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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Mar 20. 2024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서문 _ 진화가 사실이라는 증거 자체

1. 그저 하나의 이론?

이론이란 무엇인가? 사실이란 무엇인가?


2. 개, 소, 그리고 양배추

플라톤의 마수 | 유전자풀 조각하기


3. 대진화의 꽃길

최초의 원예가였던 곤충들 | 당신은 나의 자연선택 | 인위선택과 자연선택, 그리고 쥐의 충치 저항력 | 다시, 개 이야기 | 다시, 꽃 이야기 | 선택 행위자로서의 자연


4. 침묵과 느린 시간

나이테시계 | 방사능시계 | 탄소시계


5. 바로 우리 눈앞에서

포드 므르차라의 도마뱀 | 실험실에서 벌어진 4만 5천 세대의 진화 | 23개월 만에 관찰된 거피들의 진화


6. 잃어버린 고리? 뭘 잃어버렸단 말인가

“악어오리를 보여주시지!” | “원숭이가 사람 아기를 낳는다면 믿겠어요” |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해로운 유산 | 바다에서 뭍으로 | 나, 다시 바다로 가리


7. 잃어버린 사람들? 다시 찾은 사람들

여전히 내가 짓궂게 바라는 것은…… | 일단 가서 보세요


8. 우리가 아홉 달 만에 스스로 해낸 일

안무가가 없는 춤 | 발생에 대한 비유들 | 세포들을 모형화하기 | 촉매계의 챔피언, 효소 | 그러면 벌레들이 먼저 시도해보리라


9. 대륙의 방주

새로운 종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 땅이 움직였을까?


10. 친척들의 계통수

뼈가 뼈로 다가가고 | 빌려오기 없음 | 갑각류, 단단한 외골력과 다채로운 부속들 | 다시 톰슨에게 컴퓨터가 있었다면? | 분자생물학적 비교 | 분자시계


11. 우리 몸에 쓰인 역사

한때 자랑스러웠던 날개들 | 뒤집힌 망막, 심각한 실수를 땜질하는 자연선택 | 지적이지 못한 설계


12. 무기경쟁과 진화적 신정론

자연은 설계된 경제인가, 진화된 경제인가? |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 | 진화적 신정론?


13.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자연의 전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 |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 “소수의 형태 혹은 하나의 형태에” | “행성이 고정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돌고 도는 동안” | “이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가 진화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록 _ 역사 부인주의자들

옮긴이의 말 _ 친절한 진화론 입문서, 명쾌한 창조론 반박서




진화생물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이기도 한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책들도 꾸준하게 집필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하면 <이기적 유전자>를 떠올리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고, 그 외에도 <눈먼 시계공>, <만들어진 신> 등 유신론과 창조론에 반박하는 책들을 썼고, 진화에 대해 좀 더 쉽게 알려주는 <마법의 비행>이나 조금 더 깊게 들어가는 <조상 이야기> 등의 책도 집필했다.


그러나 그가 여러 책을 집필하는 동안 진화의 증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책은 별로 없었는데 이 책 <지상 최대의 쇼>는 그동안 과학적으로 밝혀낸 진화의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도킨스의 책들은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편인데 (그러면서도 본인이 알고 있는 각종 지식들을 드러내 보이는) 이 책 또한 그러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통찰력이 돋보인다. 




서문과 1장에서는 도킨스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그동안 도킨스 책을 꽤 읽었는데 진화의 증거를 직접적으로 제시했던 책이 없었다는 건 몰랐다. 그의 책들이 다 진화를 증거를 다룬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도킨스 입장에서는 이 책의 집필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진화에 관한 책 중에 가장 중요한 퍼즐조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듯.


1장에서 <종의 기원> 얘기가 나왔는데 다윈이 그 책을 편찬하기 전까지 진화(특히 자연선택설)의 증거를 모으려고 정말 애를 많이 썼었고, 그래서 오래 걸리기도 했다. <종의 기원>을 보면 정말 지루하다 싶을 만큼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다윈 스스로도 그만큼의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인정받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듯한데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윈의 업적이 중요한 건 단지 그 책을 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의 증거를 갖춰서 진화를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당시로서는 정말 센세이셔널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종의 기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 되면 다시 리뷰하도록 하겠다.


하나의 이론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이론’이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자.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이론’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실제로는 더 많지만, 지금은 아래 두 가지만 관련이 있다).

 이론, 정의1 모종의 설명으로 제공된 어떤 사상들이나 진술들의 체계, 또는 일군의 사실들과 현상들에 대한 해설.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 또는 입증되었으며, 알려진 사실들을 잘 설명한다고 제안 또는 인정된 가설. 일반법칙, 원리, 알려지거나 관찰된 사실에 대한 원인으로 주장된 진술.     

