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 힘든 해병대 생활 버텨내기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을까

by 칼란드리아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당시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그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군대시절은 어떨까. 남자들은 대체로 힘들었던 시기의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멘털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내가, 도피하듯 군대에 갔던 내가 해병대 생활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1990년대 중반의 해병대는 여전히 악습이 남아 있었고, 군조직의 병역 개혁의 의지도 병행되던 때였다. 특히 내가 군생활할 할 때 사령관이었던 전도봉 장군은 해병대의 단합을 강조했고, 악습의 타파, 계급 간/부대 간 갈등의 해결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해병'이라는 말의 사용을 금지했고 대신 '해병대원'이란는 말로 병, 부사관, 장교들의 명칭을 통일했다. 이 때문에 '해병의 긍지'는 '해병대원의 긍지'로 바뀌는 등 모든 용어가 바뀌었다. 또한 연대를 표시하는 마크나 배지 착용도 금지했고 대신 해병대라는 마크로 통일시켰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으나 사령관의 의지가 워낙 강력했기에 결국은 그렇게 갔다. 이와는 별개로 국방부에서도 해병대 고유의 문화 및 체계를 깨뜨리면서 점차 육군화시키고 있었는데 내가 전역한 이후에도 해병대 내 사건/사고가 많다 보니 더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시기였다.


장교, 부사관(당시엔 하사관이라 불렀다), 병 간의 갈등은 타군도 마찬가지지만 해병대는 특히 더 심했다. 해병대 장교는 전통적으로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해병대를 선택하거나 혹은 소수의 대학에만 있는 해병대학군단(MROTC)만 있었지만 점차 일반 학군단 출신의 지원 또는 학사장교 등도 해병대 장교가 될 수 있었다. 부사관이 경우에는 병처럼 지원해서 복무하는 방식이었다.


해병대 내 '병(兵) 우월주의'는 장교 및 부사관과 종종 마찰을 일으켰는데 특히 신임 장교(소대장급)나 신임 부사관과 더욱 그러했다. 이는 고참 선임들의 지시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이건 비단 해병대에서만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 부대(중대본부)에서도 그러한 하극상으로 인한 사건이 있었다. 전방에 있을 때 우리 부대는 매일 새벽에 10 km 이상 구보를 했다. 주로 부사관이나 가끔은 분대장급 선임이 인솔하기도 했는데 2월의 어느 날, 그날은 작전하사가 인솔하게 된 날이었다. 그는 복무한 지 1년도 안 된 신참이었지만 계급으로 병들을 누르려했었다.


부대원들은 평소 그와 갈등이 많았고,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게 됐다. 작전하사는 이를 중대장에게 보고했고, 중대장은 그날 아침, 중대본부의 병들을 모두 연병장에 팬티바람으로 집합시켰다. 그리고는 영하 십몇 도의 날씨에 연병장을 선착순으로 포복으로 기도록 했다. 온몸이 마비될 정도로 추위와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약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하고서야 끝났는데 이로 인해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비록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어 보였지만.




해병대는 언제 어디서든 다른 해병을 만나면 (소속과 무관하게) 무조건 기수 확인부터 한다. 상대방의 계급이 자신보다 높으면 당연히 먼저 경례하면서 몇 기라고 밝혀야 하고, 계급이 같더라도 자기 호봉이 낮다 싶으면 먼저 경례하고 기수를 밝혀야 한다. 심지어 사복을 입고 있을 경우에도 그렇다. (티가 안 날 수가 없다)


해병대가 철저히 기수문화라는 건 일반인들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직접 겪어보는 건 또 다르다. 모든 것이 서열로 구분되어 있고, 또 비공식적인 호봉제가 있어서 계급별, 호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어길 수 없었다.


상당수의 것들은 억지스럽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곳에서는 그것을 질서라고 여겼다. 이를 어기는 자는 그에 상응하는 괴롭힘이 있었지만 그나마 당시에는 '기수열외'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복무하던 당시에도 과도기적이긴 했지만 그 이후에 더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어 간 것이 아닌가 싶다.


해병대의 독특한 문화는 언어 및 용어에서도 나타난다. 일단 해병대에서는 타군처럼 말 끝에 '~말입니다'라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각오해야 한다. 또한 '시정하겠습니다!'라는 말도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군대처럼 '~요'도 금지되어 있고, '~다'나 '~까?'로만 문장을 끝내야 한다.


