기하다가 포기하기 마련인데 내 경우에는 IVF(한국기독학생회)에 있던 한 분이 나를 선교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계속 거절해도 정말 끈질기게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러한 관계는 무려 6년간이나 이어졌다. 학교 다닐 때뿐만 아니라 내가 군대에 갔을 때도 계속 편지를 보내왔고, 내가 복학한 후에도 그랬으며, 심지어는 그가 독일로 유학을 간 뒤에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다른 대학원에 진학할 때까지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데 갑자기 생각이 난다. 궁금하다. 왜 나를 그렇게까지 선교하려고 했었는지.


사실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됐고, 종교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나를 기독교도로 되돌리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다시 동아리 얘기로 돌아온다. 신문사는 학교신문사(보통 학보사라고 하는)가 있었고, 새로 만들어진 공대신문사가 있었다. 공대신문사는 1993년 말에 창간예비호, 1994년 3월에 창간호를 막 발행했고 신입부원을 모집하던 중이었다.


학보사로 갈지 공대신문사로 갈지 고민했는데 결국 공대신문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단 학보사는 매주 신문을 발행해야 하기에 굉장히 바쁠 것 같았고, 운동권 성향이라 나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 반면 공대신문사는 공대생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나와 연관성이 높을 것이라 생각했고, 한 달에 한 번 발행하기에 부담도 적을 듯했다.


그 공대신문사는 학교 및 학생회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인 기구였고 재정 지원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광고기획사를 통해 광고비를 받아 신문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초기에는 광고기획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발행부수도 꽤 많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적합한 광고기획사와 계약을 했고, 재정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학기에 네 번의 신문 발행, 한 번의 잡지 발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공대신문사 2기로 들어갔다. 1기 선배들은 여섯 명이었고, 2기 동기들 또한 여섯 명이었다. 그렇게 열두 명의 단출한 식구들이었지만 단합도 잘 되고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신문사방에서 보냈다. 신문사방에는 '걸음마'라는 날적이가 있었는데 거기에 정말 끊임없이 글을 적었던 것 같다.


1994년 1학기 동안은 수습기자로 지내며 교육을 받았다. 선배들로부터 기사 작성 방법, 인터뷰 요령 등을 배웠고, 실제로 학교 주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는 연습도 했다. 체계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때 배운 것들은 이후에 기사를 작성하거나 글을 쓸 때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토론(보통 '독토'라고 불렀다)과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한 교육도 있었다. 나는 그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민중가요들도 배웠다. 그러한 것들은 운동권 모임에서 주로 행해지던 것들이었지만 어쨌거나 공대신문사의 선배들도 그러한 성향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됐다.




당시 우리 학교는 민족해방(NL)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고, 1993년에 출범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줄여서 '한총련') 소속 대학교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한총련은 1994년 2기 출범식부터는 좀 더 강경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Screenshot 2024-04-02 at 10.03.47.JPG 1994년 제2기 한총련 출범식.


1994년 3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타결로 인해 쌀수입이 결정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집회가 있었다. 이때가 나의 첫 집회 참석이었다. 학교 내에서 모인 인원은 교문 밖으로 나갔고, 이내 도로에서 전경과 대치했다. 몇 시간의 대치 끝에 해산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그저 맹목적으로 참석했고, 왜 집회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체행동에 휩쓸리기 십상이었고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순수했다. 나라와 사회를 걱정하던 그 마음은 비록 어린 치기였다고 할지라도 순수했었다. 누군가 그것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점차 나의 성향이 NL 계열이 아닌 민중민주(PD) 계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PD 계열은 운동권 내에서도 마이너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가 그리 넓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소신이 있었고, 나름의 운동을 이어갔다. 나는 PD계열의 모임과 직접적인 연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그러한 성향을 분명하게 보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 이후의 얘기지만.