이론, 정의2 모종의 설명으로 제안된 가설. 즉 가정, 추론, 추정. 무언가에 대한 하나의 사상 혹은 사상들의 집합. 개인적인 의견이나 견해.     

주지하다시피 두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진화 이론에 대한 문제에 한마디로 답하자면, 과학자들은 ‘정의1’의 뜻으로 이 단어를 쓰는 반면에, 창조론자들은 ‘정의2’의 뜻으로 쓴다(일부러 그럴 수도 있고 진심일 수도 있다).

‘정의1’의 좋은 사례는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태양중심설이다. 진화도 ‘정의1’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다윈의 진화론은 정말로 “어떤 사상들이나 진술들의 체계”다. 아주 방대한 “일군의 사실들과 현상들”을 해설한다.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확인 또는 입증된” 가설이고, 보편적인 지적 합의에 따라 “일반법칙, 원리, 알려지거나 관찰된 사실에 대한 원인으로 주장된 진술”로 여겨진다. 단순한 “가정, 추론, 추정”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과학자들과 창조론자들은 ‘이론’이라는 단어를 각각 몹시 상이한 두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진화는 태양중심설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의 이론이다. 두 사례를 ‘그저 하나의 이론’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저’라는 말을 빼야 한다.


도킨스는 '이론'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을, 과학계에서 얘기하는 이론과 반대파들이 얘기하는 이론이 왜 다른가를 보여주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또 억지 주장을 펼 것이다. 나 역시 과학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함을 느낀다. 과학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은 다른데도 믿음으로 과학을 부정하고 그것을 종교의 아래에 두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도 답답하다. 


하지만 과학에서도 그 엄밀함의 정도의 차이는 있는데 도킨스도 그 점을 분명하게 하고 싶어 한 듯하다. 나도 학문적으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 수학이고, 그다음으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 순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물리학보다는 생물학이 근거 수준이나 엄밀함은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리학도 점차 생물학만큼이나 가설과 상상의 영역이 더 많아지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 모두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가 없고 방법론이나 이론을 도출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기에 생물학에 수학만큼의 증명과 엄밀함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도킨스도 그 한계를 미리 설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증거를 보이고 증명하고자 했다. 그게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1장의 내용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다. 특히 용어를 정리하면서 혼선을 방지하려는 것도 효과적이었다. 




나는 종교에 대해서 이제는 무신론자이지만, 사실은 범신론에 더 가까운 입장이다. 스피노자의 입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도킨스의 경우에는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인데, 신이 있음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내외적으로 상당수의 문제들은 종교로 인해 발생한다. 인류의 문명이 지금까지 발전해 왔지만 그중 상당 부분은 종교에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종교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지금도 그렇다. 수 천년을 이어온 종교가 수 백 년 (본격적으로는 기껏해야 400년) 밖에 안 되는 과학에 의해 밀려날 것 같지 않고, 둘이 서로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한쪽은 가만히 있는데 (물론 극단적인 과학주의자들도 있지만) 위협을 느끼는 종교계가 강하게 반발하는 양상으로 보인다.


인간의 집단 이성이 이렇게 발전해도 종교가 오히려 더 발전하는 것을 보면 (신자도 늘고요. 특히 이슬람교와 유대교 신자가 느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일까. 아무튼 과학과 믿음의 영역이 다르다는 점을 부정하고 오로지 믿음만 강조하려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도킨스가 지적하려는 바가 그런 것이리라.


도킨스가 창조론이나 유신론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반대입장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게까지 강한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다. 전반적으로는 온건한 편이지만 가끔씩 창조론에 대한 반박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신> 등에 비해서는 매우 순한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2장에서부터는 진화에 대한 얘기로 들어간다. 그런데 진화 얘기를 하면서 플라톤식 본질주의 얘기를 하는 것이 정말 신박했다.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말이다. 역시 도킨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어에 따르면, 생물학도 나름의 본질주의에 시달려왔다. 생물학적 본질주의는 맥(貘), 토끼, 천산갑, 단봉낙타 등을 삼각형, 마름모, 포물선, 십이면체처럼 취급하는 시각이다. 우리가 보는 토끼는 이상적이고 본질적이고 플라톤적인 토끼의 창백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 완벽한 관념적 토끼는, 완벽한 기하학 도형들과 함께, 어딘가에 있을 관념의 공간에 존재한다. 피와 살을 지닌 토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변이는 이상적인 토끼의 본질에서 벗어난 흠이라고 간주된다.  속수무책으로 비진화적인 그림 아닌가! 플라톤주의자들이 볼 때, 토끼들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는 토끼적 본질로부터의 성가신 일탈이고, 언제나 그런 변화에 대한 저항이 있을 것이다. 모든 토끼가 투명하고 탄력적인 끈으로 천상의 본질적 토끼에 묶여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다.
진화적 생명관은 이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후손들은 선조 형태로부터 무한정 멀어질 수 있고, 멀어진 형태 또한 미래의 변이를 낳는 잠재적 선조가 된다. 다윈과 동시에, 그러나 독자적으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는 자신의 논문 제목을 ‘원형으로부터 무한정 멀어지며 다양화하는 경향에 관하여’라고 지었다.


