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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pr 16. 2024

1996년 - 군대로 도망치다

도망쳐 간 곳에 낙원은 없다

1995년 11월, 병무청에 해병대 지원서류를 제출한 후 부모님께 해병대에 지원했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는 펄쩍 뛰셨고, 아버지께서는 내게 미친놈이라고 하셨다. 이전에 부모님께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해군에 입대할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은 있었지만, 해군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던 터에 상의도 없이 갑자기 해병대에 갈 것이라고 하니 그러한 반응도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입영 절차는 진행되고 있었고 나의 의지도 확고했다.


왜 해병대였을까. 앞서 얘기했던 대로 당시 군입대 방법 중에서는 가장 빨랐다. 11월 말에 지원서류를 내면 3월 초에 입대할 수 있었다. 당시 해병대는 한 달에 두 기수씩 입대했는데 내 생년월일이 평균보다 빨랐던 터라 3월 6일로 입대 예정일이 정해졌고, 777기가 된 것이다. (이건 지원할 때 정해졌다)


또 다른 이유는 해군과 유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해군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바다와 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 시골이 바닷가이며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바다는 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해군이 되고 싶었고 해군사관학교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해병대는 해군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해군소속이고 바다 근처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참고로 해군병은 해상병(배를 타는), 육상병=보병=상륙병(주로 해병대를 의미하지만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으로 나뉜다. 


그리고 복무기간이 짧았다. 당시 육군이 26개월, 해군이 28개월, 공군이 30개월 근무였는데 해병대도 26개월이었다. 해군보다 2개월이 짧으니 그 점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96년 1월 어느 날, 대방동 해군회관에서 신체검사 및 면접을 봤다. 신체검사나 면접은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시력이 좀 염려되었다. 당시 해병대 신체검사 기준은 나안시력 0.3 이상이었는데 나는 0.1~0.2 정도여서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래서 시력 때문에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안과 및 안경점에 가서 시력검사판을 외웠다.


예전에 박카스 광고 중에 군대 가려고 시력검사판을 암기하는 병역신체검사 수검인의 사례가 있었는데 내가 꼭 그런 셈이었다. (이 광고가 내 군입대보다는 늦게 나왔으니 내가 원조다)


예전 박카스 광고 중에서. "꼭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시력검사판을 외워간 보람도 없이, 신체검사에 사용된 시력검사판은 미군용이었다. 숫자와 알파벳으로 되어 있던... 다행히도 0.3~0.4 정도가 나왔던 것 같다. 


면접은 해병대에 근무하는 부사관(당시에는 하사관이라 불렀다)이 진행했는데 내게 한 질문은 "왜 해병대에 지원했는가?""해병대 훈련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였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미리 생각한 대로 대답했다. 뻔한 질문 뻔한 대답.


더 강해지고 싶다는, 나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도피였다. 1995년의 이야기에서도 적었지만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싶었다.


별다른 문제없이 신체검사와 면접을 마치고 합격을 기다렸다. 합격통보는 1월 말인가 2월 초에 나왔던 것 같은데 집에 우편으로 왔던가 아니면 병무청에 받으러 갔던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달랑 종이 한 장에 적혀 있던 내용도 '합격증'이나 '입영통지서'와 같은 명칭이 아니라 뭔가 좀 이상했던 기억이 나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아마도 '(입대) 여행안내장'이나 그런 비슷한 명칭이었던 것 같다.




2월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겐 입대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합격자 발표가 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한 것도 있고, 갑자기 군대에 간다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자친구와는 이미 12월 말에 헤어졌으니 따로 얘기할 필요는 없었고.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2월 중순에 나는 신문사 동기, 후배들과 함께 을왕리로 모꼬지를 갔다. 그리고 밤에 술자리에서 군대에 간다는 사실을 밝혔다. 입대를 불과 보름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다들 놀란 반응이었다. 그리고 차기 편집장을 선출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편집장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가는 것도 미안했다.


나는 3월에 나올 신문까지만 책임지기로 했고, 동기 중에 한 명이 차기 편집장이 되었다. 나까지 군대에 가면 남은 동기는 세 명뿐이라 아마 마지못해 편집장이 되었을 것 같다.


