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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pr 30. 2024

1998년 - 전역, 그러나 피해 갈 수 없었던 IMF

그래, 다들 고생이 많았다

1998년 1월 1일 새벽 4시경, 느닷없는 비상에 부대원들은 갑자기 단독무장을 하고 부대 뒤에 있는 산 정상에 올랐다. 새해 첫날부터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대대장님께서 새해 일출을 보라고 출동 태세 점검 겸 긴급출동을 하게 하신 것.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군대니까.


그날 일출을 보긴 했었나? 아마 봤던 것 같기는 하다. 소원도 빌었겠지. 전역을 몇 달 안 남겨둔 상태여서 아마 무사히 전역해서 사회에서 잘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군대에서는 늘 긴장 상태였다. 전방에 있을 때는 물론 예비대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방 경계에서도 늘 긴장이었지만, 부대 내에서의 생활도 그랬다. 그나마 병장이 되면서는 좀 나아졌지만, 몇 기수 위 선임들의 괴롭힘은 그들이 전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예비대에 있을 때는 5분 대기조에 속해 있었다. 몇 번 출동한 적도 있었는데, 출동 태세 점검도 있었지만 실제 상황도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다른 부대에 탈영병이 있었을 때 도로에서 검문하던 것. 강화도 밖으로 나가려면 강화대교(당시에는 유일한 다리였다)를 건널 수밖에 없고, 다리 양쪽에 있는 검문소를 지나야 만 하기에 탈영하더라도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럼에도 탈영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빠져나가기 전에 찾아야만 했다.


그보다 더 강렬한 기억은 부대 근처에 산불이 나서 진화하러 긴급 투입되었을 때다. 산불이 나자 소방서뿐만 아니라 군인, 주민들이 다 동원되었다. 전방이라 비행금지 구역이어서 소방헬기 운용은 금지됐었나, 아무튼 다들 필사적으로 불을 껐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주어진 건 삽과 양동이뿐이었다. 그걸로 흙을 파서 불을 껐다.


다행히 산불 피해는 크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도 잡혔다. 하지만 산불은 역시나 무서웠다. 자칫하면 인명 피해도 발생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연재해와 대민 지원 등에 투입되곤 했다. "군인들은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군인이 가장 값싼 인력이고 죽어도 탈이 적은 인력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쨌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만만한 것이 군인이었으니까. 게다가 대민 지원의 경우엔 군 관계자들과 사적으로 얽혀있는 경우도 많아서 마치 '사노비' 수준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그래서일까, 종종 군인들이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되면 안타까움이 크다. 특히, 해병대의 경우엔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렇기에 작년 9월의 채상병 사망 사건과 그 이후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착잡할 따름이다. 이에 대한 얘기는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니 자제하겠지만 아무쪼록 진상과 책임소재가 밝혀지고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이 되었으면 한다.




2월 중순쯤 지나서였나, 우리 중대는 갑자기 교동도에 들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 한 달간 교동도 북쪽에서 야전 생활을 하면서 철책을 치게 됐다는 것. 전역을 두 달 남겨 둔 시점이었다.


교동도 역시 북한과 가까이 있지만 북쪽으로는 철책이 없어서 간혹 간첩이나 탈북민이 그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건데, 그 이전까지 철책이 없었다는 것도 의아했다. 여기에서 철책은 그냥 울타리가 아니라 휴전선의 연장선이다.


아마도 우리 부대가 만든 철책. 이미지 출처: https://nam-sh0302.tistory.com/15708334


3월 초, 우리 중대는 대대적으로 교동도로 이동했다. 전방 투입에 준하는 이동이었는데 당시에는 강화도 본섬과 교동도가 연결되는 다리가 없었으므로 창후리에서 트럭째 배를 타고 들어갔다.