그다음에 유전자풀 얘기와 육종을 통해 다양한 종을 만들어 내는 얘기. 이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도 계속 나왔던 얘기라 새삼스럽진 않은데, 특히 비둘기 얘기하니까 <종의 기원>에서 비둘기를 많이 다뤘던 것이 생각났다. 


생물의 지리적 분포도 역시 <종의 기원>에서 자세히 언급된 바가 있는데, 그러고 보면 다윈은 자신의 자연선택설 주장을 위해 정말 많은 것을 조사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멘델의 유전법칙을 몰랐던 점이나, 멘델도 자신의 이론의 중요성, 진화와의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나 이론적인 교류는 없었으나 접점이 생길 뻔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눈먼 시계공' 프로그램은 그가 <눈먼 시계공>에서부터 제시했던 이론적인 진화 프로그램인데 1970년대의 컴퓨터 그래픽 수준으로 구현한 것임에도 그 프로그램으로 나온 결과가 실제 생물과 유사한 것들이 많은 것도 놀라웠다. 자연이 특정 목적으로 설계한 것이 아니어도 우연히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시각적 사례였던 듯하다.


여담으로 수학적 최적화 알고리듬 중에 유전 알고리듬 (genetic algorithm)이 있는데 그 아이디어를 유전학에서 따왔다. 특히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이 적용된 것인데 2장 말미의 얘기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그것이 떠올랐다. 


과학이 만능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부정할 수는 없다. 종교계가 과학을 받아들이는 양상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는 계속 존재하겠지. 그런데 어느 날 한순간에 모든 인간들에게 종교라는 개념을 싹 사라지게 만든 다음에 내버려 두면 다시 지금과 같은 종교 체계가 생겨날까? 아마도 새로 생겨날 것 같고, 지금과 비슷하게 수렴진화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3장에서는 진화의 증거를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여러 가지 사례들이 나왔는데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은 좀 지루했지만 몰랐던 내용들도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다. 아무래도 도킨스가 그러한 증거나 사례들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것들을 일일이 다 알려주지는 못해도 최대한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2장에서 인간에 의한 인위선택(육종)을 설명했다면, 3장에서는 자연에서도 인위선택과 같은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뚜렷한 행위자가 없어도 자연선택은 일어난다. 그러한 자연선택은 생물 종의 진화적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다윈이 제시한 것들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밝혀진 것들도 포함해서. 그런데 쥐의 충치 저항력까지 연구되다니, 그런것까지도 연구하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과학 연구분야는 참 넓다. 여기에서는 trade-off 개념이 제시되는데 이것 또한 진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다. 어느 것을 위해서는 다른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 이득이 더 큰 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진화의 결과는 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벨라예프의 여우이야기(야생여우를 길들였더니 개와 비슷한 외형과 성격이 되었다는)는 너무 유명해서인지 지금까지 봤던 6~7권의 책에서 언급된 것 같다. 정말 중요한 실험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의심쩍기도 하다. 너무 극적인 결과가 아닐까? 


3장의 부제는 '대진화의 꽃길'인데 진화론이 꽃길만 걷게 하겠다는 듯이 보였다. 물론 그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지은 부제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 꽃길 자체가 진화의 장이 되었으니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꽃길이었으리라. 



4장에서는 내 전공인 핵물리학/방사능 얘기가 나오니 더 재밌었다. 이 책에서 이 얘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기에서는 진화의 시간을 세 개의 시계를 통해서 측정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 세 개의 시계는 나무의 나이테, 화석, 방사성 동위원소다. 


나이테로 연대를 측정하려고 겹쳐서 보는 건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지만 정말 긴 시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미처 몰라서 놀라웠다. 그리고 퇴적층에서는 화석을 통해 연대기 구분을 하지만 정확한 시간대까지는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창조론자들이 얘기하는 노아의 홍수 얘기와 도망치는 순서에 따라 화석이 만들어지려면 통계적 추세를 따라야 한다는 점은 도킨스의 통찰력이 보였다. 화석의 발견은 그렇게 단절될 수는 없기에. 


동위원소를 이용한 방법은 주로 광물에 대해서 하지만 C-14를 이용한 건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기도 하고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그로 인해 역사적인 것들이 많이 밝혀졌다. 그러면서 영점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 것이 그 영점이기 때문이다. C-14는 생물체에게만 가능한 특수한 경우이고, 그 덕분에 생물에 대해 정확히 연대 측정이 가능해졌다. 몇 가지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해서 연대 계산하는 것이 학부 때 시험문제로도 나왔던 기억이 난다. 


