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새 천년의 시작은 2000년부터일까 2001년부터일까? 사람들은 천 단위의 숫자가 바뀌는 2000년을 새 천년의 기원으로 생각하지만 엄밀하게는 2001년부터다. 기원 후가 1년부터 시작해서 100년, 1000년 단위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00년까지는 1990년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기에 나의 글도 2000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나의 대학 생활도 2000년까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끊으려 한 이유도 있었다.
2000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나는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그러나 정말 죽으려고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라서 매번 미수에 그쳤다. 그래서 내가 그랬던 것은 부모님께서도 모르신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던 것도 모르시니. 나의 그러한 일들은 현재 내 아내만 알고 있다.
나는 겨울을 심하게 탔다. 그건 고등학생 때부터, 아니 어쩌면 사춘기 이후로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겨울을 쉽게 넘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이번 연재를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자문한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고, 군대 전역 후에도, 그리고 복학 후에도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원래 힘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사람들에 대한 불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과 자괴감은 나를 계속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빠져나오려 해도, 도피하려고 해도 탈출구는 없었다. 그렇게 계속 벗어나려던 몸부림은 압박감으로 누적되어 결국 나를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몰고 갔을 수도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면서 나 자신에 대해 더 비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정신과에서의 치료를 임의로 중단하지 말고 계속 받았어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스스로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마음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지만) 나는 그것을 극복해 냈다.
1월 초, 관계가 악화된 여자친구와 다시 얘기를 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여자친구를 다시 만났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헤어졌다.
나의 마지막 자살 시도는 바다에 뛰어드는 걸로 하려 했다. 그리하여 헤어진 그날 밤에 혼자 바닷가에 갔다. 동백섬, 해운대, 달맞이 고개까지 걸으며 어디서 죽는 것이 가장 좋을까를 생각했다. 해월정에서 밤바다를 내려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부모님 생각도 했고,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생각이 많아졌고 복잡했다. 그러나 결론은 한 가지였다. 나는 더 이상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추운 겨울 바다에서 밤을 보낸 후 새벽, 나는 부전역에서 청량리역으로 가는 통일호 열차를 탔다. 당시 통일호는 아래 사진처럼 생긴, 일반명함 크기의 1/3만 한 표를 주었다. 좌석 지정도 없고, 도착할 역도 미리 인쇄돼 있었는데 부전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 것을 대학생 할인 요금으로 미리 만들어진 건 없어서 일단 안동까지 가는 표를 주면서 청량리역에 내려 차액을 지불하라고 했다.
새벽 6시엔가 출발해서 90 여개의 역을 지나 12시간 30분 만에 청량리역에 도착하는 열차였다. 그 노선은 얼마 뒤 무궁화호로 대체되었고, 그나마도 그렇게 다니는 노선은 없어진 것 같다.
부전역을 출발하여 해운대쯤을 지나갈 때 해가 뜨고 있었다.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보다가 졸다가 가끔 기차 내 판매원에게서 간식도 사 먹으며 올라갔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끝내기엔 너무 억울하니까.
그리고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살게 되었다.
4학년이 되었다. 복학 이후에는 등록금을 내기가 어려워 분할 납부를 신청해서 세 번인가에 나눠서 내거나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냈었다. 아마 IMF 체제 이후로 학자금 대출이 더 활성화된 것 같다. 부모님께 등록금 얘기를 할 때마다 너무 죄송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해서 그러기도 했었다.
마지막 두 학기는 전공과목과 교양 과목을 적절히 수강 신청 했는데 사회봉사 과목도 신청했다. 그동안 사회봉사 과목을 세 과목을 들었기에 신청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이었다. 그 마지막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영등포에 있는 성문화전시관에서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하는 것을 신청했다.
그 성문화전시관은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이하 내일여성센터)'에서 위탁 운영하던 곳으로써, 전시관의 소장은 당시 '아우성(아름다운 우리들의 성)'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구성애 씨였다. 소장이긴 했지만 방송출연이나 강연 등 대외 활동이 많아 실제로 센터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 만날 기회가 없었고, 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에 딱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토요일마다 학생들에게 교육을 했는데 주어진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랐다. 교육 내용 이외의 사견은 말하기 어려웠다. 학생들은 주로 초등학생이 많았지만 가끔 중학생도 있었다. 단체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개인 몇 명이 오기도 했었다. 한 번은 방송국에서 내가 교육하는 모습을 촬영한 적도 있었는데 시사프로그램이었다. 나는 방송을 못 봤지만 방송에서 내 모습을 봤다는 친구들이 있었다.