마지막 신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혹은 보고 싶었던 뮤지컬들을 봤다. 당시에는 국내에 아직 뮤지컬 붐이 그렇게 일지는 않았었고 외국팀이 내한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봤던 뮤지컬 중에 <오페라의 유령>이 있었는데 나는 이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그 유명한 뮤지컬인 줄 알고 가서 봤었다. 하지만 이는 동명의 다른 뮤지컬이었고, 모차르트의 곡들을 기반으로 한 상당히 클래시컬한 뮤지컬이었다. 그리고 내용도 원작에 좀 더 가까웠지만 각색된 부분도 있다. 속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나름 희소한 작품을 봤다는 걸로 위안을 삼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였다. 당분간 사회와 떨어지게 된 심경과, 다른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그러한 마음 때문에 더 감정 이입이 되었고, 영화의 여운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이 나서 그랬을런지도 모른다.





군입대 전 겨울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국수자원공사의 홍보책자를 공공기관 및 은행, 병원, 지하철 등에 배포하는 일이었다. 두 달 정도 했었나? 2월 말까지 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사람들의 구역을 나누어 해당 구역 내의 기관에 되도록 빠짐없이 배포해야 했고, 배포한 곳의 목록을 매일 제출했다. 매일 아침 수자원공사 본사에 가서 배포할 책들을 받고 지도에 표시를 해가며 매일 열심히 돌아다녔다.


내가 맡은 구역은 영등포구였던가? 내가 살던 곳 근처로 배정받아서 여러 기관을 방문했는데 그런 일은 처음이라 상당히 멋쩍었다. 물건을 판매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반 홍보전단지도 아니고 정부와 공공기관의 캠페인 내용이 담긴 내용이었음에도 잡상인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론 팔당댐에 있는 수자원공사 창고에 가서 홍보 책자를 더 가져오기도 했다. 팔담댐 안에는 처음 들어가 봤는데 단순히 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당연한 얘기인데도.


한두 번은 길거리에서 캠페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지하철에서도 캠페인 활동을 했던 것 같다. 배포하러 다니는 것보다 그런 일이 더 부끄럽게 여겨졌지만 비단 돈을 받고 하는 일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떳떳하게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던 날, 홍보 담당자분께서는 3월 22일이 물의 날이라며 그때 행사 때 아르바이트 했던 사람들을 초청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군대에 있을 거라고 했다. 그분은 아쉬워하셨지만,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수자원공사에 지원해 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3월 4일, 동네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일명 스포츠머리.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노래 가사처럼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방청소를 시작했는데 책상 서랍 정리 도중 나온 물건들과 앨범들을 보다가 시간이 지나가버렸고, 결국 그다음 날까지도 청소를 마치지 못한 채 대충 마무리해 버렸다.


친한 친구가 포항까지 함께 동행해 주기로 했다. 입대 전날에 출발해 대구에 계신 작은아버지 댁에 들렀다가 하루를 자고 다음날 버스로 포항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5일 아침, 출근하시는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고, 출발 전에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담담하게, 그냥 잘 다녀오라고만 하셨다.


오후에 친구와 함께 새마을호 기차로 대구에 갔고, 저녁에 작은아버지 및 사촌동생들과 가볍게 술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 목욕탕에 들러서 다 같이 목욕도 했다. 사회에서의 마지막 목욕이었다.


대구에서 시외버스로 포항터미널에 도착했고, 죽도시장에서 친구와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그리고 택시로 해군제2해병훈련단(줄여서 2훈단 또는 훈단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이름은 해병대교육훈련단으로 바뀌었다)으로 갔다.


현재의 해병대교육훈련단 정문 모습


해병대 신병교육은 모두 포항의 2훈단에서 시행한다. 시간에 맞춰 입소하는 동기들과 가족, 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회와 군대를 구분하는 정문을 통과할 때 비로소 군대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병대 미래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표어는 아마 내가 입대할 때도 그대로였을 것 같다.


훈단 측에서 가족들에게 해병대와 신병교육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친 후 배웅하러 온 사람들은 다시 돌아가게 됐다. 나도 친구에게 내 가방과 지갑, 소지품들을 들려서 보냈다.


사람들이 가자마자 '하이바'를 눈아래까지 눌러쓴 DI (Drill Instructor라고 하는데 신병 및 부사관, 장교의 기초군사훈련을 담당하는 부사관들. 앞으로는 계속 DI라고 하겠다)가 어수선한 신병들을 향해 "이 개새끼들아, 당장 오와 열 맞추고 쪼그려 앉아!"라고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오리걸음으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이동했다.




해병대가 한 달에 두 기수씩 입소할 때는 매달 첫째, 셋째 수요일에 입소했다. 그렇게 6주간 훈련을 받게 되는데 입소 후 그 주 주말까지는 가입소기간으로 또다시 정밀신체검사 및 체력검사, 인적정보 확인, 귀가의사 확인 등을 하게 된다. 