도킨스가 이런 내용들까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애썼다고 느껴졌다. 관련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 잘 아는 사람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설명.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5장 초반에서 코끼리 엄니 얘기할 때는 엄니 무게가 줄어드는 추세를 보면서 밀렵꾼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엄니 무게가 줄어드는 추세가 있을 거라는 얘기에 넘어갈 뻔했다. 그런데 도킨스가 그건 아닐 거라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러한 추정을 부정하는 것을 보고 그가 제대로 된 연구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나도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결과를 보면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생각했던 가설, 예상결과에 맞추고 싶은 유혹이 많이 든다. 아마 이런 데이터를 봤다면 이걸 어떻게든 잘 포장해서 논문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연구는 그런 식으로 나온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대체로 무의미하고 별다른 임팩트가 없는 것들이라 금방 잊히거나 혹은 금세 다른 연구들에 의해 반박되기도 한다.


도킨스가 렌스키의 연구를 설명할 때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렌스키의 연구는 엄청난 규모였고, 그것을 20여 년간이나 이어서 했다는 것이 상상 이상이다. 규모나 시간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에 있어서도 체계적이고 또 미래에 필요할 지도 모를 작업까지 (표본을 냉동해 두는) 해두었기에 거의 완벽한 연구였고, 중요한 결과들을 많이 이끌어냈던 듯하다.


처음 실험 설계할 때부터 20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가 될 걸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실험들이 꼼꼼하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해서 중간에 누락된 것들을 알고 다시 하느라 망치는 경우도 많다. 혹은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부족해지게 되는데 렌스키의 경우에는 그런 것들까지 다 고려돼서 더 놀라웠던 것이다. 게다가 운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 같다. 훌륭한 실험은 실력과 운이 같이 작용한다고 하지만.


엔들러의 거피 연구도 렌스키만큼은 아니지만 꽤 흥미로웠고, 포식압과 성선택에 의한 선택압의 변화 역시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되었다. 나도 거피를 비롯해서 열대어들을 키워봤지만 그냥 막연히 생각했던 (수컷은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더 화려하게 됐고, 암컷은 안 잡아먹히려고 수수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것들을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책에서는 군데군데 도킨스식 시니컬한 유머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에게 박테리아학자 자격요건 얘기하는 건 통쾌감을 주었다. 병원의 항생제 얘기도 그렇다.


렌스키는 슐래플리에게, 수고롭겠지만 논문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러고는 답변의 요지를 이렇게 밝혔다. 제일 좋은 데이터는 냉동된 배양균 형태로 보관되어 있고, 원칙적으로 누구든 그것을 조사해서 자신의 결론을 점검할 수 있다. 균을 취급할 자격이 되는 박테리아학자라면 누구에게나 기꺼이 표본을 보내겠지만, 자격 없는 사람의 손에서는 균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렌스키는 냉혹하리만치 꼬치꼬치 자격 요건을 늘어놓았다. 슐래플리가 우수하고 안전하게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통계·분석할 박테리아학자급 실력을 갖추지 못했음은 물론(그는 글쎄 과학자가 아니라 변호사란다), 렌스키의 말을 해독하기도 벅찰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 글을 읽으면, 렌스키가 얼마나 흥에 겨워 답장을 썼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6장에서는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공격할 때 주로 쓰는 케케묵은 수법인 '미싱 링크'에 대해서 경쾌하게 무시해 버렸다. 그런 거 없어도 진화론은 탄탄하게 증명되고 구축되어 있다고, 화석은 부가적일 뿐 그걸 빌미로 진화론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그런데 '미싱 링크 (missing link)'라는 용어는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화석기록의 빈틈 (gap in the fossil record)'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는데 어쨌거나 그 의미는 유사하다. 이는 이미 다윈의 시대부터 진화론에 대한 반박으로 내세우던 것이었지만 그러한 반박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나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도킨스가 '잃어버린 고리 같은 거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그래도 정 원한다면 예를 들어주마' 하며 제시했던 몇 가지 예시도 흥미로웠다. 특히나 최근의 발견들이었기에 내가 어릴 때 접하던 진화론과는 이제 수준 자체가 다르다. 특히 DNA나 분자화학적 증거가 많기 때문에 더 탄탄해지는 듯하다.