작전 지역에 분대텐트를 치고 지냈는데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낮에는 철책 작업을 하고 그날의 일과가 끝나면 근처 개울에 들어가 몸을 씻고 텐트 안에서 쉬었다. 3월의 바닷바람과 개울물은 차가웠으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게 군대인 것을. 


그렇게 우리는 약 2 km에 이르는 구간의 철책을 쳤다. 부대마다 맡은 구간이 있긴 했지만 아마 꽤 오래 걸렸을 거라 생각한다.

 

교동도에서 철책 작업 중. 저 뒤로 보이는 곳은 북한이다.


일요일에는 군용 트럭을 타고 교동도 내에 있는 교회에 갔다. 교동도의 대룡시장 근처는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옛날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교회에 다녀오면서 잠깐 근처 구경도 했었는데, 재작년에 교동도에 다시 가보니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2022년 12월에 교동도에 갔을 때 찍은 사진. 관광지가 돼서 예전의 기억들은 이젠 이렇게 흔적만 남았다.




3월 말에 우리는 다시 예비대로 복귀했고, 4월 중순에 브라보 지역 전방에 투입되었다. 브라보 지역은 알파 지역과는 여러모로 달랐는데, 나는 비록 그곳에서는 2주일 정도밖에 있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알파 지역보다는 브라보 지역에서의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있다. 왜일까.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4월 말에는 동기 둘과 같이 말년 휴가를 나왔다. 며칠간의 짧은 휴가였는데, 동기 하나는 집이 멀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지냈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내색은 안 하셨지만, 우리 집에도 IMF의 여파가 닥쳐 있었다.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회사가 부도나서 아버지께서 회사 택시를 운전하고 계신다는 얘기는 지난번에 했었는데, 어머니께서도 하시던 가게를 그만두셨다. 게다가 어머니의 건강도 안 좋아지셨다. 여동생은 내가 군대 간 동안에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3년제라 그해가 마지막 해였고, 주로 실습을 다니고 있었다. 전역하면 바로 일자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5월 4일, 전역교육대에 들어갔다. 전역교육대 역시 해군과 해병대에만 있는 제도로 알고 있다. 해병대 2사단 전역교육대는 문수산 유격훈련장과 같이 있었는데, 2년 전에 유격 훈련을 받던 기억이 났다.


2박 3일간 전역 교육을 실시하지만 별건 없었다. 게다가 5월 5일은 어린이날인데도 유격장 보수 작업을 시키기도 했다. (하루만 있으면 민간인인데) 그래도 2 년여만에 동기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고, 훈단 생각도 났다. 


그리고 팔각모와 군복에 아래처럼 예비군 표장을 부착했다. 그 당시 입고 나온 군복은 지금도 고스란히 다 보관하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생각나서 입어보니 이젠 맞지 않더라.





5월 6일 전역, 드디어 다시 민간인이 되었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이미 집안의 형편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원래 전역 후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으나 그런 것은 포기해야 했고.


전역한 그날부터 바로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PC 통신상의 구인 정보를 보고 어느 헤드헌터 업체를 찾아가 면접을 보았는데, 그 업체는 주로 롯데그룹 계열사에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 업체에서 주선해 줘서 5월 11일부터 롯데햄우유 식육사업부 냉장냉동창고 보조로 일하게 되었다. 전역한 지 5일도 채 안 됐을 때다.


그만큼 내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께선 건강 상의 이유로 일을 하기 어려우셨고,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살림이 어려웠다.


군대 가기 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몸으로 일하는 것을 더 의미 있게, 중요하게 생각했었기에 그런 일도 개의치 않았지만 부모님께서는 내게 미안해하셨다. 