약 3일간 이어진 가입소 과정에서 우리는 사복을 입은 채로 계속 구르기도 했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가희망자까지 확인하면 비로소 입소를 하게 된다. 몇 명은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보급품을 받고 소속이 정해진 다음에는 사복을 소포로 집에 보냈다. 거기에 짤막한 편지 한 통씩을 덧붙였다. 나는 뭐라고 썼던가, 아마 훈련 잘 받고 무사히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랬겠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어머니께선 그 소포를 받고 많이 우셨다고 한다. 옷이 온통 흙과 진흙 투성이라 더 그랬을지도. 


그리고 입소식 전에 머리를 삭발한다. 굳이 스포츠머리를 하고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5주 차엔가 천자봉에 다녀온 후 빨간 명찰을 받으면서 비로소 상륙돌격형 머리로 깎게 된다. 그전에는 노란 비닐장판에 새겨진 명찰을 달았다.


병 777기는 신병 2대대에 배속되었고, 나는 그중에 5중대 5소대 39번이 되었다. 이건 키 순이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동기는 대략 480여 명 정도. 편제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소대는 약 60 명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DI들이나 관계자들은 777기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7이 세 개나 들어가는 기수라서 뭔가 특별하게 느껴졌을까?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고...




포항의 3월 초는 무척 추웠다. 산과 바다가 가까워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게다가 훈단 시설은 열악했다. 한 소대가 한 내무반을 사용했고, 나무로 된 2층 침대가 있었다. 나는 2층을 사용했는데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위태로웠다. 급할 때는 2층에서 바로 1층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현재의 해병대교육훈련단의 모습. 내가 훈련받던 당시와는 많이 달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6주간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매일매일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중요한 일정들은 미리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일정을 미리 알려줬더라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혹은 좀 더 계획적인 생활을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밤마다 내일은 뭘 할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전투복 하나만 입고 훈련을 받았지만, 가끔은 훈련복(CS복이라고 불렀다)을 입기도 했다. 주로 구르거나 기어 다니는 경우였다. 


훈련은 그나마 받을만했지만 통제가 극단적으로 심했다. 특히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통제가 너무 엄격했던 탓에 그것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특히 매일 밤 순검시간에는 DI가 검사를 마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서 눈도 깜빡일 수 없었고, 부릅뜬 눈으로 눈물을 흘려야만 OK였다. 작은 것 하나라도 지적을 받으면 단체로 얼차려를 받았다. 매일 공포의 시간이었다.


또한 화장실은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훈련 도중에는 물론이고, 내무반에 있는 동안에도 화장실은 정해진 시간에만 갈 수 있었다. 특히 밤에는 이동이 금지되어 있어서 수통에 소변을 보고는 초소 경계근무 나가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또 훈련 때 쓰고...)


식사 시간도 힘들었다. 나는 식사를 많이 하지도 않고 천천히 하는 편이라 좀 오래 걸리는데 거기선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단체로 식당으로 이동한 후 소대별로 들어가 식사를 했는데 식사 전에 DI가 "식사 시~작!"이라고 외치면 훈병들은 "나는 가장 강하고 멋있고 질긴 해병이 된다. 악! 감사히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식사를 했다. 식사 시간은 5~10분. 주는 대로 배식된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먹고 (잔반을 남기면 안 되었다) 밖에서 식판을 깨끗이 닦은 후 다시 집합할 때까지도 5~10 분 정도. 선착순이라 늘 치열했다.


현재의 해병대교육훈련단의 식당과 식사 모습.


그러니 내가 힘든 것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모든 행위는 DI의 "각 소대 들어~"로 시작하고(아직까지도 이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15분 전, 5분 전, 실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 6시에 기상할 때 5시 45분에 "총 기상 15분 전", 5시 55분에 "총 기상 5분 전"을 외치고 이 때는 이미 일어나서 침구 정리와 전투복으로 환복까지 마친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육군처럼 기상나팔이나 그런 것도 없다. 즉, 모든 행위는 15분 전에 시작되어 5분 전에 준비된다. 이는 해군과 해병대만의 독특한 방식인데 익숙해지면 나름 장점도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선착순이면서도 단체행동이었다. 훈련받을 때도 실수하면 단체로 얼차려를 받았고, 혹은 최후의 1인까지 연병장을 도는 뺑뺑이를 시켰다. 그러나 선착순과 단합은 모순이 아닌가? 남보다 빨라야 하고 경쟁상대로 여기게 하면서도 또 같이 책임을 연대하라니. 아무튼 그러한 것에 의문을 가질 여력도 없었다.