분기학 얘기할 때는 <자연에 이름 붙이기>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떠올랐는데, 분기학자들 사이에서도 계통을 놓고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 분류 체계와도 다르고, '종속과목강문계역'으로 분류되는 체계와도 다르니까. 아직은 절대적인 분류법이나 컨센서스는 없지만 그 또한 생물학이 발전하고 진화론이 더 확고한 체계를 갖추게 되면 같이 정립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왠지 거북 얘기도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뒷부분에서는 거북 얘기가 상당히 자세히 나와서 더 반갑고 재밌었다. 내가 거북을 좋아하고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거북에 대해서도 잘 아는 편이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니 또 흥미로웠다. 육지거북과 바다거북, 민물 수생거북들이 어떻게 갈라졌고 또 달라졌는가 하는 것도. 특히 육지거북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북들이 진화 역사에서 땅으로의 진출 과정을 두 번이나 밟았다는 것은 이제 충분한 증거로 거의 확인된 사실이다. 처음에 땅에 살았던 거북들이 그들의 어류 선조가 살았던 물 환경으로 돌아가서 바다거북이 되었다. 그 바다거북들이 다시 땅으로 올라와서 새로운 종류의 땅거북들로 재탄생했다. 그것이 땅거북과다. 이것은 사실이다. 혹은 거의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이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이 두 번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현대 거북을 낳은 과정이 아니라, 훨씬 이전 트라이아스기에 프로가노켈리스와 팔레오케르시스를 낳은 과정이 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연구를 해온 만큼 창조론자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지만, 사실 자신들의 이론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들도 많고 (편형동물 얘기도 그렇다) 대부분 진화론을 공격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설사 진화론이 틀렸다고 한들 창조론이 맞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등한 관계에 놓으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창조론이 살아남아 있는 건 종교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고, 아직도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그럴 가치도 있을까 싶다.




7장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동안 좀 정리가 안 되던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니고 계속 새로운 화석이 나오고 있어서 이론들이 계속 바뀔 가능성은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아니라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인 것처럼. 이와 관련해서는 <화석맨>을 추천한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한 창조론자 실존인물인 웬디... 그 사람에 대해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건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도킨스가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비꼬기 위해 과거의 일화를 보여준 것이었는데 창조론자의 무한반복 주장에 대해 도킨스 역시 일부러 상대방의 논리를 같은 방식으로 반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속 같은 말 반복하기. "박물관에 가보라고요." 그런데 진짜 박물관 한 번 안 가보고 주입된 내용만 반복하는 사람들도 많다. 각인효과도 아니고, 한 번 들은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종교계에서 그러하다.




8장은 진화론과는 조금 분야가 다른 것 같은 발생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발생학 역시 관심이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다. 평소에 의문을 갖고 있던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듯하다. 


DNA의 염기배열이 센트럴 도그마 과정을 통해 아미노산을 만들고, 아미노산이 단백일 일차구조부터 사 차 구조까지 만들어내지만 (그리고 각각의 단백질이 어떠한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지까지는 알 수 있지만) 그러한 단백질이 어떻게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지, 장기별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만들어지는지, 왜 특정 부위에서는 특정한 유전자만 작동하는지 등은 아직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이 책에서 도킨스도 그러한 것들에 대해 (현재까지 밝혀진) 얘기하지만 그도 아직은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대신,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예를 들어 apoptosis 같은 것의 역할을 너무 과장되게 해석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비유와 시뮬레이션 결과를 들어 보여주었다. 종이접기(오리가미)의 예도 흥미로웠고, 이를 세포의 종이 접기로 설명한 것도 이해가 좀 더 용이했던 듯하다.


또한 DNA가 인체의 청사진이라는 통상적 비유를 부정하고, 대신 조리법 (recipe)이라는 용어로 발생의 본질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의 전환을 통해 과학적 사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는데 나도 앞으론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을 해줘야겠다.


그러한 발생과정과 인체 구성을 총 지휘하는 어떤 지휘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러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고, 아무튼 복잡해 보이는 것도 국지적인 규칙에 의해 집단적, 통계적, 결과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내 분야와는 다르긴 하지만 나도 모델과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작은 규칙 하나가 거대 집합체에서는 목적성이 없었더라도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주도 그렇지만 지구, 진화도 시간의 힘이고, 수많은 우연의 반복이 이뤄낸 결과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러한 인지부조화가 여전히 진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창조론을 믿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박테리오파지(통상 파지라고 하는)는 고등학생 때 생물시간에 처음 배웠는데 교과서에서도 T4 파지가 나왔었다. 그 뒤에 학부 때 바이러스학을 배울 때 더 자세히 알게 됐지만 봐도 봐도 신기한 존재다. 다른 바이러스들도 그렇다. 그래서인가 바이러스들은 숙주로서는 달갑지 않은 존재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내적친밀감이 생긴다. ㅋ


그리고 예쁜꼬마선충의 세포 계보도도 흥미로웠고, 어떤 세포가 분화해서 그 기관이 되는지 밝혀진 것도 신기했다. 도킨스가 예쁜꼬마선충에 그렇게 애정을 가질만하다. 예쁜꼬마선충은 생물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생명체인데 관련해서 국내 연구진들이 쓴 <벌레의 마음>이라는 책도 있다. 