암묵적으로는 '못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싫습니다'라는 말도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이를 에둘러 '괜찮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등으로 돌려 말한다. 선임이 무엇인가를 권유할 때도 무조건 두 번은 '괜찮습니다'라고 사양하는 척하고, 세 번째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하냐 싶겠지만 불문법이 더 무서운 법이다.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는 정체불명, 국적불명의 용어들이 뒤섞인 탓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지어낸 말이라 좀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예를 들기 위해서다)


이병 오장한테 아끼바리 이빨교육 제대로 시키라고 하고 갈고리한테 나까오리도 사라고 해. 일병 오장한테 순검 전에 쎄무워커에 털 잘 세우고 위장복이랑 실잠바 다리라고 하고 너는 주계에 가서 츄라이에 오파운드 하나 가져와. 그리고 소대에 함구 하나 없어진 거 채워야 하니까 다른 데서 아쎄이로 긴빠이해와.


이게 일상 대화인데 지금도 이러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런 표현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라 가급적 이렇게 말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일반적으로 쓰는 명칭에 대해서는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훈련이나 작업 때문에 힘들다기보다는 내무 생활이 더 힘들었던 것이다. 해병대 2사단이 더 구타와 가혹행위가 많다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하다.


나도 이병 때, 일병 때 겪은 일들을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일들도 많았다. 그게 비단 한두 사람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조직의 문제일까?


해병대는 왜 그런 문화가 되었고, 대내외적으로 그런 이미지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겪은 바로는 '열악한 환경' 때문이라 생각한다. 해병대는 창설 이후 계속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고 월남전에서도 그랬다. 내가 군생활하던 때도 그랬다. 국군 중에서도 가장 처우가 안 좋은 해군, 그중에서도 그 예하에 있는 해병대.


하지만 그러한 것을 '정신 승리'로 극복하고자 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치중했으며, 타군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것이 왜곡되면서 타군에 대한 우월감 및 불만이 커졌고 부정적인 이미지들도 생겨난 것. 물론 그 명성에 걸맞게 하려는 노력이 병행되고 있음은 인정한다.




내가 전방에 있을 때는 훈련이 거의 없었고, 가끔 고지점령 훈련을 했다. 이때는 중대본부에서만 나갔다. 나는 화학/병기병이지만 종종 통신병처럼 무전기를 매고 중대장님과 같이 다녔는데 이런 훈련은 형식적인 것이 많아서 그다지 힘들 것이 없었고 그냥 가벼운 등산하는 기분으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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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밤중에 갑자기 완전무장을 하고 철책을 따라 몇십 km 정도 행군을 하기도 했다. 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라고 하니까 그냥 했는데, 이런 걸 보면 군대는 군대다.


나는 체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구력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입대 전에도 걷기는 자신 있었다. 이전에도 종종 수 십 km씩 걸어 다니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다른 병들에 비해서는 운동을 좋아하거나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따로 시간을 내서 헬스를 하거나 전투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는 것도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도 별로 안 좋아한다.


강화도에는 산이 많은데 대부분의 산들은 다 가본 것 같고, 각 산마다 어떤 군사시설이 있는지도 대충은 알고 있다. 지금도 그쪽의 산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각 산에 얽힌 추억들이 떠오른다.


또한 5월이었나, 내가 소속된 부대에서의 훈련 이외에도 사단 화학지원대에 원대복귀해서 같이 종합훈련을 받는 것이 있었다. 나는 소속이 완전히 전방 부대로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파견 형식으로 나와 있는 것을 나중에 내 개인정보카드를 우연히 보고 알았다. (행정병이 보여주었다)


약 일주일 정도 진행했던 화학지원대 종합훈련은 나름 재밌었다. 나는 몸으로 때우는 훈련보다는 (아마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좀 더 생각을 할 수 있는 전술 훈련이 더 좋다. 특히 육군화학학교 시절 배우던 것을 다시 실습해 보고, 실제로 부대 내 장비들도 운영해 보며, 사단 내 여러 지역들을 다니며 작전을 수행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 덕분에 사단본부를 비롯해서 여러 부대를 처음 방문해보기도 했다.