훈련은 계속 이어졌는데 3주 차에 내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졌다. 고열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훈단 내 의무반으로 이송되었다. 그렇게 의무반에서 이틀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만 있었다. 나중에 들은 병명으로는 풍진이라고 했다. 


풍진은 제2군 법정전염병이기도 했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의무반에 5일간 있었다. 그 이상 훈련을 빠지게 되면 다음 기수로 유급이 된다고 해서 5일째 되던 날 다시 복귀했다.




1996년 4월 11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내 생애 첫 투표였지만 부재자투표로 하게 됐다. 당시에는 부재자투표를 하려면 미리 신청을 하고, 지정된 장소에 가서 투표를 해야 했다. 마침 4월 5일이 식목일이라 공휴일이었는데 투표권이 있는 훈병들은 단체로 읍사무소로 가서 부재자 투표를 했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우리 동네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3월 말부터 나한테 선거홍보물들을 보내왔다. 내가 군대에서 가장 먼저 받은 편지는 선거운동원이 자필로 써서 보낸 것이었다. 그 편지들 역시 지금도 갖고 있는데 별로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 또한 예전 기록의 일부분이다.


물론 가족들의 편지도 있었다. 나도 몇 번 편지를 보냈었고, 답장도 받았던 것 같다. 특히 4월 19일의 수료식을 앞두고 가족들이 참석 가능한지 물어봤는데 가족들 모두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수료식날, 가족들은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로 서울에서 포항까지 내려왔다. 수료식 후 면회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한 달 반 만에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지라 너무 반가웠다. 게다가 음식도 같이 싸 오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먹기도 어려웠다. 물론 그러한 음식이나 간식거리를 내무반으로 반입하는 것도 안 된다. 


훈단 내에서는 보급품으로 나오는 것 이외의 음식물은 절대 반입 금지이며 걸리면 처벌이 엄했다. 당연히 PX도 없었고, 먹는 것도 정해진 시간에만 먹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어느 교회에서 나와서 훈병들에게 집단으로 세례를 해주는 세례식이 있었는데 세례식이 끝나고 일인당 초코파이를 한 박스씩 나눠줬다. DI들은 우리더러 앉은자리에서 한 박스를 모두 먹으라고 했고, 다들 입에 초코파이를 욱여넣기 바빴다. 오랜만에 먹는 초코파이지만 몇 개 밖에 먹을 수 없었는데, DI들이 "짱박다 걸리면 다 죽을 알아!"라고 협박했기에 남은 걸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한 박스를 다 먹고 다른 훈병들 것까지 먹는 동기들도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DI가 "동작 그만! 식사 15분 전!"을 외친 것이다. 이미 초코파이를 먹고 배가 부른 상태에서 억지로 저녁을 또 먹느라 상당히 고생을 했다. 그래서 초코파이는 좋은 추억보다는 이 기억이 더 많이 난다.




수료식 다음날인 토요일에는 각기 정해진 병과에 따라 후반기교육을 받을 곳으로 이동하게 됐다. 나는 화학병과여서 전남 장성에 있는 상무대 육군화학학교로 위탁 교육을 가게 됐다. 해군과 해병대에는 화학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없어서 육군에 위탁교육을 맡기고 있다.


참고로 해병대의 병과 지정 및 부대 배속 절차는 독특하다. 2주 차인가에 병과 지정을 위해 적성검사(일종의 시험이다)를 보고, 그 성적과 고등학교 성적, 그리고 대학생일 경우에는 전공도 고려하여 병과를 정한다. 


병과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3 지망까지 지원할 수 있다. 나는 병기병과를 하고 싶었지만 내 기수에서는 병기병과는 광학기기수리와 탄약병 밖에 없었다. 그래서 1 지망으로 화학병, 2 지망으로 광학기기수리, 3 지망으로 탄약병을 신청했다. 그 결과 1 지망인 화학병이 된 것이다. 


이후에 배속될 부대는 각 병과별로 대표자 1인(생년월일이 가장 빠른 사람)이 나와 병과별로 배속될 순서를 기록한 추첨공을 꺼내 발표한다. 예를 들어 내 경우에는 화학병이 다섯 명이었고, 그 순서는 김포-김포-김포-김포-백령이었다. 그리하여 그 병과별 생일 날짜 순으로 가게 될 곳이 정해진다. 나는 네 번째 순서여서 김포의 해병대 2사단으로 배정되었다. 아마도 사단 화학지원대에 가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다섯 번째 훈병과는 생일이 이틀 차이라 하마터면 내가 백령도에 가게 될 수도 있었다.