또한 진화발생생물학(Evo-devo)이라는 분야도 있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흥미로울 것 같다. 




9장은 '종의 분화'와 '대륙이동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종의 분화는 <종의 기원>에서도 나왔던 내용들이 많았다. 사실 <종의 기원>은 제목 그대로 종이 어떻게 생겨나고 분화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는 책이라 사실상 '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진화에 대한 얘기긴 하지만 생명체가 생겨나서 종까지 오게 되는 얘기는 아니다.


종을 분류하는 기준(마이어가 제안한)이 예전에는 두 개체가 교배해서 나온 자식이 생식능력을 가지는 경우, 즉 자손을 갖는 경우에 같은 종으로 봤다. 교배는 가능하더라도 그 자식이 생식능력이 없으면 같은 종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생식세포의 분열 시 감수분열이 안 되기 때문인데, 예로 노새, 타이온, 라이거 등은 인위적인 교배종이지만 독립적인 종으로 보지는 않는다. 반면 늑대와 개는 다른 종으로 분류하거나 혹은 개를 늑대의 아종으로 분류하지만 사실상은 같은 종이라 서로 교배가 가능하다.


그런데 예전에도 그 많은 종을 서로 교배를 시켜본 것이 아닐 텐데 어떻게 분류를 했을까? 린네가 시작한 그 분류법 상에 종을 넣기 위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명확한 종의 구분이 있어야 했을 텐데, 실제로 그때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종의 분류에 있어서는 잘못됐거나 혼란이 많은 듯하다. 같은 종 내에서도 외모나 특성이 너무 달라서 이게 같은 종인가 싶은 것들도 많고, 다른 종이어도 너무 비슷해서 구분이 어려운 경우도 있으니까. 


게다가 다른 종으로 분류되지만 교배가 가능하고, 그 하이브리드 자손이 생식능력을 갖는 경우도 있어서 생식능력만으로 종을 구분하는 건 명확하지는 못하고, 현재는 DNA 검사를 통해서 유전적인 유사성을 확인하여 종을 구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종의 분화를 설명하기 위해 '섬'의 개념을 재정의한 것은 필요한 설명이었다. 그게 지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격리된, 독립된 영역을 의미하는 것을 정의해 둬야 이해가 더 잘 되니까.


대륙이동설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줘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긴 했어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의미로 읽었다.


9장에서도 창조론과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특히 창조론에 대해서 왜 선택적 창조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안 된다는 것과 노아의 방주가 허구라는 걸 사람들이 왜 모르는지 답답해하는 것도 느껴졌다. 아무리 그가 거대한 망치를 들고 연약한 호두 한 알을 깬다고 얘기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거대한 망치로 내리쳐도 그 호두가 안 깨질 거라고 믿는 듯하다.


그래도 갈라파고스 제도에 영국인들 이름 붙인 지도를 보여주는 거나 비글호(다윈이 탔던 배는 아니고 이름만 같은)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가봤다고 자랑하는 걸 보면 그도 은근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은 있는 듯합니다. 아니, 그의 영국인 자부심은 익히 알려진 바 있긴 하다. 




10장은 여전히 흥미로웠지만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앞의 상동성, 골격의 유사성, 수렴진화 부분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다뤄졌던 내용이라 이해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뒤로 갈수록 그랬다.


게 변형이나 두개골 변형 같은 경우에는 나도 자주 쓰는 영상기법이라 친숙했다. 영상처리에서는 보통 변형벡터라고 하는데, 그러한 3차원 변형벡터필드를 이용하면 다른 이미지로 바꿀 수가 있다. 도킨스가 젊은 시절에는 그런 것도 구현하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할 수도 있다.


유전자 분석에서 침팬지와 사람의 유전자 일치성이 98%라는 걸 어떻게 분석했는가 알려주는 내용이 나왔는데 몰랐던 내용이라 너무 기발하고 신기했다. 유전자 분석에서는 PCR이나 NGS 정도만 알고 있었던 터라 더 그랬다. 호지킨의 법칙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막연히 알고 있던 것에 그런 법칙이 붙어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허락도 없이) ‘호지킨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직선의 기울기는 무어의 법칙보다 살짝 얕다. 무어의 법칙은 배가 시간이 2년이 좀 못 되는데, 이 법칙은 2년이 좀 더 된다. DNA 기술은 컴퓨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호지킨의 법칙이 부분적으로나마 무어의 법칙에 의존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오른쪽의 화살표들은 다양한 생물의 게놈 크기를 뜻한다. 화살표 하나를 연장해서 호지킨의 법칙 경사선과 만날 때까지 그어보면, 그만한 크기의 게놈을 1천 파운드(현재 가치로)에 서열 분석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될지 알 수 있다. 효모의 게놈만 한 규모라면 2020년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새로운 포유류의 게놈이라면(이런 어림셈에서는 모든 포유류의 분석 가격이 다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2040년쯤이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힐리스 도표(생물 3000종의 계보도)를 보면서도 '와, 이런 걸 생각하다니!' 싶었는데 그걸 등에 문신으로 새겼다니. 세상엔 정말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분자시계'리는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다윈'이라는 단위로 측정되는 그 시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현대 분자생물학의 시대가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J. B. S. 홀데인은 진화 속도의 측정 단위로 다윈(darwin)을 쓰자고 제안했다. 동물의 어떤 측정 가능한 속성이 진화 과정에서 한 방향으로만 변했다고 가정해 보자. 가령 다리의 평균 길이가 계속 증가했다고 가정하자. 100만 년 동안에 다리 길이가 e(2.718……, 수학적 편의를 위해 선택된 수지만,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만큼 증가했을 때, 그 진화 속도를 1 다윈이라고 한다. 홀데인은 말의 진화 속도를 약 40밀리 다윈으로 평가했다.

