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 사회운동에 뛰어들다

나도, 대한민국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by 칼란드리아
대학생 시절, 나는 육체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다.
그러한 노동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외를 딱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1994년의 겨울방학 때, 그러니까 1994년에서 1995년으로 넘어갈 때였다.


내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고, 어머니 친구분께서 고등학생 딸의 과외를 내게 부탁하셨던 것이다. 사실 나도 그분을 알았고, 그 고등학생 딸도 알고 있었다. 나와 두 살 차이였나? 하지만 어릴 때 본 이후로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 전혀 기억에 없었다.


약 두 달간 그 집에 가서 영어와 수학 과외를 했다. 과외는 처음이라 (그리고 나도 과외를 받아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문제집 진도를 나가고 모르는 것 풀어주는 정도였는데 역시나 나는 과외 체질은 아니었다. 배우는 것도, 가르쳐 주는 것도. 내가 남을 가르치는데 별로 소질이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래도 과외로 용돈이 생기니까 부모님께 손을 덜 벌릴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리고 여자친구와도 종종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주로 인천 쪽에서 데이트를 했다. 자주 갔던 곳은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겠지만) 뮤직 카페였다. 음료를 주문하고, 신청곡을 DJ에게 전해주면 음악을 틀어주는 그런 곳이었는데 1990년대 중반에도 그런 곳이 꽤 많았다. 음악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통 카페나 별 다를 바는 없지만.


그리고 가끔은 여자친구가 다니는 성당의 미사에도 참석했다. 비록 내가 개신교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지만, 천주교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성당의 분위기도 편안해서 괜찮았고, 공동번역성경의 문체도 독특해서 괜찮았다. 그래서 천주교 교리도 조금 공부했었다. 그리하여 나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모두 접하게 된 것이다.


여자친구와 함께 음악이나 애니메이션 얘기도 하고, 시에 대한 얘기도 하고 (아무래도 문학동호회 활동은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보냈는데 특별히 하는 것이 없어도 좋았더랬다.




1995년 개강을 앞두고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공대신문사에서도 새터(OT)에 참여하여 취재도 하고, 신문사 홍보도 했다. 물론 과 후배들도 만나 즐겁게 보냈다. 그리하여 나중에 과 후배 두 명을 공대신문사로 유인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적극적으로 오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1994학년도 입시와 같은 미달 사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수능은 연 1회만 보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첫해보다는 안정화되는 듯 보였다. 그건 내가 입시 당사자가 아니어서 여유로운 마음이라 그렇게 보였을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우리 때가 가장 고생했다고 느끼듯이, 매년 입시생들은 본인들이 가장 힘들었다고 느낄 것이다.


공대신문사에는 과 후배 두 명을 포함해서 총 여섯 명의 신입부원이 들어왔다. 여학생도 한 명 있었다. 우리 학교 공대는 여학생의 비율이 극히 낮아서 (당시 5% 미만이었다) 공대 내 동아리에 여학생의 비율 역시 낮은 편이었다. 그래도 매 기수에 한 명 이상은 있었네. (1기가 이례적으로 가장 많았지만)


2학년 1학기가 되어 나는 과학/학술부장을 맡게 되었고, 학술면을 책임지게 되었다. 비로소 내가 쓰고 싶었던 기사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은 선배들의 가이드가 필요했다.




2학년이 되자 대부분 전공과목으로 채워졌다. 전공필수 및 전공선택, 그리고 공업수학 등 교양필수 과목들이 있었다. 더불어 1995년도부터 학교에 사회봉사 과목이 신설되었다. 이건 매 학기 또는 계절학기 때 1학점 씩 신청할 수 있었고, Pass/Fail로만 평가되었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사회봉사 과목을 4학점 이수하였다.


1995년 1학기 때 신청했던 사회봉사 과목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책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책 한 권을 타이핑하는 아주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스캔해서 OCR로 변환하거나 아니면 아예 출판 전에 파일을 이용해서 변환하는 시스템이 없었다. 탁상출판(DTPS)이라는 것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때니까.