그곳에서 1999년 2월 초까지 약 9개월간 일했다.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하고, 한 달에 90 만원을 받았다.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그 헤드헌트 업체에 얼마를 지급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월급은 90 만원 고정이었다. 얼핏 들리기로는 회사에서는 더 많은 돈을 그 업체에 줬다고 하던데, 당시에도 순진했던 나는 그냥 주는 대로 받았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일은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아침에 영업사원들이 납품하러 나갈 때 냉장, 냉동 창고에서 제품을 출고해 주고, 좀 있다가 입고 차량이 오면 제품을 다시 창고에 넣었다. 소위 전문 용어로 '까대기'라고 했다. 하루에 수십 톤의 물량을 넣었다 뺐다 했다. 그리고 매일 재고 파악을 했다.


그나마 평상시에는 수월한 편이었다. 냉장창고는 영상 4도, 냉동 창고는 영하 20도 정도라 여름에는 있을만했다. 일할 때는 두꺼운 털옷을 입었다. 박스의 무게는 대략 20 kg 안팎이라 별로 부담은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전역한 지 얼마 안 돼서 몸이 좋았을 때기도 했었고.


하지만 추석 등 명절에는 정말 죽을 맛이었는데 이 때는 냉동 갈비를 입고했다가 선물용 개별 포장하는 곳으로 보내는데 박스의 무게가 40 kg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곳에서의 생활은 재밌었다. 같은 부서에 있는 분들이 잘 대해주셨고, 내가 막내였기 때문에 형, 누나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사실 내 사수나 영업사원들은 나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었다. 거기에는 과장, 부장, 이사까지도 있었지만 회사 내에서도 식육사업부는 너무 마이너라서 거진 좌천되다시피 온 듯했다.


물류 창고 내에는 식육사업부 외에도 우유 등 유제품, 햄 등 육가공품, 기타 냉장 냉동 제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들이 같이 있었다. 가끔 재고 파악을 하면 남는 것들이 있거나 혹은 여분으로, 시식용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직원들끼리 가져가거나 혹은 다른 제품으로 교환해서 가져가기도 했었다.


가끔은 사수를 따라 여러 곳으로 고기 납품을 하러 가기도 했는데, 백화점이나 마트 등의 축산물 코너가 많았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우리가 '을'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나 무례한 태도, 심지어는 위협까지도 감수해야 했는데 사회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아, 을이 되면 안 되겠구나'라는.


어느 여름날, 내가 냉동 창고 작업을 마치고 나와 털옷을 입은 채로 쉬고 있었는데 어떤 어머니가 아이와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고 그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봤지?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되는 거야.


어머님, 다른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함부로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여름이 지나서였나, 결국 어머니께서는 수술을 받게 되셨다. 큰 수술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열흘 정도 병원에 계셔야 했고, 나는 일이 끝나는 대로 어머니를 찾아갔다. 병원은 집에서 걸어갈만한 거리였는데, 집, 회사, 병원의 삼각형을 오갔다.


어머니의 수술은 잘 끝났는데, 어머니께서는 그 뒤로 건강 관련해서 더 신경을 쓰셨고 아예 그쪽으로 일을 하기로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하고 계신데 그건 천성이 그러신지라 말릴 수도 없는 것이다. 나도 아마 그러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일을 하고 있던 덕분에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었고, 어머니의 수술비나 동생의 학비 마련에도 도움이 됐다. 동생은 그렇게 마지막 학기까지 잘 마쳤고, 졸업할 때쯤 동생도 취업을 하게 됐다. 




내가 군대를 가면서 내 매킨토시는 여동생이 쓰게 됐다. 하지만 여동생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일반 PC가 아니니 사용 방법도 다르고, PC용 프로그램도 쓸 수 없었다. 동생은 맥용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학교 다니는 동안 과제도 하고 공부도 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내 욕심 때문에 그랬던 거라 많이 미안했다.


게다가 2년도 채 쓰지 못하고 군대에 갔다 오니 그 맥은 이미 고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내가 전역한 뒤로도 맥을 계속 쓰기는 했지만 계속 쓰기는 좀 어려웠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을 때마다 용산에 가서 PC 부품들을 하나씩 사서 조립하기 시작했고, 9월쯤에는 PC 조립을 마쳤다. 자금의 여유가 있으면 좀 더 좋은 사양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자금 사정 상 셀러론과 가성비 있는 부품들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PC를 사용하게 됐고, PC 통신도 그걸로 했다.