한편, 인위선택을 경험하는 가축들의 진화 속도는 킬로다윈 단위로 측정된다고 한다. 가령 포식자가 없는 하천으로 옮겨진 거피(5장에서 이야기했다)들의 진화 속도는 약 45킬로 다윈으로 측정되었다. 리굴라 같은 ‘살아 있는 화석’들의 진화는 마이크로다윈 수준으로 측정될 것이다. 요컨대, 동물의 다리나 부리처럼 우리가 보고 측정할 수 있는 대상들의 진화 속도는 대단히 편차가 크다.  진화 속도가 그처럼 변화무쌍하다면, 어떻게 그것을 시계로 쓸 수 있겠는가? 여기서 분자유전학이 구원의 손을 내민다. 첫눈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리 길이 같은 측정 가능한 특징들이 진화할 때, 우리는 근저의 유전적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표현형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리나 날개의 진화 속도가 좋은 시계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분자 수준의 변화 속도는 좋은 시계가 된단 말인가? 다리나 부리가 마이크로다윈에서 킬로다윈에 걸친 다양한 속도로 변화하는데, 어떻게 분자들은 더 믿음직한 시계가 된단 말인가?

해답은, 겉으로 드러나는 진화(다리나 팔 같은 결과물)를 낳는 유전적 변화들은 빙산의 아주 작은 일각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들은 다양한 수준의 자연선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부분이다. 나머지 분자 수준의 유전자 변화들은 사실 중립적이다. 그런 변화들은 유전자의 쓰임새에 구애받지 않고 나름의 속도로 진행될 것이고, 한 유전자 안에서는 속도가 대강 일정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런 중립적인 유전자 변화는 동물의 생존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이므로, 믿을 만한 시계의 자격이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라면 그 점을 반영해 달라진 속도로 진화할 테지만 말이다.


도킨스가 이 개념을 소개한 이유는 모든 시간 범위에서 진화적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어느 특성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역으로 추산할 수 있다.


방사능시계들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속도로 재깍거리고, 반감기가 몇 분의 일 초에서 수백억 년까지 광범위하듯이, 분자시계도 무수히 많은 유전자 덕분에 놀랍도록 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100만 년에서 10억 년까지, 그 사이의 모든 규모에서 벌어지는 진화적 변화를 잴 수 있다. 방사능 동위원소마다 특징적인 반감기가 있듯이, 유전자마다 특징적인 전환율이 있다. 전환율은 새로운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인 우연에 의해 고정되는 통상적인 속도를 말한다. 가령 히스톤 유전자들은 10억 년에 돌연변이 하나가 전환되는 속도로 고정된다. 섬유소펩티드 유전자들은 그보다 천 배 빨라서, 100만 년에 새 돌연변이 하나가 전환되는 속도다. 시토크롬 C와 헤모글로빈 유전자들의 전환율은 그 중간쯤 된다. 즉, 고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수백만 년이나 수천만 년쯤 된다.




11장에서는 생물이 기존에 있던 해부학적 구조를 어떻게 재활용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진화는 기관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설계 미스인 듯한 것들도 많이 보이고, 또 뒤집힌 눈처럼 기이한 것들도 있다. 그리고 퇴화되었거나 흔적만 남은 것들도 있다. 길이를 늘이고 우회해 가도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경제적이라는 점. 근데 그것도 어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웜뱃의 경우처럼 불완전해 보이거나 질병 혹은 사고에 취약한 구조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진화한 것이겠지. 진화상의 이점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진화와는 다르지만 (진화는 종 단위로 일어나니까), 아프리카의 인종들에게 많이 있는 겸상적혈구빈혈증도 그 자체로는 자연계에서 살아남는데 불리하지만 말라리아로부터 생존하는 데는 유리하다고 하니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유전적인 돌연변이 혹은 열성 유전자도 개체의 생존에 있어서는 더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수가 있어서 계속 남아 있게 되고, 그러한 식으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11장에서는 익히 알려진 것들도 있었지만 다소 해부학적 구조나 내용들이 나오다 보니 그림만 보고는 어떻게 되는지 언뜻 잘 생각이 안 되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림과 사진들이 도움이 되었다.




