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란드리아 May 07. 2024

1999년 - 복학 후 모든 게 달라졌다

마음의 병은 육신의 병보다 더 힘들 수도

냉장.냉동 창고에서 10 개월 간 일한 뒤 1999년의 설날을 앞두고 2월 초에 그만두었다. 내 후임자로 동갑내기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를 추천해서 나 대신 일하게 되었다. 


전역 후 휴일 제외하고는 쉬는 날 없이 일을 했었기에 여행도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복학 전에 국내 여행을 가보기로 했다.


우선 설날 전에 혼자 시골에 내려가 차례와 친척분들께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택시 운전으로, 어머니께서는 건강 상의 이유로 못 가신다고 하셨다. 그전에도 시골에 혼자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설날이 지난 후 나는 부산으로 가서 여자친구를 만났고, 이틀 정도 함께 있었다. 다만, 여자친구의 집안은 보수적이셔서 외박은 물론 통금 시간도 있었기에 밤에는 일찍 들어가야 했다. 


부산에서 울산, 영덕, 울진, 삼척, 동해, 강릉까지 며칠에 걸쳐 시외버스로 7번 국도를 타고 올라갔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었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바닷가 근처 동네가 보이면 내려서 구경 좀 하다가 다시 버스 타고 올라가는 식이었다. 숙소도 근처 민박이나 여관, 모텔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여행은 대체로 그런 식이 많았다. 


당시 여행 중에 찍은 일출 사진. 장소는 모름.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2월 중순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일상을 시작해야 했으니까 그 정도로도 족했다.


3월에 복학하기로 했고, 다시 신문사에도 합류했지만 후배들과는 아직 어색함이 있었다. 비로소 복학생의 심경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신문사 일이나 기사 작성에 있어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대부분 후배들에게 맡겼다. 다만, 여전히 과학.학술부에 있으면서 기사만 한 두 꼭지 정도 쓰기로 했다.


2월 말쯤에 신입생 새터가 있었는데 나도 신문사 후배들 지도 겸, 또 과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 하기 위해 새터에 참여했다. 그런데 중간에 극기 훈련 비슷하게 단체미션을 하는 코스가 있었는데 공대 학생회에서 나를 급히 찾더니 내게 교관을 부탁했다. 내가 해병대에 다녀왔다는 소문이 난 모양이다. 교관이나 조교가 체질에 맞지는 않지만 그냥 주어진 대로 했다. 그래서였나, 그 해 신입생들의 기억에 나의 이미지는 그때 본 교관으로서의 모습이 많았다.




3월이 되어 복학을 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돌아온 학교나 과의 분위기는 휴학 전과는 많이 달랐다. 당시 우리나라는 여전히 IMF 관리 하에 있었고,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다. 일찍 졸업한 동기들 중에는 취업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예전에는 졸업만 하면 한전이나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더욱이 서로들 학점 관리나 경쟁이 치열해졌음을 느꼈다.


특히 나처럼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한 동기들의 경우 그러한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군대 가기 전에는 설렁설렁 공부하고 학사 경고나 겨우 면하던 동기들이 분위기나 눈빛이 이전과 달라졌다. 그래야만 했고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3월 말에는 우리 집도 팔고 화곡동으로 이사했다. 기존에 살던 당산동보다 좀 더 서울 외곽으로 가게 된 것인데 그나마도 전세였다. 가계 상황이 그 정도로 어려워졌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어도 담담했다. 


복학 후 나는 더 이상 학생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냥 학과 공부와 독서로 보냈던 것 같고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다. PC 통신상의 동갑내기 동호회 활동은 여전히 열심히 했고, 가끔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만나 술 한 잔 하며 얘기를 나누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특히 4월부터인가는 동호회 대표도 맡게 됐다.