상무대에 도착하여 그곳의 해병대 출장소에 있는 담당자에게 훈병들이 인계되었다. 상무대에는 육군화학학교 이외에도 여러 교육기관이 있는데 모두 그곳에 있는 출장소에서 훈병들(병뿐만 아니라 위탁교육을 받는 부사관, 장교 모두)을 관리했다. (훈단을 나왔으니 더 이상은 훈병이 아니지만 훈병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서 그냥 훈병이라고 하겠다)


상무대 육군화학학교에서 같이 위탁교육을 받은 동기들, 앞줄은 화학병과, 뒷줄은 제독병과.


7주간 육군들 사이에서 화생방 방호교육을 받으며 같이 지냈다. 우리나라는 화생방 무기를 쓸 수 없기에 대체로는 그로부터 방호(보호)하는 것만 배웠다. 화학전 3주, 생물학전 2주, 핵전쟁 2주였나.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화생방전이 발생하면 생존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특히 핵전쟁은 그 가운데서도 살아남아야 했고, 살아남아서 해야 할 임무가 많았다. 그래서 육군화학학교의 표어는 "알아야 산다"였다. 교가도 아직도 부를 수 있다. 


각 내무반에서는 15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육군 12명, 해군 2명, 그리고 해병대는 나 혼자였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내가 내가 있던 내무반의 내무반장(정확한 명칭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이 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훈단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일단은 통제가 적었으며 밥도 맛있었다. 먹는 양이나 속도도 통제하지 않았다. PX 이용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무엇보다 DI가 아닌 일반병인 조교가 관리를 했고, 점호 분위기도 험악하지 않았다. 


내가 내무반에 처음 도착했던 날 우리 내무반 담당 조교에게 "화장실에 다녀와도 좋습니까?"라고 물어봤다가 그 조교가 "그걸 왜 물어봐? 그냥 다녀오면 되지."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 육군은 화장실에 마음대로 가도 되나 보다' 싶어서.


그런 일화는 점호 때도 있었는데, 점호 때 나는 순검 때 하던 대로 부동자세로 전혀 움직이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계속 눈을 뜨고 있어 보면 안다) 그러자 조교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훈단에서는 순검 때 이렇게 했다고 하니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훈단에서 3 kg이 빠졌던 나는 상무대에서는 무려 10 kg이나 체중이 늘게 되었다. 아무래도 상무대에서는 학교처럼 계속 수업받고 시험 보는 식이라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몸으로 하는 훈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2훈단에 비해서 적었던 것이지. 


화학학교니까 아무래도 좀 더 체계적인 화생방 방호교육을 받게 되는데, 2훈단에 있을 때도 각개전투 때 가스실에 들어가는 체험이 있었다. 이때는 방독면을 쓰고 들어갔다가 방독면을 벗고 CS(최루가스)의 그 매운맛에 눈물, 콧물 다 흘리게 되는데 화학학교에서는 반대로 그대로 들어갔다가 '가스' 구령이 떨어지면 방독면을 썼다. 사실 이게 맞는데 훈련소들에서는 대체로 1회성 체험이기 때문에 방독면을 벗기는 것이다. 


가스체험을 하던 날, 나는 오전시간 동안에만 거진 열 번 가까이 들어갔던 것 같다. 덕분에 방독면을 정말 빨리, 정확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참고로 교범상 방독면 착용시간은 9초 이내이며, 보호두건까지 쓸 때는 15초 이내다.


이외에도 최루탄 발사기(E8) 체험도 했었는데 동시에 16 개의 최루탄을 발사하는 것이어서 마치 집회 때 전경의 페퍼포그와 지랄탄을 연상케 했다. 실제로 페퍼포그에 장착된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화재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교육생들은 최루탄이 발사되자마자 흩어져서 그 최루탄을 발로 밟아 불을 끄거나 멈추게 하고 수거해오게 했었다.




반면 상무대에서도 안 좋았던 기억들이 있는데 대체로는 육군과의 차별에 대한 것, 그리고 육군식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육군교육기관에 왔으니 그래야 하지만 자존심에 그러기는 싫었다. 게다가 해병대 위탁교육생들은 사고를 칠 우려가 있어서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같은 교육 기수 이외의 타 해병대교육생과 접촉은 금지되어 있으며, 3인 이상 모여서도 안 되었다. 경례구호도 '필승'은 금지되었고 '단결'이었나, 그것만 허용되었다. 