아무튼 그 과목을 신청하면 처음에 안대를 쓰고 지팡이를 이용해서 교내를 한 바퀴 돌아오는, 시각장애인 체험이 있었고, 타이핑을 다 한 파일을 디스켓에 넣어서 그 시각장애인센터를 직접 방문해서 점자책을 만드는 과정까지를 경험하도록 했었다. 내가 타이핑해 간 책으로 만드는 건 아니고, 만드는 과정이 전시된 시설물을 보는 것이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사회봉사였다.


전공필수 과목으로 핵물리학과 핵공학 등 내가 배우고 싶었던 과목들도 배우게 됐고, 전공선택으로는 전자기학과 재료공학을 들었다. 핵물리학은 본격적으로 핵물리학을 배우기 전에 현대물리학을 배우는 과정이었고, 전반부는 상대성이론, 중반부부터는 양자역학과 통계역학 등을 배웠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물리학과에서도 그 정도 수준인 것 같지만) 역시나 이해가 어려웠다. 특히 거진 한 달에 걸쳐서 수소원자에 대한 슈뢰딩거 방정식 해를 구할 때는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흥미로웠다.


435571399_815783147234461_1763231348689166510_n.jpg 이미지 출처는 모름. 이 그림만 가지고도 두 시간 이상은 강의할 수 있을 듯. 사실은 한 학기로도 부족함.


반면 핵공학은 핵물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것의 응용을 다루는 과목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주로 원자로 내에서의 핵반응을 다루는 것에 집중한다. 사실 핵공학이라는 게 특별할 게 없고, 핵연료 물질 내에서 중성자가 어떻게 분포하고 움직이느냐를 보는 것이라 미분방정식과 벡터가 계속 나온다. 사실 공대 수학이라는 게 대체로 그런 식이긴 하지만.


전자기학은 굳이 전자과에 가서 수강했다. 우리 과 전공과목으로도 개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안 맞았던가 아니면 전자공학과에서 듣는 것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해서 그랬던가. 그러나 이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강의해 주신 교수님도 맘에 안 들었지만 아무래도 전자과는 전자기학이 전공필수과목이라 전공선택인 나보다 더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굴러 들어온 돌이었고... 그래놓고는 2학기 때도 전자기학2를 또 전자공학과에 가서 수강했다.


그런데 나는 공대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공학자가 되기보다는 신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대와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관련된 분야의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핵무기를 만들고 싶다고 원자력공학과에 왔지만 정작 입학 후에는 반핵에 더 가까워졌고,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게 된 건 아이러니다. 그러다 보니 신문기자와 같은 진로를 생각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5월 초, 나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중앙일보 보급소가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하루에 200 부 정도를 배달하는 것이었다. 새벽 3시 반까지 보급소로 가서 4시~6시까지 배달했는데 내 배달 지역은 주로 상가,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저층 아파트였다.


그렇게 배달하고 한 달에 20 만원 정도를 받았었나? 아무튼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용돈은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중앙일보는 원래 석간신문이었는데 내가 신문배달을 시작할 때쯤부터 조간신문이 되었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조판에 '2 탑 3 섹션'을 내세우는 무지막지한 두께의 신문이었다. 주말판은 거진 잡지 한 권 분량의 두께라 말이 200 부지, 다른 신문 두 배 이상 배달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신문 배달이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신문을 한 부씩 갖고 가서 봤었는데, '조중동'이라고 묶여서 욕을 먹는 중앙일보여도 당시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래서 신문기자를 한다면 중앙일보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신문배달을 한 이유 중 한 가지는, 내가 만약 신문기자가 된다면 그 기사를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지 그 반응이 궁금했던 점도 있었다. 그리고 신문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다 경험해보고 싶었다. 물론 공대신문사에서도 기사 작성부터 조판, 편집, 배포까지 전 과정에 다 참여했지만 메이저 일간지는 또 다른 차원이니까.