부산에 사는 여자친구와는 한 달에 몇 차례 만났다. 내가 한두 번 정도 부산에 내려갔고, 여자친구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울에 올라왔다. 여자친구도 여전히 동호회 회원이었기에 둘만 만나는 경우도 있었고, 다른 친구들과 같이 만나기도 했다.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동호회 내에서도 다 알려져 있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라 용돈도 많지 않았지만 주로 무궁화호 입석을 학생 할인으로 다녀서 그나마 부담이 좀 적었다. 기차로도 편도 6시간이 넘는 거리를 계속 다니느라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순수했던 날들이었다. 입석에서도 요령이 생겼고, 서울-부산 간 무궁화호 정차역을 다 외웠다.


추억의 무궁화호 열차.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jeongmin_04/222226475489


부산에서는 여러 곳을 함께 다녔기에 곳곳에 추억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부산이 친숙해졌고, 심지어는 '대학 졸업 후에 부산에 내려와서 살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부산에서는 주로 친구집이나 PC방, 심지어는 캡슐호텔에서도 잔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에게 꽤 민폐를 끼친 것 같다. 나도 생각이 많이 모자랐고, 이기적이었지만 당시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반면 여자친구가 서울에 올라올 때는 주로 그녀의 삼촌댁에서 머물렀다. 밤이 되면 통금 시간 전에 삼촌댁에 데려다줘야 했는데 역시나 외박이나 친구집에서 잔다는 얘기는 통하지 않았다.


여자친구 집에서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의 부모님을 뵌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 여자친구에 대해 궁금해하셨는데, 그해 5월 언젠가 부산에 사는 친척 누나의 결혼식이 있어서 가족들이 부산에 내려갔을 때 여자친구를 함께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는 착하고 순진했던 것 같다. 전공은 윤리학이었나, 하지만 졸업 후에 취직을 못하고 있어서 집에서 눈치를 많이 보는 듯했다. 나와 만날 때도 취업 얘기가 나오면 우울 모드였는데 그래도 여자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작은 사업을 하고 계셔서 집안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러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복학 후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3학년 1학기 학점은 겨우 3점대 초반으로 처참했다. 이젠 더 이상 1, 2학년 때처럼 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전공과목에서 죽을 쑤면서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 맞는가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군대도 다녀오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지만 그러한 자신감마저 떨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그동안 쌓여있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과 원망까지도 한꺼번에 터져 버렸다.


1999년 6월 중순쯤, 나는 학교 학생생활연구소에 상담을 신청했다. 그곳은 일종의 상담소였는데 상담선생님이 배정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상담 첫날에는 성격 검사, 심리 검사, 정신분석 검사 등 몇 가지 검사를 했다.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몇 시간 동안 두꺼운 문제집 같은 것을 풀었다. 


그중에 한 가지는 MBTI 검사였다. 지금은 MBTI가 가십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25년 전쯤에는 전문 기관의 분석을 통해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결과는 INTJ였다. (지금은 INTP로 고착되었다)


다른 검사 결과도 있었는데 그건 내게는 비공개였다. 단지 그 결과지를 밀봉한 봉투에 넣어 주면서 신경정신과를 추천해 주었다. 진료 볼 때 참고자료로 제출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동안 학교 상담소와 정신과 병원(사실은 의원이었겠지)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정신과 병원은 개인병원이었고 청량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옛날부터 '청량리 정신병원'이라는 곳이 유명했었는데 그곳은 아니고 나중에 보니 그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정신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서 30분 정도 상담을 받았고, 약도 처방받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었는데, 진료받은 내역이 건강보험증에 기재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병원에 가려면 건강보험증을 가져가야 했었고, 진료 내역을 건강보험증에 기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 진단명이 뭐였을까? 나중에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특별한 진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열성 인격장애'와 유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내가 허무주의와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대인 관계를 기피하지는 않았었는데 특정한 부분에서는 그러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처방받은 약은 항우울증 치료제였는데 몇 가지 약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약들을 매일 복용했다. 병원도 다니고 학교 상담소도 계속 다녔지만 내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듯했다.