강화도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지만 특수한 목적으로 육군과 공군 부대도 일부 있기에 가끔은 그 부대들과 협력해야 하는 일들도 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전방 알파지역 중대본부가 있는 곳은 현재는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가 세워져 있지만 당시에는 AOP만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대북심리전을 위한 전광판과 확성기가 있었다. 우리도 대북방송을 했지만 북한도 남쪽을 향해 스피커로 방송을 해댔다. 밤낮없이 울려대는 대북, 대남 방송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듣고 있으면 어느 것이 대북 방송이고 어느 것이 대남 방송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 방송은 국군심리전단(사실상 육군)에서 운용했고, 그들은 우리 부대 근처에 있었지만 거의 마주칠 일은 없었는데 간혹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육군도 있었다. 어느 갈등이나 마찰도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군대는 특히 그럴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전광판은 우리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했는데, 담당하는 병이 있어서 매일 상부 (기밀이라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으나)에서 내려오는 내용을 북쪽으로 내보냈다. 이 전광판은 북한에 상당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 주민 중에 이 내용을 보고 귀순하거나 혹은 강을 헤엄쳐서 건널 때 이 전광판을 보고 방향을 파악한다고 하기도 했다. (내가 근무하던 당시에는 귀순자가 없었다)


그리고 부대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첨탑이 있었는데 연말에는 외부에서 와서 여기에 트리 장식을 했다. 1996년 12월에도 이곳에 트리 장식을 했는데 이때는 민간인들도 부대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없어서 이와 비슷한 애기봉 성탄트리 사진을 가져와본다.


20101221001209_0.jpg 애기봉 성탄 트리. 이미지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112/0002155124




군대에 있을 때 나는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비중대에 있을 때는 연대본부에 있는 군교회로, 전방에서는 마을의 작은 교회에 다녔다. 강화도 최북단에 있던 그 교회는 민통선 내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에 있었고 부대에서도 몇 km 떨어져 있었는데 병장 선임의 인솔 하에 같이 걸어 다녔다. 사실은 부대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외출 삼아 가게 된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일요일은 종교활동 및 개인 신변정리 시간이라 좀 더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교회에 가서는 예배도 드렸지만 교회일과 마을 일도 도왔고 점심까지 먹고 왔다. 아무래도 군대 짬밥보다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어도 사식이 더 맛있기는 하다.


사실 기독교에 대해 믿음이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시 나는 꽤 신실하긴 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교회는 계속 갔었으니까. 그리고 예전에 IVF에서 나를 선교하려고 애쓰던 분이 내가 군대에 있을 때도 꾸준히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나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정성에는 감사하고 있었다. 군대에 있으니 여러 가지 사소한 것들에도 마음이 동하나 보다.


그래서 7월에 상병 휴가를 나오게 됐을 때 2박 3일간 IVF 여름 성경학교에 참석했다. 그때 마침 내 생일도 있어서 그 행사에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던 사진도 남아있다. 해병대 머리를 보고 나더러 '스킨헤드'냐고 묻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머리 모양이 좀 특이하긴 하지.




나는 주로 후반야 상황실 근무를 했다.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였나, 8시간 정도 야간 근무를 하고 오전에 몇 시간 잠을 잤다. 가끔은 OP나 전방 초소에 근무지원도 나갔다. 전방 근무는 대부분 야간 초소나 검문소 근무가 많기 때문에 오전 시간은 오침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생활 리듬이 그다지 좋지는 못했는데 그나마 오침도 할 수 없는 날들도 종종 있었다.


나머지 일과는 주로 작업이 많았는데 주둔지 주변시설을 정비하거나 벌초를 하기도 했다. 특히 철책 안쪽으로 들어가 갈대를 베기도 했는데 예전에는 그 갈대를 민간인들이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 갈대로 뭘 하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화문석'을 만든다고 했다. 아, 화문석을 갈대로 만드는 거였구나.


OP에서 적정을 바라보면 (북한은 대부분 민둥산이나 평야라 북한군과 주민들의 움직임을 관측하기가 용이하다) 저들도 우리와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거기도 사람 사는 모습이 있고, 북한군도 우리와 비슷했다. 2 km 좀 넘는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마치 근처에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하긴, 국가와 체제가 그래서 그렇지, 이 나라에, 그 나라에 태어나서 이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뿐 아닌가.


만약 실제로 전쟁이 난다면 어떨까? 나는 저들에게 총을 쓰고 총검으로 찌를 수 있을까? 가끔 훈련 중에 착검을 하고 실제처럼 돌격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의 심경은 정말 복잡하다. 사격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죽이기 위해 훈련을 받지만 그게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군인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사실은 피차 그전에 죽을 확률이 더 높지만. (우리 부대는 전쟁이 발발하면 10분 내에 죽을 가능성이 90%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1997년 3월, 드디어 상병이 되었다. 상병 때부터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던 던 것 같다. 부대 안에도 책이 좀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볼만한 것은 없었고, 대부분은 휴가 나갔다 오는 부대원이 사 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읽는 책을 빌려 읽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의 어느 날, 나는 다른 사람이 읽던 <뉴타입>이라는 잡지를 우연히 읽게 됐고, 거기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됐다. 나중에 상병 휴가를 나가게 됐을 때 이 애니메이션을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서 (비디오 열 편으로 더빙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삭제된 부분이 많았다) 봤다. 그렇게 에바에 빠지게 된 나는 지금도 골수 에바팬이다.