그러나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학교에 가면 너무 피곤했고, 특히 전날 술이라도 마신 날엔 무슨 정신으로 배달을 했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빼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 신문 배달은 석 달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애초에 길게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여름 방학이 되자 다른 일정이 많아졌고, 또 신문배달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왔는지... 배달하는 동안 거의 1/4 이상은 비가 많이 왔던 것 같다.


특히 다른 신문사와의 경쟁 때문에 내 자전거 타이어에 펑크를 내거나 혹은 신문을 훔쳐가거나 혹은 내가 배달한 신문을 빼서 버리고 자기 신문사의 신문을 밀어 넣는 것들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급소에서는 내게도 그러라고 시켰고, 급기야 나중에는 수금까지도 하라고 했다. 그러한 일들을 겪으면서까지 신문배달을 할 수는 없기에 그만두겠다고 했다.


비록 석 달 밖에 배달을 못하긴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신문기자로서의 꿈을 키우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나는 민중민주(PD) 계열 성향으로서 노동운동과 철거민 투쟁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전철연의 집회에 종종 참석했었다. 이는 아무래도 1학년 때 학교 주변 재개발구역의 강제철거문제 등을 겪으면서 그 부조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들과 같이 투쟁하고 싶었다.


Screenshot 2024-04-08 at 18.35.42.JPG 사진출처: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14567


또한 그러한 이슈가 아니더라도 여러 집회에 참석했다. 그중에는 민족해방(NL) 계열에서 주최한 집회들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1995년에도 나는 최루탄에 울고 전경들에게 쫓겨 다니는 일을 여러 번 겪게 되었다. 때론 집회 참석이 아니라 신문기자로서 취재 차 가기도 했었는데 어느덧 나는 그들 무리에 합류되어 있기도 했었다. 사실 집회가 격해지면 진압이 시작되고, 참가자와 관찰자의 구분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러면서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미래의 신문기자, 그리고 거리의 투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 최면에 걸린 것이다. 그리하여 내 생활은 그러한 것을 구심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그러한 나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내게 너무 의존적이었다. 그때쯤 나도 무선호출기(일명 '삐삐')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자친구는 수시로 전화해 달라는 숫자암호를 남기거나 혹은 신문사방으로 전화를 하거나 우리 학교로 불쑥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나 동아리 사람들도 그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반면 나는 그러한 여자친구가 점점 더 부담스러워졌다. 그리하여 5월인가 6월인가 (이건 당시의 일기장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지만)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여자친구는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그날 밤, PC통신상 문학동호회 게시판에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자살을 암시한 글이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여자친구의 오빠였는데 내 여자친구가 자해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와서 조치를 취해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그렇게 자해를 한 것일까. 그리하여 다음날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더 이어갔다. 하지만 관계가 정상적이기는 어려웠다. 아니, 솔직히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자살 소동 이후 몇 달 뒤에 완전히 헤어질 때까지, 여자친구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어쩌면 약간의 흔적이 일기장에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1995년 7월 중순, 나는 공대신문사의 제3대 편집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3기들도 수습에서 정식 기자로 임명되었고, 총회 후 뒤풀이를 하게 되었다. 뒤풀이 때는 정식기자 신고식도 했었는데, 분위기는 1 년 전과 비슷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전통을 만들고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고 군사문화를 비난했으면서도 당시에도 학생들은 그렇게 술판을 벌였고, 과음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결국 뒤풀이 자리에서 후배 한 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고, 급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서 처치를 했다. 그 후배는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척분 집에 기거하던 중이었는데 그 친척분께서 연락을 받고 급히 오셨다. 우리는 그분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고식은 그 뒤로 없어진 것 같은데 내가 군대 간 이후라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일은 없었어야 했다.


7월 말, 나는 동기들과 후배들을 데리고 내 시골집으로 갔다. 거기에서 '하계 신문사학교'를 연 것인데 일주일 동안 거기 머물면서 기사 작성 교육도 하고, 집 앞 바닷가에서 해수욕도 하면서 보냈다. 그때는 차를 렌트하지 않고 시외버스와 대중교통을 갈아타면서 갔었기에 짐도 많아서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잊을 만큼 재밌었다. 내 조부모님께서도 동아리사람들에게 정말 잘 대해주셨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해주셔서 감사했다. (음주는 절대 금지였다) 그 이후로도 내 동기들과 후배들은 그때 얘기를 종종 했다.