8월 16일에는 대구에서 동갑내기 동호회의 전국 정모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 작업을 했다. 대구 지역의 친구들에게 장소 섭외를 부탁했고, 하루 전날인 광복절에 내려가 정모 장소 사전 답사 및 우방랜드에서 같이 놀았다. 그날밤은 대구의 친구집에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아침 첫차로 바로 시골로 내려갔고, 부모님께서도 차로 시골로 내려오셨다. 병원에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구급차로 시골집으로 오셨고, 의료진이 생명연장 장치를 제거하여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 더운 여름날, 시골집에서 3일간 장사를 지냈다.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문상객을 맞이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비록 시골집의 마당이 넓어서 평상을 놓고 그날막을 치고 장례를 치렀지만 그날의 무더위는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집에서 묫자리로 상여가 나가던 날의 기억도 생생하다. 그렇게 전통적으로 장례를 치러본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나 그렇게 한 적은 없었는데 왜 유독 할머니만 그렇게 했을까. 아마도 친척 어른분들의 고집이었을 것 같다.


정모는 잘 진행했다고 했는데, 대신 내가 친구에게 맡겼던 필름 카메라는 분실했다고 했다. 친구에게 물어내라고 하기도 어렵고 그냥 넘어가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아쉬웠다. 할머니께서도 하루만 더 기다려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2학기가 되어도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해망상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때론 우울해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항우울제로 처방받은 약은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공부를 하거나 무엇을 해도 그냥 멍한 상태일 때도 많았다. 잠도 많아졌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렇게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9월 말부터는 더 이상 약도 먹지 않고, 병원도 다니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이겨내 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 상담소는 졸업 때까지 계속 다녔다.


더불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글은 계속 썼지만, 이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글들을 썼다. 특히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 교내 학술문예공모전이 있었는데 그때 습작 소설 중 한 편을 출품했다. 결과는 우수상. 최우수상 수상작이 없었기에 사실상 가장 높은 상이긴 했으나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자전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다소 희망적인 결말을 낸 작품이었는데 심사위원을 맡은 교수님들께서도 그 점을 긍정적으로 보신 듯하다. 


총장실에서 시상식을 하던 날, 총장님께서는 공대생이 소설부문 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하신 듯했다. 그래서 내게 그 작품을 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냐고 물어보셨다. 나의 대답은 '네 시간'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써 내려간 단편이었지만 내겐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의 나의 희망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심리적으로 불안했고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다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이젠 더 이상 기자나 작가를 진로로 생각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작가로 생계를 유지할 자신은 없었다. 대신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게 되었지만 핵공학이나 원자로 쪽을 전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는 보건물리였다. 3학년 2학기 전공과목이었는데 주로 방사선의 인체에 대한 영향을 다루는 학문이다. 나는 원래 생물학도 좋아했었기에 보건물리 쪽으로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3학년 2학기 교양 과목 중에 <창업과 기업가 정신>이라는 과목도 있었는데 이는 옴니버스식 강의 과목이어서 한 주에 한 명씩 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 방식이었다. 이때 IT기업이나 당시 열풍이던 닷컴기업 대표, 창업과 관련된 강의를 하던 사람들이 꽤 왔었다. 그중에는 학교 강당을 대여해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시험 대신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평가했는데, 나는 당시 유행하던 '인터넷 편지쓰기' 사업을 구상했었다. 막연하게나마 창업을 한다면 어느 정도의 비용과 인력과 물품, 장소가 필요할지 예상을 해보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순진했던 것 같다. 수익구조도 너무 단순하고 낙관적이었는데 이는 이후에 닷컴버블이 붕괴되면서 또 한 번 경제 위기가 왔던 그런 분위기와 맞물려 있기도 했다. 그것은 비단 국내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여자친구와는 계속 잘 지냈지만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달에 몇 번 만났고, 대부분은 전화통화나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오해가 생기면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휴대전화요금도 만만치 않게 나오던 터라 그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SKT로 바꾸었고, 이후로 010만 변경해서 25년째 사용하고 있다. 당시  SKT에서 TTL을 내세우며 20대 초반을 위한 요금제와 멤버십, TTL 존을 만들었는데 한동안 쏠쏠하게 잘 이용하였다.