원래는 토요일만 하는 것이었지만 평일에도 시간이 되면 가서 전시 해설을 했고, 시간이 되는 대로 자주 찾아가서 그곳에 있는 분들 및 학생들과 함께 했다. 처음에는 학점 때문에 신청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순수히 자원봉사를 하는 마음으로 했고, 내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으며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여담으로, 그 성문화전시관은 2000년 말에 서울시와의 위탁운영계약이 종료되어 2001년부터는 YMCA가 운영을 하게 되었고, 이름도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로 바뀌었다)
그곳은 성문화전시관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시설도 같이 있었는데 특히 힙합 쪽에도 후원을 많이 하는 듯했다. 그래서 랩이나 비보잉을 하는 고등학생, 청소년들도 많이 찾아왔고, 나는 자연스레 그들과도 친해졌다.
또한 내가 원래 하기로 되어 있던 봉사활동 범위를 넘어서서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여러 활동이나 행사에도 참여하게 됐다. 상담 교육을 받고 그 단체의 홈페이지의 상담게시판에서 성상담을 하기도 했고 (주로 초등학생~대학생 정도를 대상으로 했는데 게시판별로 연령이 구분되어 있었다), 행사에서 진행을 돕기도 했다. 힙합 페스티벌에도 몇 번 참여했었다.
2000년 하반기에는 그 단체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내부적인 상황까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아무튼 그 단체는 이름을 '탁틴내일'로 바꾸고, 신촌에 본부 및 성문화전시관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는 어려워 가끔 시간이 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하거나 혹은 대외적인 행사에 참여하곤 했다.
그러한 교육과 상담, 그리고 대외적인 활동 등을 통해서 그곳에 계신 분들 및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과 많이 친해졌고, 여러 차례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러한 것은 나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 방학 기간에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오지탐험 캠프였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폐교에 텐트를 치고 4박 5일간 여러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서울시에서 주관했고 내일여성센터가 행사 진행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 나를 포함해서 우리 학교 학생 및 다른 대학 학생등 열 명 정도가 사회봉사로 참여했다. 나는 그 단체와의 인연 때문에 계속 도와주던 입장이었다.
원래는 프로그램 참가 신청자가 많았는데 행사 진행되기 얼마 전에 유사한 캠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신청자가 원래의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행사를 준비하던 관계자들은 낙담했으나 행사는 원래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래서 행사가 더 원활하게 진행됐을 수도 있겠다.
나는 사전답사팀에도 같이 했었고, 하루 먼저 가서 행사 진행용 설비를 준비하는 선발대로도 참여했다. 그러면서 행사 진행 및 아이들을 맡은 조장 역할도 했다. 우리 조원들은 중 2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생각보다 착하고 통솔에도 잘 따라주었다. 나도 군대 시절 야전 생활에 익숙하긴 했어도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생활하는 건 여러모로 걱정도 되고 신경도 쓰였지만 다행히 무사히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재밌었고 의미 있는 경험이 되었다.
4학년 전공 수업 중에는 실험 과목들도 여럿 있는데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기관에 가서 해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물론 직접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전문연구원이 하는 걸 구경만 하는 정도지만.
그중에는 대전의 원자력연구소에 가서 하는 것도 있었다. 그때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도 처음 봤고, 마침 가동 중지 기간이라 원자로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가지 실험을 했다. 다른 대학 원자력공학과에 있는 실험용 원자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를 이용해서 간단한 핵임계 실험도 해봤다.
또 기장의 고리원자력발전소 내에 있는 원자력연수원에서 며칠간 합숙하면서 원자로의 운용 및 설비들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원자력공학도로서 필요한 것들이고 책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좋았지만 나는 이미 진로를 다른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냥 기억에만 남겨둘 따름이었다.