1994년 7월, 주체사상파(일명 주사파) 파동이 벌어지면서 학생운동은 정부와 대립의 각을 더 세우게 되었다. 이는 7월 8일, 북한 김일성의 사망 조문 사건과 서강대 박홍총장의 발언으로 벌어졌다.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국내에서도 꽤 충격적이었는데 그와는 별개로 점점 더 공안정국이 되어 갔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 노동계 등과 정부의 대립은 지속되었고, 이는 1996년에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1994년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1993년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선언했고, 1994년 봄에는 '서울 불바다'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는 미국의 선제공격설에 대한 북한의 민감한 반응이었다. 한반도 위기설도 대두된 가운데 6월 경에는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마저 나왔다.


20210708_060345.jpg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dsh0203/222424084751


하지만 북미협상이 이어지고 있었고,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김일성이 사망했으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주사파 파동은 짜인 각본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에 대해 적대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위기는 북미협상 타결(제네바 합의)로 인해 해결되는 듯했지만, 이는 뒤에 계속되는 문제를 남겨두었다. (북핵문제를 30년 이상 더 끌고 있으니)


1993년도 편에서 얘기했지만, 나는 원래 핵무기를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원자력공학과에 진학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원자력에 대한 생각과 핵무기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나는 원자력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으로, 그리고 핵무기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당시 '서울 불바다' 얘기가 나오고 북한의 핵위협이 계속되자 우리 과 교수님과 대학원 선배들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으로 인한 피해 범위를 시뮬레이션해서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었고, 수업 시간에도 알려주었다. 정확한 결과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예상했던 정도이긴 했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가던 정국도 10월이 지나서야 겨우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




아무튼 1학기를 무사히 마쳤다. 성적도 나쁘진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비록 기성회비 면제 정도였지만 그 금액도 꽤 컸다.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친척분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한 달 반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아버지 회사 근처에 있는 곳이었는데 일반주택의 지하실을 공장처럼 운영하던 곳이었다. 여기에서는 실공장에서 온 실을 모두 풀어서 다발로 만들어 다시 포장한 후 염색공장으로 옮기는 일을 했는데 공장의 특성상 선풍기나 냉방장치가 없었다.


1994년의 여름은 매우 더웠다. 지금도 역대급 더위로 회자되곤 하는데 나는 특히나 그런 환경에서 일을 했었기 때문에 그 더위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더 편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런 일을 하겠다고 한 것은 노동으로 버는 돈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동현장을 직접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친척분이 운영하던 곳이라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서 일을 하고 아버지와 같이 집에 왔다. 그러한 시간 동안 나는 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버지께서 힘들게 회사에 다니시며 일하신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중1 때 서울로 이사 가기 전에는 아버지 회사 근처에 살았었기에 초등학생 때는 아버지의 회사(공장)에도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래서인가 공장과 노동환경에 대한 익숙하면서도 그에 대한 문제점들도 느끼게 됐던 듯하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나의 PD 성향을 가속시켰을 것이다.




공장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얼마 뒤인 7월 말,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출발일이 하필 공대신문사의 정식기자 임명식날이었다. 또한 2대 편집장 선출도 했다. 나는 그 행사에 참여했다가 밤에 서울역에서 친구들과 만나 기차로 가기로 하고 배낭을 챙겨 갔다.


한 학기 동안의 수습기자 딱지를 떼고 정식 기자가 된 후 축하하는 의미에서 뒤풀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서 과음을 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술을 좀 많이 마신 상태였는데 막바지에 90학번 선배가 수저통에 소주 한 병씩을 부어주며 원샷을 하라고 하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 마셨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나는 분명히 거절했어야 했고, 그날 과음을 했어도 안 되었지만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지리산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정신에서도 겨우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친구들과 만나 남원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도 나는 거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정말 힘들게 내려갔다. 물론 친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ㅋ)


새벽에 남원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구례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나 나는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대로 등산을 시작하게 됐다.