8월 말에는 신문사 동기들과 함께 강릉, 정동진 여행을 떠났다. 정동진에서는 민박집에 머물었는데 해수욕 피크 시즌을 막 지난 터라 정동진은 너무나 한산했고, 관광객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었다.


1995년 초, 드라마 <모래시계>가 인기를 끌면서 정동진이 일반인들에게도 조금 알려졌지만, 1995년 중반에도 그곳은 강릉 사람들이나 찾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고, 기차도 거의 서지 않던 곳이었다.


Screenshot 2024-04-08 at 20.40.55.JPG 드라마 <모래시계>에 등장한 정동진역


나도 문학동호회 선배의 추천으로 가게 된 곳이었는데 그때 가보길 정말 잘한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그때의 풍경도, 정취도 느낄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때의 사진들을 보며 추억에 젖곤 한다.




2학년 여름방학 동안 나는 사회봉사 과목을 신청했는데 이번에는 좀 더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소년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자아이들을 수감하는 소년원이 안양(관악산 기슭)에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정심여자중고등학교라 불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과학과목을 가르쳤다. 그곳의 아이들에게 과학이 제일 인기 없는 과목이었는데 내가 그 과목을 가르치게 된 건 그 일을 신청한 학생 중 공대생이면서도 가장 어렸기에 다들 꺼리는 과목을 맡게 된 것이다. 역시나 과학 과목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내가 가르치는데 소질이 없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기도 했었고)


한 시간은 교실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고, 한 시간은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한 아이에게 개인지도를 했다. 정문에서, 건물입구에서 신분 확인을 받고 또 교도관과 함께 복도의 철창문 몇 개를 지나 교실로 들어가는 과정은 낯설었고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Screenshot 2024-04-09 at 09.07.00.JPG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jungdo-law/221393682789. 당시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소년원 자체도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수업 이외에도 더 특별한 경험도 했다. 아이들의 재판기록을 열람하게 해 줘서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한 기록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았다)을 볼 수 있었고, 아이들과 상담처럼 이야기도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죄를 짓고 수감된 아이들이지만, 비록 내 수업에는 그다지 의욕을 보이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그 자체로는 순수해 보였다. 다만 나는 아이들을 끝까지 인간적으로 대하진 못했다. 두 달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어떠한 감정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두 달간의 경험은 참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 주었다. 아이들은 좀 산만하긴 했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런 생활과 외부에서 자신들을 보는 시각에 익숙해져 나 같은 외부인들에게는 적당히 포장된 모습만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본 그 아이들은 밖의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수업이 끝나던 날, 아이들의 요청으로 나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고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아이들도 답가 (공일오비의 <이젠 안녕>)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내게 손수 쓴 편지들과 거북알 접은 것을 전해주었다. 마음이 뭉클했다. 그 편지들은 지금도 갖고 있는데 30 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신문사 편집장으로 선출된 이후 나는 다른 학교의 공대신문사와 연합체를 구상했고, 실제로 서울대, 연세대 공대신문사 및 기타 과학기술운동(과기운) 모임의 대표들과 여러 번 만났다. 이들 공대신문사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창간되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그들과 세미나를 하기도 했고, 모꼬지를 가서 밤샘 토론을 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전국대학과학기술단체모임(전과모)의 실체였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우리 학교 공대신문사 편집장 자격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고, 개인적인 참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공식적으로 그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그들의 성향은 유사했다. 대체로 PD 계열이었고, '과학기술운동'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서울대 공대신문사는 좀 더 좌파적 특성을 보였다. 아무래도 서울대 공대신문사는 고학번들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러다 보니 그 모임에서는 서울대 측에서 좀 더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1990년대 과학기술운동의 메카는 아무래도 서울대와 카이스트였다. 과학기술운동은 뭐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모순을 과학기술의 메커니즘으로 해결해 보자는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정보문제, 환경문제, 핵문제, 노동문제, 독점과 독재 등)의 해결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는 너무 단순한 설명이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랬다. 그러나 너무 자세히 들어가면 지루하고 어려워질 것이기에 대략 이 정도로만 얘기해 본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기회 될 때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당시 나는 서울대 공대신문사 및 과기운 모임에 있던 사람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들이 있는 서울대 공대신문사에 종종 찾아갔었고, 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그러나 그들과 같이 세미나를 하고 공부를 할수록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계급은 과연 완전히 없어질 수 있는가? 모두가 행복한 사회는 가능한가? 그러한 것이 당시 나의 고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부터는 아니지만, 나는 점차 사회민주주의를 꿈꾸게 되었다.