사실 원자력발전소는 3학년 때 영광원자력발전소(지금은 '한빛 원자력발전소'로 이름이 바뀜)에 처음 가보았다. 그때는 전공과목 때문은 아니었고, 원자력공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전소 투어를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원자력발전소를 처음 가보긴 했지만 1차 계통은 당연히 볼 수 없고, 2차 계통 외부의 터빈이나 배관 정도만 볼 수 있어서 별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사용 후 핵연료 저장소나 방사성폐기물 저장소 등만 봤던 것 같다.
그 영광 원자력발전소는 2000년 하반기에 또 가게 됐는데 그 얘기는 아래에서 다시 하겠다.
4학년 1학기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 장학금도 받을 수 성적이었지만 어느 날 학과장님이자 내 논문지도교수님 (4학년이 되면 졸업논문 지도교수님을 선택할 수 있었다)께서 부르시더니 다른 학생에게 장학금을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 학생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방 학생이고 어렵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기성회비 면제 정도이긴 했지만 나 역시 여전히 가계 상황이 어려운 터라 등록금도 분할 납부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말씀에 너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교수님의 의도도 알았고, 그 교수님은 내가 대학원 진학 때 지도교수로 생각하고 있던 분이라 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보다 조금 더 어려운 학생에게 양보하는 것도 (마지막이지만)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 얘기도 부모님께는 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는 4학년 때도 내내 부담이었다. 나는 최대한 용돈도 아껴야 했고, 졸업사진은 찍었지만 졸업앨범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졸업앨범에 내가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다. (졸업 앨범 자체를 본 적이 없다)
4학년 1학기 때였나, 과에서 졸업여행을 제주도로 가기로 했는데 나는 40 만원 정도가 없어서, 부모님께도 말씀드리기 죄송해서 졸업여행을 못 간다고 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용돈을 마련했어야 했는데 대학교 3, 4학년 때는 따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1999년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잠깐 PC방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일주일 만에 그만둔 것이 전부였다.
4학년 2학기 때 나는 외부 논문 공모전(원자력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원자력논문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교내 학술문예공모전에 낼 소설도 한 편 썼고, 졸업논문도 작성하느라 나름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원자력의 대언론 홍보 방안에 대한 논문을 작성해서 공모전에 응모했고, 성문화전시관 및 성교육/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그리고 라돈 방사능에 대하여 학부 졸업논문을 작성했다.
결론적으로 원자력논문 공모전에서는 우수상 (당해 최우수상은 없음)을 수상했고, 문예공모전은 탈락했으며 (전년도에 수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작품에 너무 욕심을 부렸을 수도 있다), 졸업논문은 사실 형식적이라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논문 쓰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자력논문 공모전 수상자들은 1박 2일로 영광원자력발전소 견학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미 그전 해에 영광에 갔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었고 특히 그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냥 관광여행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기분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숙소는 내장산이었나 속리산이었나, 어느 산에 있는 관광호텔이었는데 2인 1일이었다. 나와 한 방을 썼던 다른 수상자는 KAIST 학생이었는데 그때 좀 친해졌지만 이후로 연락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0여 년쯤 지나서 내 분야에서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정말 특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종종 서로 안부를 전하며 지낸다.
그렇게 나는 4학년 2학기도 거의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다. 나는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뜻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졸업 후 취업하기를 바라셨고, 어머니께선 내가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면 그러라고 하셨다. 대신 부모님께선 내게 대학원 등록금까지 지원해 주기는 어렵다고 하셨고, 이공계 대학원은 인건비나 장학혜택 등이 있어서 등록금 문제는 없을 거라고 설득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4학년 2학기, 12월 초쯤이었나, 모교 대학원 입시 특별전형이 있었다. 모교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생각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특히나 내가 가려던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석사과정에 두 명을 뽑을 예정이었으나 다섯 명이 지원했다. 나는 그 교수님에게도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그 연구실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만 교수님께서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면접을 보던 때, 과 교수님들께서는 내 성적을 보시고는 탐탁지 않아 하셨다. 특히 전공과목의 학점이 교양과목들에 비해 좋지 않았던 것과 이상한 교양 선택과목들 (타과 전공과목이기도 한 것들인데, 이전에도 얘기했던 생물학과나 신문방송학과 과목 등) 때문에 특히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심지어 어느 교수님께서는 '너 같은 학생은 우리 과에 필요 없어!'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나는 특별 전형에서 탈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마침 다른 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여자 동기가 자기 분야에서도 대학원생을 모집한다고, 혹시 관심 있는 사람은 와보라는 글을 학과 동기들 게시판에 남겼다. 전혀 새로운 분야였지만 그쪽 분야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동기에게 연락을 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의대에 소속된 대학원이자 연구소였으며, 교수님들도 수준이 높아 보였다. 의공학 및 의학물리학 분야가 전망도 좋아 보여서 동기의 조언에 따라 그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는데 나는 핵의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핵의학을 연구하시는 교수님은 T/O가 없어서 대신 방사선치료분야의 교수님의 지도학생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른 교수님으로 바꾸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교수님들과도 상의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대학원 특별전형에 내가 들어가려고 했던 교수님의 특별전형 석사과정 학생 T/O는 네 명인데 다섯 명이 지원했다. 한 명은 탈락해야 했는데 그게 나였다.