군대에서 일기를 쓰면서 시도 종종 적었다. 그러고 보면 시는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군대에서까지 꾸준히 썼던 것 같다. 그때까지 쓴 게 약 300여 편 정도. 하지만 군대 전역 후에는 시보다는 소설을 더 쓰게 되어서 그 이후에 쓴 시는 많지 않다.


딱히 시보다 소설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된 건 아니다. 그냥 좀 더 자유로운 글을 쓰고 싶어 했던 듯하다. 아무래도 시보다는 소설이 부담이 덜 해서. 예전엔 시가 더 쉽다고 생각했었지만 시나 소설이나 쉬운 것은 없었다. 단지 내가 그렇게 착각했을 따름이다.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문학 작품들도 읽고 여러 가지를 읽게 됐다. 다만, 군대 내에서 금지되어 있는 책들은 반입할 수가 없어서 사회과학이나 철학책들도 볼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책까지 금지인가?' 싶은 책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전공 공부도 하게 됐다. 2학년 2학기 때 학과 공부에 좀 소홀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전공 몇 과목 교과서를 가져와 상황실 근무 서거나 혹은 자유 시간에 봤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9월 정도에 자격증 시험 보는 것이 있어서 도전해 봤다. 해병대에서도 자기 계발을 위해서 장병들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나는 전공과 관련된 비파괴검사 방사선투과분야 기능사 시험을 준비했다. 딱히 필요해서는 아니지만 갖고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사 시험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다.


어느 날, 자격증 필기시험을 보는 대원들을 모두 태워서 강화읍의 어느 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치렀다. 이건 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하는 것이라 다른 민간인들과 동일하게 시험을 치렀던 것 같다. 나처럼 비파괴검사 기능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중에 필기시험 결과가 나왔을 때, 비파괴검사 기능사 자격증은 사단에서는 나 포함해서 두 명만 합격이라고 했다. 실기시험은 포항에 있는 해군항공6전단에 가서 보라고 했다.


실기시험을 위해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의 외박이 허락되었다. 일단 잠깐 집에 들렀다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포항공항에 도착한 후 포항 청룡회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우리 중대선임하사(보통 '중대선하'라고 부른다)가 청룡회관에 계신 분께 미리 얘기를 해주셨는지 친절하게 잘 대해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실기시험을 보러 해군항공6전단에 갔다. 알고 보니 6전단은 내가 전날 왔던 포항공항과 같이 있었고, 포항공항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해군 군공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6전단은 해병대 1사단 정문을 통해서 들어갔는데 그때는 나도 이미 병장을 달았을 때여서 더 이상 눈치를 볼 것은 없었다. (대체로 상병 5호봉 이상이 되면 특별한 이유가 없이 건드리지는 않았다)


6전단에 도착하니 여기에도 중대선하가 미리 얘기를 해놓았는지 해군 부사관(상사였나) 한 분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해군 항공단에서는 항공기 정비 때문에 비파괴검사를 하는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해병대에서 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라 신기했다고. 그러면서 차에 나를 태워서 부대 곳곳을 구경시켜 주셨다.


navy6.jpg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95%B4%EA%B5%B0%ED%95%AD%EA%B3%B5%EC%82%AC%EB%A0%B9%EB%B6%8


6전단 내에는 대부분 P-3 초계기와 헬리콥터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항공모함이 없으니 항모용 이착륙기는 당연히 없다. 그래도 그러한 항공기들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역시 나는 병기나 무기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 같다.


걱정하긴 했지만 실기시험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대구에서 출장나온 시험관이 문제를 출제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는 것뿐 실제로 투과검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이미 찍어놓은 필름을 보고 판독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고민하고 있으면 시험관이 힌트를 주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험관은 우리 학교 과선배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뜻하지 않은 학연이)


그렇게 나는 무사히 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됐는데 이후에도 한 번도 쓸 일이 없었고 그냥 그런 추억이 있었다 정도만 기억나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 부대는 그해 9월에 다시 예비대로 돌아왔다. 나는 알파 지역이 좋았고 추억도 많아 아쉬웠다. 다시 그쪽으로 들어갈 일은 없었다. (이듬해 4월에는 브라보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기에)


result_2008_10_5_1_5_39_504_10-calan75.jpg 97년 9월, 중대장님과 함께


가을에는 주로 진지구축공사를 했다. 한 달 정도 했나, 흙을 채운 마대자루(거진 20 kg 이상되는)를 짊어지고 산길을 올라 쌓고 산 중턱과 정상에 진지를 구축했다. 아, 정말 욕이 나올 정도였는데 그건 이듬해 봄에 있을 작업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던 것이었다.