당시 내 PC의 바탕화면 캡처. 아마 1999년도쯤의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무렵에는 PC 통신 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96년 이후 가정용 인터넷 보급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014XY 체제의 도입으로 통신요금의 부담은 낮아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PC 통신 서비스 업체에서는 고유의 014XY 번호를 갖게 되었고 이 번호로 접속하면 바로 연결되었다.


또한 기존의 하이텔, 천리안 등도 좀 더 그래픽 위주의 환경으로 바뀌었으며, 유니텔, 나우누리, 넷츠고 등의 업체들도 생겨서 경쟁하였는데, 이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CD-ROM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었다. 


나는 유니텔, 나우누리, 넷츠고 등을 이용했었는데 특히 주로 넷츠고를 이용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이전에 활동하던 인디텔은 경영난으로 내가 군대 간 사이에 사라졌고, 내가 애정했던 시문학 동호회 역시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동호회와도 거의 연락을 끊겼기 때문에 그 이후의 소식을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넷츠고에서는 같은 연령 동호회에 가입했다. 아래 이미지는 당시에 받아둔 것인데 잘 보면 가운데쯤에 있다. 


당시 나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느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밤에는 동호회 친구들과 채팅을 하고 또 게시물을 통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또한 오프라인 모임도 많아서 시간이 되는대로 참석했다. 그때는 그게 거의 유일한 낙이었던 듯하다.


1998년 8월, 서울 홍대에서 첫 전국 정모가 개최되었다. 서울,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많은 친구들이 올라와서 모인 인원이 꽤 많았다. 당시 회장 - 대표시샵, 줄여서 '대샵'이라고도 했지만, 동호회에서는 '샘지기'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동호회명과 관련이 있지만, 동호회명까지는 밝히지 않겠다 - 은 부산에 사는 여자였다. 


그녀와 온라인상에서는 많이 만났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날 정모 이후 내가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고, 결국 우리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나의 두 번째 사랑의 시작이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여자친구 다음으로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한동안 다른 회원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전역 후 나는 무선호출기(삐삐)에 새로 가입했다. 그러나 이미 시장은 PCS 및 셀룰러 쪽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무선호출기 사업자도 많이 줄어들어서 기존보다는 영세한 업체들이 많았다. 친구들과 모임이 많다 보니 연락할 일도 많았는데, 결국엔 나도 무선호출기는 해지하고 PCS에 가입했다.


내 최초의 휴대전화기는 아래 사진에 있는 어필이라는 기기였는데 LG 텔레콤 (019) 전용 단말기였다. 크기도 작고, 긴급 시 일반건전지를 배터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LG는 지방에서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딱 1년만 썼었다. 기기는 기념으로 갖고 있었지만 이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듯하다.


어필폰. 이미지출처: https://blog.naver.com/mcm2korea/222794922359




1998년 2월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지만 아직은 사람들의 기대에 많이 못 미쳤고, 오히려 실망스러운 면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랬다. 정부의 정책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고, 무엇보다 기업들의 분위기도 IMF 이전과는 달라졌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시스템 자체가 바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직업관도 바뀌게 되었다. 기업들도 문을 닫거나 통폐합되면서 더 이상 평생직장이나 정년이라는 개념도 없어지게 되었고, 정규직이라는 것조차 어려워지게 됐다. 


비록 IMF 관리체제 하의 시기라 사회는 전반적으로 암울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젊음의 열기는 그러한 것들을 이겨내는 듯했다. 나도 일하면서 그러한 분위기들을 체감했지만, 회사에서의 좋은 분들과 친구들 덕분에 그 시기도 그럭저럭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들 힘들었고, 다들 고생했었기에, 그래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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