우리가 가는 코스는 구례 화엄사~산청 대원사로 이어지는 종주 풀코스였는데 3박 4일 일정으로 잡았다. 그러나 이틀 정도는 가뭄이었지만, 이틀 정도는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우리의 일정은 하루가 더 늘어나 4박 5일이 되었다.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숙박을 했고 밥도 해 먹었기 때문에 식량을 여유 있게 준비했다고 해도 마지막날에는 거의 부족해졌다. 게다가 환경이 너무 극악해지다 보니 같이 갔던 네 명의 친구들은 서로 감정적으로 격화됐고, 결국 산에서 다 내려와서는 서로 헤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한 친구만 제외하고는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게 됐다.


지리산 종주는 여러모로 기억에 많이 남지만, 출발부터 잘못됐던 것은 내 책임이 크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중간에 서로 조율을 잘하지 못했던 점도 아쉽다.




8월에는 신문사 선배, 동기들과 함께 전국 탐방을 가기로 했다. 12인승 승합차를 렌트하여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KAIST, 창원 기아정공, 울산 현대자동차, 포항제철에 있는 선배들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숙박은 텐트를 치고 지냈었나? 아무튼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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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21888549&memberNo=22197681&vType=VERTICAL


그곳에 있는 선배들에게 미리 연락을 해두긴 했지만 사실 안면이 없었고 우리가 공식적인 기구도 아니었기 때문에 회사 측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에 갔을 때 그곳에 계시던 선배분이 우리가 타고 갔던 승합차 (현대에서 만든 그레이스 12인승)를 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 차에 열두 명이나 타요? 차 안 퍼졌어요?


자신들이 만든 차였는데도 별로 신뢰감이 없었나 보다. 열두 명의 인원에 짐도 잔뜩이었으니 그 차는 아마 무리를 하긴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자동차 엔진의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현대자동차에 방문했을 때는 자체 개발한 알파엔진과 베타엔진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뒤로 국내 자동차 기술도 많이 발전했음을 느낀다.


일정의 마지막으로 포항의 월포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해수욕을 하기로 했으나 태풍이 와서 모두 급히 철수해야 했다. 마지막이 좀 아쉽긴 했지만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런 행사는 그 이후로는 하지 못했다.




1학년 2학기도 1학기와 별로 다른 점은 없었다. 배우는 과목도 비슷했는데 2학기가 돼서야 전공필수과목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교양필수로 영어 대신 국어과목이 있었고, 영역별 교양선택과목으로는 '음악의 이해'를 신청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좋았던 점 중에 하나는 음악공연이나 연극공연을 자주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수를 초청하여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었고, 음대에서는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또한 연극반에서도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문화생활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도 그런 공연이 있으면 보러 다녔고, 대학로도 가까워서 연극도 자주 봤다. 영화도 좋아해서 영화도 자주 봤었다.


'음악의 이해'는 유익하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것도 공부로 배우고 시험을 보게 되면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수업은 '오페라' 위주였는데 오페라 아리아들을 계속 틀어주고 어떤 작품의 어떤 제목의 아리아인지를 맞추는 시험도 있었다. 유명한 것이야 괜찮지만, 귀에 익지 않은 아리아들은 꽤 어려웠다.


그리고 2학기부터는 공대신문사 정식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나는 과학/학술부에 배치되었다. 단편적인 과학계 동향도 썼지만 내 원래 관심은 학술기사였다. 그러나 이건 선배가 쓰고 있어서 나는 일정 기간 동안은 과학 기사를 위주로 썼다.


12월이 되어 2학기도 끝나고, 2학기도 별다른 문제없이 잘 보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으며, 1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기성회비 면제 장학금도 받게 됐다.


겨울방학 동안에는 가칭 '신문사학교'를 운영했다. 이는 사회의 소외된 계층들을 돌아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방문했던 곳으로는 구룡마을, 무허가판자촌, 재개발예정지 등이 있었다. 대체로는 철거민들이 있는 곳이었고, 늘 철거의 위협에 시달리던 곳이었다.