그 당시 해병대 2사단에서는 매년 4 km 완전무장 구보대회가 열렸다. (1사단은 12 km라고 들었다) 중대원 중에 선수를 선발해서 출전하는 건데 나는 상병 말호봉 때쯤 아니면 병장 갓 달았을 때 참여했다.


20 kg 정도의 군장을 메고, 전투화를 신고 단체로 뛰어서 4 km를 아마 17분대에 들어왔던 것 같다. 연습을 매일 했지만 실제 코스를 뛰어본 건 대회날이 처음이었다. 오르막 내리막 구간도 있었으나 막판이 계속 오르막이라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그때 누가 인솔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앞에서, 옆에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같이 갔었는데 (당연히 인솔자도 완전 무장) 그 호루라기 소리 덕분에 더 힘을 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힘들 때 그 호루라기 소리가 나를 더 다그치는 것 같다. 살면서 내가 짊어지고 가는 무게는 20 kg짜리 군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훈련이 많았다. 주로 기동훈련과 전술훈련, 상륙훈련이 많았다. 해병대의 종합전술훈련은 TTT라고 부른다. 중대 대 중대로 맞붙는 중대 TTT, 대대 대 대대로 맞붙는 대대 TTT... 그리고 연대급은 TTT 대신 연대상륙훈련인 RLT가 있었다.


RLT는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TTT는 대체로 준비, 검열, 전술평가 순으로 이어졌고 며칠씩 하기도 했다. 주어진 상황 하에서 미션을 해결하며 적지를 점령하는 방식이다. 전술을 짜기 위해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때로는 나도 화생방 전술 관련해서 참여했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간혹 훈련 중 가상의 화생방 상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화학병으로서의 나의 임무는 주로 교육이나 훈련 때만 수행되었다.


훈련의 규모가 중대급의 역할이나 부담은 더 줄어드는데 아무래도 말단 중대까지 평가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RLT의 경우에는 검열을 제외하면 상륙장갑차 타고 강을 건너 고지 점령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TTT 중에는 주로 비트(개인 위장호)를 파고 들어가서 잤기 때문에 개인용 야전삽으로 땅을 파느라 애먹는 일이 많았다. 가뜩이나 겨울에는 땅이 얼어서 잘 안 파지는데. 그래도 땅속에 들어가 있으면 아늑했다. 불침번 때문에 누가 와서 깨우는 것이 가장 싫었을 정도로. (그건 텐트 치고 잘 때도 마찬가지지만)


그러한 훈련이 다 끝난 뒤에는 강화남단훈련을 갔다. 약 열흘 정도 강화도의 남쪽 지역을 행군으로 돌며 곳곳에서 훈련을 하는 것인데 이것도 재밌었다. 주로 공용화기 사격 훈련 또는 고지점령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이때는 개인텐트가 아니라 분대 텐트를 치고 한 텐트에 약 20여 명이 같이 지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니산을 단독무장을 하고 올랐던 건데 12월이라 눈이 쌓인 마니산을 등산객들과 뒤섞여 정상까지 올랐다.




11월 중순에 포항에 자격증 실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집에 들렀을 때 집안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다니시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회사를 그만두시게 되어 10월부터 회사택시 운전을 하신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하고 계신 가게의 장사가 잘 안 되어 가게를 그만두실 계획이라고 하셨다. 군대에 있는 내가 걱정할까 봐 부모님께서는 미리 그런 말씀을 안 하신 것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사회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뉴스를 통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집안 사정을 알게 되자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도 당장은 몰랐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관리체제에 들어간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이후에 계속 'IMF'라고 불리게 될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IMF.jpg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1997%EB%85%84%20%EC%99%B8%ED%99%98%20%EC%9C%84%EA%B8%B0




그해 12월 18일에는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나는 이번에도 부재자 투표를 하게 됐다. 내 생애 두 번째 투표이자 첫 대통령선거였는데 말이다. 12월 초 어느 날, 투표권을 가진 부대원들은 트럭을 타고 강화읍의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했다.


그리고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president.jpg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A0%9C15%EB%8C%80%20%EB%8C%80%ED%86%B5%EB%A0%B9%20%EC%84%A0%EA%B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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