다른 진원자들은 서울대, KAIST 학생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보다는 스펙이 더 눈에 띄었을 수도 있겠다. 그 교수님께서는 탈락했어도 실망하지 말고 의학과 일반전형으로도 T/O가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일반전형은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입학시험 과목은 영어, 의학용어, 의공학 전공 기초과목 등이었다. 영어는 TOEFL 식이니 별 문제는 없었지만 의학용어는 워낙 생소했고, 의공학 전공 기초과목은 뭐가 나올지 몰랐는데 교수님들께서 어떤 분야를 공부하라고 가이드를 주셨다. 그렇게 갑자기 대학원 입시준비를 시작하게 됐다.
하필이면 그때가 4학년 2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기말고사 공부 및 입시공부까지 하느라 스트레스가 심했다. 하지만 목표가 있었고, 학부에서도 유종이 미를 거둔다는 의미가 있어서 그것마저도 좋았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원 일반 전형에 합격했고, 그 대학원에 입학하게 됐다. 또한 4학년 2학기 성적도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좋았기에 그래도 마무리는 잘 지은 것 같다.
하지만 모교 대학원에서 다소 난감한 상황이 있었다. 나는 면접 때 교수님들의 반응을 보고 탈락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학교 대학원의 입시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모교에서는 나를 대학원 입학 특별전형에 합격시켜 버렸다. 이에 교수님들 입장도 애매해졌는데, 내가 애초 가려던 연구실의 교수님은 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다른 연구실에 가라고 하셨다. 그것도 내가 가장 가고 싶지 않았던 연구실이었다.
어차피 나는 다른 학교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대학원 입학 포기 신청서를 제출하고 가지 않았다. 그게 모교 대학원 선배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하게 여겨졌었나 보다. 그 일은 그 뒤로도 몇 년 동안 나에 대한 안 좋은 인식으로 남게 되었는데, 이는 자세한 사정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후에 내 분야에서 만나게 된 선배들과는 오해를 풀 수 있었고 그 뒤로는 잘 지내고 있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12월 말부터 미리 대학원 연구실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이미 특별전형으로 합격한 동기들과 함께 스터디도 했는데 그들은 다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은 미국 등으로 유학을 가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진로를 어떻게 할 지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무언가 앞서 나가는 그들이 늘 부러웠다. 그러나 이는 나중의 이야기다.
2월의 졸업식 때 눈이 많이 내렸다. 이날에는 어머니께서만 참석하셨는데, 나는 식장에는 참석하지 않고 가운을 입고 사진만 찍었다. 1년 반 동안 상담을 해주셨던 선생님을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4년간 함께 했던 공대신문사 후배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들과 사진도 같이 찍었던 것 같은데 아마 필름이 날아가면서 인화를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졸업식의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졸업장과 기념품, 그리고 뜻하지 않게 '실무능력 및 품성 인증서'도 받았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 "언어구사와 컴퓨터 활용 능력이 우수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추었기에 이를 인증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국어, 영어, 컴퓨터 과목의 성적이 좋고, 사회봉사를 4학점 모두 이수하면 주는 건가 보다.
이렇게 나의 1990년대, 10년 간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의 삶도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렸다. 돌아보면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도 많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나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에필로그로 끝맺음을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