서울대 쪽과의 개별적인 모임 및 다른 학교 단체들과의 모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기억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1995년 2학기까지는 지속했던 것 같다.




그러한 대내외적인 활동과는 별개로 나는 우리 학교 내에서도 여러 단체의 연합을 도모했다. 사회대, 법대, 의대 등 각 단과대학신문사 관계자들을 만나 단과대학신문사연합 또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싶었지만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특히나 우리 학교는 공대가 가장 인원이 많고 규모가 크다 보니 공대신문사는 독자적으로 운영이 가능했지만 다른 단과대신문사는 학생회 또는 단과대 자체에서 만드는 것이라 독립적인 활동이 어려웠다. 결국 그러한 시도는 어렵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따름이다.


또한 교내에 있는 PD계열 학생운동단체들과도 교류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전국학생연대(전학련) 소속과 다른 하나 등 크게 두 개의 PD계열 단체가 있었는데 (사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본다) 우리 학교가 전통적으로 워낙 NL계열이 강세였기 때문에 PD계열은 존재 자체가 미미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도 점차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단체가 서로 연합을 했던가, 아니면 둘 중에 더 큰 조직이 주도했던가, 아무튼 PD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했고, 1995년 하반기의 총학생회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그리고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PD계열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나에게도 총학생회에 들어와 함께 활동하자는 제의를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미 나와 그들의 생각의 차이는 분명했고 지향점이 달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신뢰하기 어려웠다.


사실 학생운동은 계파 간에도 대립을 하지만 계파 내에서도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이념과 노선에 대한 갈등이 많았는데 그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책상에 앉아 말로만 논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도 그랬고 그들도 모두 몽상가들이었다. 그래봐야 2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였고.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만 치부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들 모두는 진지했고, 목표가 있었다.




나의 성향이 분명해짐에 따라 신문의 논조와 지향점에 대해서도 이전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편집장 겸 여전히 학술부장으로서 기사를 작성했는데 대부분 과기운과 노동문제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학계의 문제와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했다.


또한 나 자신만 그러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동기들과 후배들 역시 그러한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 했다. 그것이 공대신문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들을 비롯해서 동기, 후배들의 반발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각차만 확인하게 되었고, 결국 나는 나대로 그러한 방향으로 가면서 다른 사람들은 각기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기사를 작성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갈등이 있지는 않았다. 생각의 차이는 있긴 했어도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적어도 편집장으로서의 책임은 다 하려고 했으니까.


문제는 그해 2학기에 잡지를 만들면서 발생했다. 이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 신문사는 한 학기에 신문 네 번, 잡지 한 번을 간행하였는데 2학기 종강을 앞두고 거진 두 달 정도는 잡지 발행에 집중했다. 전체적으로 기획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기사를 작성했는데, 거기에다가 나는 욕심을 더 부려서 우리가 전체 편집까지 다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편집은 내 매킨토시를 이용해서 하고,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에 맡겨서 인쇄만 하는 것으로. 어설픈 솜씨로 편집을 했지만 결과물은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모두 외주로 맡기는 것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왔겠지만 모든 과정을 직접 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나 혼자만 고군분투하는 듯했고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싶어 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문사 동기, 후배들과의 갈등이 더 커져갔고, 동기 두 명은 군대에 가게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나에 대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목표지향적이었고, 그것을 향해 사람들을 끌고 갈 따름이었다.