처음 방문해 본 구룡마을은 상당히 의외인 곳이었다. 서울에 그런 곳이 있다는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인터뷰를 했던 교회 목사님의 얘기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산등성이에 재개발 예정지가 있었다. 주민들과 철거반 사이에 폭력적인 대립이 있던 곳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는 어른들은 순찰을 돌고 있었고,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그 아이들이 기억에 남아서 몇 번 그곳을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들이 이후에 내가 철거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앞서 다른 집회에 참여했을 때와 마찬가지지만 나는 돌아가는 현실은 잘 몰랐다. 단지 그들이 부당한 처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사회는 부조리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민중들이 많았다. 그러한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




신문사 활동과는 별개로, 나는 교내 고등학교 동문회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나보다 몇 학번 위였지만 그다지 거리감이 없었고, 온오프라인으로 자주 만났다. (PC 통신상에도 동호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뭔가 의미 있는 활동도 해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대학교 근처에 있는 영유아원(고아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주말이었나 주중이었나, 아무튼 시간이 되는대로 그곳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그곳에는 생후 몇 개월부터 네댓 살까지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잘 따르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숨겨놓은 딸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30대 중반 정도 됐겠네. 어디서 어떻게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PC 통신상의 문학동호회 활동도 계속 이어갔다. 1994년 언제쯤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그 동호회의 3대 촌장(운영자)이 되었다. 인디텔로 옮긴 이후 회원구성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기존 회원들과 새로운 회원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했었다.


동호회 운영은 기존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활동 무대는 아무래도 인천 쪽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나도 인천에 자주 가게 됐고, 인천에 있는 회원들과도 더 친해지게 됐다. 그러면서 기존 회원들과 새로운 회원들 간의 거리감이 생기면서 결국에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나는 인천 쪽에 더 가까워졌다.


그러다 12월의 어느 날, 한 회원이 내게 채팅을 신청했다.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여자회원이었다. 그는 다른 회원이 자신을 괴롭힌다며 조치를 취해 달라고 했다. 사실 그러한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운영자로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조치를 취할 수는 없지만 어려움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몇 번 채팅을 하고, 나중에는 전화 통화도 하게 됐는데 그러다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고, 공식적으로 나의 첫사랑이다. 초등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감정은 아니었고, 스무 살 즈음이 돼서야 연애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집은 인천 주안동이었다. 천주교 집안이어서 이름도 세례명이었고, 성당에 다녔다. 그리고 신촌에 있는 학교 영문과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발레를 했고 외국에서 발레리나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더 이상 발레를 못하게 돼서 한국에 돌아와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을까? 그랬던 것 같다. 그녀를 좋아했고 사랑했기에 의심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연애 초기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동호회 사람들도 우리의 연애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모임 때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모임 이외에도 번개나 또는 둘만 만나는 일도 잦아졌다. 비록 전철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1994년에는 개인적으로도, 사회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1994년은 좋았던 기억이 더 많다. 대학생이 되었고, 더 이상 부모님의 간섭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또 생각해 보게 됐다. 더불어 사회에 대한 인식도 더 심도 있게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학생운동, 특히 PD계열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문민정부는 벌써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북핵문제와 전쟁위기 등으로 남북문제와 외교문제에서도 한계를 드러내는 듯했다. 그러한 것을 공안정국으로 해결해 보려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있던 다리여서 그 다리를 통해 통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특히 우리 학교 근처 여고의 학생들 희생자가 많았다. 이로 인해 학교나 주변의 분위기가 한동안 무거웠다.


Screenshot 2024-04-02 at 11.51.36.JPG 성수대교 붕괴 모습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고도의 산업화를 이룬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것이 비단 김영삼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러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됐다.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전국의 모든 다리들을 정밀검사하고, 몇 개의 다리들을 재시공하기로 하였다. 특히 내가 주로 이용하던 당산철교가 철거 후 재시공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때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그 외에도 내가 잘 알던 다리들(내 고향에 있던 대교와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의 육교도)도 철거 후 재시공되었다.


그렇게 나의 1994년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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