또한 아침마다 구보를 하고 연병장에서 육군복무신조를 외치고 육군 군가를 불렀는데 그때 나는 '해병의 긍지'를 외쳤고 육군군가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7주간 있으면서 육군복무신조와 육군 10대 군가는 자연스레 외워졌다. 사실 나는 2훈단에서 6주, 상무대에서 7주를 있었으니 육군에서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는데도 당연히 정체성은 확고했다.


위탁교육 5주 차에는 1박 2일로 외박이 있었다. 단 부모님께서 오시는 경우에만. 부모님께서는 (이번에는 여동생은 오지 않았다) 또다시 먼 길을 달려 장성까지 오셨다. 위수지역을 이탈할 할 수는 없었기에 전남에만 머물러야 했는데 내장산의 백양사에 가보고, 광주에도 가봤다. 전남 쪽은 거의 가본 적이 없어서인지 대체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상무대에서 외박 나갔을 때 방문했던 백양사




7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각기 배정된 부대로 1박 2일간 개별 이동을 했는데 잠깐이나마 집에 들를 수 있었다. 상무대에서 기차역까지는 버스로 단체로 이동했고, 기차역의 TMO에서 신고 후 기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서 하루 자고 난 후 버스를 타고 2사단 내 신병동화교육대로 갔다. 거기서 몇 가지 교육 후 다시 최종 배속되는 부대로 분산되는 방식이었다. 그곳이 마지막 천국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실무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전입된 신병들을 데리고 사단 내 몇 군데 장소를 방문했는데 그중 애기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애기봉은 그때 처음 가봤고, 그 뒤로도 가보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2사단 주둔지가 북한과 그렇게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적정을 보는 것은 신기했다. 하지만 그 신기함도 나중엔 익숙해졌다.


사단 화학지원대로 가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는 전방부대에 배속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내 원래 소속은 사단 화학지원대이긴 하지만 그곳의 T/O가 다 차는 바람에 전방부대로 전속시킨 것인데 강화도에 있는 연대로 보내졌다가 연대에서는 다시 대대로 내려보냈고, 중대, 소대로까지 내려가게 됐다. 


거기에서 나의 병과는 아무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사단 예하부대에 화학병이 배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각 부대에서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병기병의 임무를 맡을 때까지 나는 소대에서 다른 일반보병과 같이 생활했다.




실무에 와서야 비로소 해병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는 철저히 기수제라 해병대 기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소대에 내려간 첫날밤, 맞선임(바로 윗기수 선임)이 나를 불러내며 소위 '이빨교육'을 시켰다. 선임들의 기수와 이름, 그리고 인계사항 등이 적힌 종이를 주며 아침까지 다 외우라고 했다. 그리고 행동에서 주의할 점 등을 알려주었다. 이는 금기사항이었지만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이기도 했다.


특과병이 소대로 내려오는 일은 없었기에 (중대본부까지는 내려간다) 소대 내에는 나보다 아랫 기수도 있었는데 그들과의 관계도 애매해졌다. 그들은 훈단에서 바로 실무로 왔기 때문에 나보다 실무 경험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도움을 좀 받았다.


더군다나 내가 소대에 내려오자마자 우리 부대는 바로 일주일 간 유격훈련을 가게 됐다. 내가 배정받아 갔을 때는 다들 유격훈련 준비로 분주했다. 당연히 나도 유격훈련을 가게 됐다. 2사단 유격훈련장은 김포 문수산에 있었다.


상무대에서 체중이 급격히 불었고, 이론 교육 위주라 신체활동이 적어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고강도의 유격훈련을 받으니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병 나부랭이가 그러한 표시를 할 수 없었고, 어찌어찌 훈련을 마치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후 오른쪽 다리에 계속 통증이 느껴졌다. 마침 위로휴가 (해병대에서 신병이 실무 배치되면 3박 4일간 보내주는 휴가)를 가게 되어 병원에 가봤는데 우측 비골 골절진단을 받게 되었다. 병원에서 준 X선 촬영 필름을 가지고 복귀 후 소대장님께 그 사실을 알렸는데 이후 연대 의무실에 가서 다시 촬영해 본 결과 동일한 진단을 받았고, 다리에 반깁스를 한 후 돌아왔다. 생활에 불편이 있기 때문에 3주간 대대 의무반에 있기로 했다. 마침 우리 부대는 2주간 기습특공훈련을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습특공훈련, 일명 IBS 훈련은 해병대에서는 필수로 하는 훈련인데 아래와 같이 고무보트를 이용해서 상륙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dapapr/110116583813


이 훈련은 받고 싶었는데 다리 부상으로 부득이 불참하게 되어 아쉬웠다. 그리고 이후에 이 훈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의무반에서 부대로 복귀했을 때 나는 이미 선임들에게 제대로 찍혀 있었다. 그중 나를 특히 괴롭히던 선임들이 있었는데 내가 서울 출신이라서, 대학생이어서, 후반기교육을 받고 와서, 실무 오자마자 의무반에 있어서 등등 이유도 다양했다. 심지어 내가 안경을 쓰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입대 이후 나는 안경을 쓰지 않고 생활했는데 시력이 조금 더 좋아진 면도 있었지만 일단 안경을 쓰는 것에 대한 갈굼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격이나 적정관측 등 특별한 경우에만 썼다. 나는 정신이 썩어빠진 놈이 되어 있었고, 생활은 지옥 같았다.