1995년 2학기는 그렇게 신문사 편집장 일과 대외적 활동, 그리고 잦은 집회 참석 등으로 인해 수업도 자주 빼먹게 되었고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잡지 편집 막판에는 수업에 거의 안 들어갔고 겨우 기말고사 시험만 봤다.


또한 전공과목 이외에 교양과목들도 들었는데 특히 신문방송학과 과목 중에 '설득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목을 일반교양선택으로 듣기도 했다. 그것 역시 신문기자가 되려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수강한 것이었는데 기대에는 많이 못 미쳤다.


결국 2학년 2학기의 학점은 3점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렇게 나는 학생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러한 나를 부모님께서도 상당히 우려하셨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내가 그렇게 운동권에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실 것이고 설사 아셨다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골수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나는 그저 운동권의 변방을 맴돌다가 제풀에 지친 격밖에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목표가 있었고 의욕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나를 급격하게 소모하게 됐고 그러한 것들에 모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계속 위태로웠다. 여자친구가 또 자해를 할까 봐 불안해서 관계를 지속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 나는 나 자신과 내가 해야 할 일들에만 집중하느라 여자친구에게는 신경 쓸 겨를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자친구가 하는 말들에 대한 의심도 점차 더 커져갔다. 예전엔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현실성이 없어 보였고, 마치 공상 속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허언증, 또는 리플리 증후군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했다.


1995년 12월 초, 나는 그녀가 다닌다는 학교, 학과의 사무실에 찾아가서 그러한 학생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런 학생은 없다고 했다. 그녀에 대한 의심이 확증으로 바뀌었다. 결국 1996년 1월, 나는 그녀에게 두 번째 이별을 얘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돼도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 3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해군에 입대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는 모든 열정을 다 소모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 상태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해 11월에 아무도 모르게 해병대에 지원했다. 꼭 해병대에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군입대 방법 중에 그게 가장 빨랐다. 합격하게 되면 3월 초에 병 777기로 입대하게 될 것이었다. 777이라는 숫자는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숫자가 맘에 들었다.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고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도 복사하고 (지원 서류 중에 있음), 병무청에 지원서류를 제출할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보이스카웃 때 야영하러 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해병대에 지원한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전에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지원서를 내고 며칠이 지나서야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의 기가 차셨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이후로 나는 마음을 비워갔고,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나의 그러한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이별을 통고했던 여자친구를 제외하고는.




1995년에는 문민정부가 과거를 청산하려는 정책이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광복절에 예전의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해체한 것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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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도 저 기념식장에 갔었다. 비록 멀리 뒤에서 보기만 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저 건물이 일제의 잔재이고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될 때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곳이기도 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가본 적이 있긴 했지만,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도 종종 찾던 곳이었다. 그곳에 가서 유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는데.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흔적만 독립기념관에 일부 남아 있지만 그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저 행사가 있었던 날, 나는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바로 보라매공원으로 이동해서 노동자대회에도 참석했었다. 노동자대회도 이미 거의 끝나서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해 말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5공 핵심인사들을 반란수괴혐의 및 비자금 등의 혐의로 구속하여 재판을 진행하였다. 1심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으나 2심에서는 각각 무기징역과 1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상고심에서는 2심의 형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는 별개로 1995년 역시 사건, 사고의 해로 기억된다.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형 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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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이 사고로 500여 명이 사망하였고, 10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역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미래를 보여주는 참담한 사건으로서 국가의 몰락을 암시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김영삼 정권을 떠올리면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이 먼저 생각날 것이다.




1995년, 나는 그렇게 의욕만 앞섰다가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치기에 그렇게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나는 순수했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믿으려 했고 함께 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상처받고 좌절을 겪게 됐다. 나 혼자서는 극복하기 힘든 과정이었다. 나는 혁명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그냥 멘털이 약한 쁘띠 부르주아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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