여자친구와의 만난 날의 기점은 1998년 12월 25일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12월 25일은 우리가 만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만났고,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겉으로 표출되었다. 결국 여자친구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서로 감정이 안 좋은 상태로 부산에 내려갔다.


이후 전화 통화를 계속하고 편지를 적어 보내며 여자친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3월에 새로 이사 간 집에서는 ISDN에 가입했다. 이는 속도도 더 빠르면서 같은 번호로 두 회선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화 때문에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었다. 더구나 통신 요금도 좀 더 저렴했던 것 같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개인 홈페이지가 유행했었는데 나도 나모웹에디터 등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내 PC를 서버로 만들어서 운영했다. 개인 홈페이지를 제공하는 포털 등도 있었지만 굳이 개인 서버까지 운영한 건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뭔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었던 바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1999년에는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 프리챌 등의 커뮤니티가 생겨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러브스쿨은 초중고 동창생들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고, 나도 이곳을 통해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1999년부터는 초등학교 6학년 반창회 모임에도 나가게 되었다.


나는 싸이월드는 이용하지는 않고 가입만 했었고, 프리챌에도 몇몇 동호회에 가입하느라 가입했었다. 그때쯤 아마 네이버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던 것 같다.


1999년 5월에 캡처해 두었던 네이버 메인화면




또한 1999년은 세기말 현상이 유행했으며, 특히 Y2K 버그라는 용어와 테크노 열풍이 불었다. Y2K 버그는 잘 알려진 대로 2000년이 되면 컴퓨터에서 이 날짜를 1900년으로 인식해서 그 오류로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는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가 극히 일부 있기는 했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래부터 문제가 과장되었다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Y2K 문제는 가요계에서도 YIIK라는 그룹이 나올 정도로 이슈화되었다.


YIIK. 이미지출처: https://blog.naver.com/hyunjong0831/223107940550


1999년이 테크노 댄스로 기억되는 이유는 이정현 때문인데, 그 외에도 국내외에 테크노 댄스곡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그런 흐름이 이어졌던 것 같다. 또한 전지현이 모 프린터 광고에서 테크노 댄스를 추는 장면으로 데뷔하면서 그러한 기억을 더욱 각인시킨 듯하다. 지금도 그 광고의 동영상은 계속 회자되고 패러디도 많이 나오고 있다.




1999년 12월 31일, 세기말의 분위기가 정점을 찍고 있었다. 그날 나는 서해에서 일몰을 보고 보신각으로 가서 타종을 본 후 새해 일출을 남산에서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러한 과정을 아버지의 캠코더에 녹화하였다. 그리고 그 영상의 제목을 '해프닝'이라고 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친구 한 명과 함께 오후에 월미도로 이동하여 일몰을 본 후 바로 지하철로 종각역으로 이동하여 위치를 잡고 자정까지 기다렸다. 자정이 되면서 서른세 번의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고, 근처 건물에서는 레이저쇼가 펼쳐졌다. 종로 도로는 차량이 통제되어 사람들은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그렇게 2000년의 첫날을 맞이하였다. 길거리는 광란의 도가니였는데 내 기억에서 그 정도의 열광적인 모습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밤새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습을 촬영했고, 새벽에 일찌감치 남산에 올랐다. 그렇게 남산에서의 일출까지 보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6 mm 테이프 플레이어에 녹화한 테이프를 넣고 재생하자 화면은 치직거리며 나오지 않고 소리만 나왔다. 플레이어나 TV가 잘못된 것인가 싶었지만 영상 녹화자체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날의 해프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데 당시에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일반화되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2000년대 후반에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에 제약이 많았는데 아쉬웠던 순간이 참 많지만 가장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이때였다.


그렇게 우리는 200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전 09화 1998년 - 전역, 그러나 피해 갈 수 없었던 IMF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