특히 8월에 연세대 사건이 발생하자 '데모하는 대학생 놈들은 다 죽여야 한다'며 나를 괴롭히던 선임도 있었다. 내가 운동권에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테지만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었고) 그랬다면 더 괴롭혔을지도 모르겠다.


1996년 연세대 사태로 한총련은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다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소식도 TV 뉴스를 통해 잠깐씩만 들었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휴가 나와서 알게 되었다. 이는 김영삼정권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공안정국으로 몰아간 사건이지만 이로 인해 한총련도 몰락하게 되고, 학생운동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또한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학교 총학생회를 이끌게 된 PD 계열은 얼마 못 가 와해되어 버렸다고 한다. 역시나 PD 계열은 늘 분열이 문제였다.




9월이 되자 나는 일병이 되었다. 그러나 책임은 더 많아졌고, 생활은 더 고달파졌다. 그나마 나아진 것은 일병 진급하면서 중대본부로 올라가게 된 것인데, 마침 병기병 선임이 전역을 하게 되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화학병과지 병기병과가 아니라 병기병이 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일단 병기병의 임무가 뭔지 알기 위해 해병대 규정집을 찾아봤는데 거기에 '화학/병기병'이라는 직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부대 내에서는 최초로 스스로 '화학/병기병'이라고 칭하고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술교범(약칭 TM; Technical Manual이라고 한다)들을 보기 시작했다. 참고로 야전교범은 Field Manual, 즉 FM이다.


주로 병기(소총 및 경기관총, 유탄발사기, 권총 등등)를 관리하기 때문에 완전분해 수리하는 법부터 익혀야 했는데 K-1 기관단총, K-2 소총, K-201 유탄발사기, K-3 경기관총, K-5 권총 등을 계속 분해 조립하면서 원리와 수리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나는 어려서부터 총을 좋아해서 BB탄 총도 여럿 갖고 있었고, 군대 가기 전까지도 갖고 놀았었다. 그래서 총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웠는데 나중에는 그러한 총기를 설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나 존 개런드, 유진 스토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외에도 병기, 탄약, 화생방물품 등의 재고를 파악하고 관리대장을 정리하거나 체계를 만드는 등 선임이 대충 만들어놓은 방식들을 내 방식으로 바꾸었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중대장님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우리 중대는 그해 9월 말경에 전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대대는 전방경계근무에 2개 중대, 예비대 1개 중대 체제로 되어 있었고, 전방 A(알파) 지역 1년-예비대-전방 B(브라보) 지역 1년-예비대 이런 식으로 순환 근무를 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배속된 부내가 예비대에 있어서 계속 훈련과 부대 정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게 될 곳은 A지역이었는데 이곳도 북한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불과 2 km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은 FEBA-A 지역(최전방지역)이었고, 민통선이었다.


그리하여 전방으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9월 17일이었다. 비상이 걸린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는데 강릉에서 북한의 잠수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일명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발견된 잠수함


이로 인해 우리 부대의 전방투입은 연기되었고, 대신 전방에 경계근무 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동해에서 발생한 상황으로 인해 서쪽 끝까지 A급 전투태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휴가자도 다 복귀해야 했으며, 예정된 휴가도 나갈 수 없었다.


강원도 쪽에서는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한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가 전쟁이 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결국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부대는 10월 초에 전방에 투입되었다. 


전방에 투입된 후에도 한동안 긴장감은 지속되었고, 사태는 11월 초가 돼서야 종료되었다. 그리고 북한 쪽의 별다른 대응은 없었다.


나는 10월 중순에 일병 휴가를 나가게 됐는데 이때 원주에서 공군에 복무 중인 친구를 면회하러 갔었다. 그때 그 친구도 경계근무를 서다 왔다고 했는데 경계근무를 설 일이 거의 없는 공군에서도 이례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가 근무했었던 해병대 2사단 청룡부대는 원래 월남전 참전을 위해 만들어진 부대다. 월남에서 철수한 후 김포, 강화지역에 주둔하며 서부전선 경계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비록 해병대 2사단이 군단급 규모로 편제되어 있다고는 해도 1개 사단이 커버하기에는 그 면적이 너무 넓었다. 


특히나 강화도 및 부속도서들은 연대 (지금은 여단으로 격상) 하나가 커버하기에는 너무 넓다. 북한과 불과 2 km 정도 거리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나라 전방에서 연대 하나가 그 정도를 커버하는 곳은 아마 유일할 것이다. 당시 우리 중대가 경계근무를 한 섹터길이가 12 km 가 넘었으니 소대 하나당 초소에 가는 데만도 30분 이상 걸리기도 했다. 겨우 30여 명의 인원으로 휴전선 몇 km 구간을 주야간으로 경계근무를 섰다. 


또한 한강하구 쪽은 중립지역이고, 민통선이며, 강 및 해안과 적정을 감시하다 보니 GP, GOP라는 개념이 아니라 AOP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주로 대공관측이라는 의미다. 우리 중대본부가 있었던 곳 역시 AOP였으며, 지금은 그곳에 강화평화전망대가 지어졌다. 당시에도 군관계자나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민간에게도 개방되어 군 전역 후에도 여러 번 찾아가 보기도 했었다. (나는 여전히 그곳을 좋아한다)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이미지출처: https://blog.naver.com/geniouskje/221137436409 


한강하구의 중립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 UN군의 허가가 필요했고, 상대측에게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1997년 1월 초에 그 중립지역에서 작전 하나가 있었다. '평화의 소' 구출작전이라고, 진짜로 황소를 구출하던 작전이었다. 1996년 여름, 홍수 때 북한에서 떠내려왔던 소 두 마리가 유도라는 작은 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것을 계속 관측만 하다가 한 마리가 죽자 나머지 한 마리라도 살리고자 해병대 수색대가 들어가서 구출한 것이다. 당시 북한군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전원 전투배치 붙었던 기억이 난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라 수시로 A급 전투배치를 붙긴 했지만)




군대 있을 때 나는 일기를 계속 썼다. 2훈단에 입소할 때부터 전역할 때까지, 매일은 아니어도 꾸준히 일기를 썼다. 훈단에서는 일기를 수양록이라고 불렀는데, 보급품으로 나온 빨간색 해병대 노트에 적었다. 그 노트는 후반기교육을 받을 때까지 썼었고 실무 있을 때는 새로운 노트에 적었지만 계속 갖고는 있었다. 그러나 전역 전에 어떤 과정에선지 분실하고 말았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겠지만 기록이 사라진 건 아쉽다.


대신 실무에서 적었던 일기 여러 권은 아직 갖고 있다. 당시 일기를 보면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영어로 적기도 했었고, 민감한 내용은 암호문처럼 적기도 했었다) 매일매일을 버텨내던 내 모습이 보인다. 또한 여러 가지 관심분야들도 적거나 스크랩해 두기도 했다.


또한 그 일기장에 시도 많이 적었다. 시의 내용은 여러 가지였다. 군 생활에서 느낀 점, 사회에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등. 


물론 편지도 많이 썼고, 답장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러한 편지들은 모두 갖고 있다. 그중에는 헤어진 여자친구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그녀는 내가 군대에 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내 친구로부터 전해 듣고 알았다고 한다. 주소도 내 친구를 통해 알았을 것이다.


편지 속의 그녀는 여전했다. 더 이상은 나와 관계없는 사이라 생각해서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일병 휴가를 나가게 됐을 때 전화를 했다. 더 이상 나를 생각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너는 여전히 차갑구나"라며 알겠다고 했다. 그 뒤로 그녀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사회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그리하여 가장 현실적인 도피처를 택했다. 그러나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었고, 단지 또 다른 악몽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적응해 나갔고, 나를 괴롭히던 선임들이 하나둘씩 전역하자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1996년의 사건들 중에서 떠오르는 것 하나 더. 나와 두 살 차이인 여동생은 수능시험을 망치는 바람에 원하는 대학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방대에도 원서를 넣어보기로 했는데 동생 대신 내가 원서 접수를 하러 가기로 했다. 당시에도 여전히 원서를 작성해서 서류와 같이 직접 가서 접수해야 했다. 


밤기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는 도중에 TV에서 김광석 씨가 사망했다는 보도를 보게 됐다. 나도 김광석의 노래들을 좋아했었기에 그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지금도 1996년 1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었던 그 뉴스가 떠오른다. 


고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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