12장에서는 창조론적인 신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책 전반에서 무신론자적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던 도킨스가 12장에서는 창조론자들에게 보란 듯이 그러한 면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부록까지 봤더니 도킨스가 12장을 쓴 이유는 당연했던 것 같다. 진화의 증거가 그렇게 분명하고, 가설이 아닌 확고한 이론으로 정립되었음에도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 여전히 그렇게 많고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니까. 도킨스가 40년 넘게 진화론의 선봉장이자 무신론의 행동대장을 자처했음에도 아직 그런 상황이니 분노했을 수도.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의 신념은 내가 바꿀 수도 없고 그냥 저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을. 사실 창조론을 믿든 진화론을 믿든 세상 사는데 별 지장은 없지 않은가? 과학자 중에도 대다수는 종교인이기도 하고.




이제 마지막 13장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도킨스는 영구기관이나 열역학 제2법칙 얘기를 한다. 사실 그건 생물학자가 할 얘기가 아닌데 종교계에서 그걸 들이밀면서 하도 터무니없이 얘기를 하니 작정하고 얘기한 것 같다.


열역학 제2법칙, 소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닫힌계에 적용된다. 관건은 그 닫힌계를 어떻게 상정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일단 내 생각도 그렇지만 대체로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계로 본다. 그래서 지구나 태양계 단위로는 닫힌계로 볼 수도 없고, 개별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지구 단위에서 열역학 제2법칙 운운하는 건 말이 안 되고, 개별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체가 '음의 엔트로피'의 존재라고 했다가 그렇게 비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가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도킨스가 열역학 제2법칙 얘기를 계속 한 이유는 슈뢰딩거의 사례처럼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종교계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 공격을 해댄 것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을 수도 있을 듯하다.


13장에서는 다윈과 <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종의 기원> 초판에 대해서. 도킨스도 얘기했듯이, <종의 기원>은 초판이 가장 센세이셔널하고 임팩트가 있고, 이후부터는 다른 이들의 비판과 종교계의 비판에 못 이겨 (그러고 보면 다윈도 멘털이 그다지 강한 편은 아니다) 수정한 부분이 많아지게 된다.


그런데 <종의 기원>은 말 그대로 '종'이 어떻게 분화되었는가가 관심사다. 다윈은 처음에는 '진화'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고, 적자생존이라는 말도 쓰지 않았다. 최초에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얘기도 없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아주 어렴풋하게만 언급했었는데, 이중 일부가 이후 개정판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진화는 이미 다윈시기 이전부터 개념은 있었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다윈이 방대한 예시를 들어가며 보여준 것이고, 그것이 처음에는 다소 모호한 개념이었다가 그를 통해 구체화되고 메커니즘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기에 다윈에 이르러서야 진화는 비로소 과학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창조론자들의 주장도 그렇지만, 진화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오해하는 것이 인간이 진화의 최종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저 우연에 의해 분화된 한 종에 지나지 않고 진화는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 진화의 목표이자 최종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기준으로 놓고 이렇게 진화해왔다고 한다면 그것이 정말 엄청나게 말도 안 되는 확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건 확률이 아니라 그냥 무수한 우연의 결과일 뿐, 인간 자체에 의미를 둬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어떠한 질서에 의해, 혹은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도킨스가 하고 싶었던 얘기일 것이고, 이것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진화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인 셈이다.


13장은 소제목 자체가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인데,  이는 <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단의 오마주다. 참고로 <종의 기원> 초판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다. (다윈포럼 번역 인용)



수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고, 덤불에서 노래하는 새들과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곤충들 그리고 축축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로 가득 차 있는 뒤얽힌 둑(entangled bank)을 지긋이 관찰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또한 서로 너무나도 다르고,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는, 정교하게 구성된 이런 형태들이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법칙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법칙들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번식을 동반한 성장, 번식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대물림, 외부적 생활 조건의 직간접적인 작용과 사용 및 불용에 의한 가변성, 생존 투쟁을 초래하는 높은 개체 증가율, 자연선택의 결과로 나타난 형질 분기와 덜 개량된 형태들의 멸절을 포함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인 고등 동물은 이 법칙들의 직접적 결과물로서 자연의 전쟁 및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탄생한 것들이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최신 연구결과를 비롯하여 많은 진화의 증거를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진화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보여준다. 


중간중간에 컬러 삽화나 그림들이 있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제시한 증거들은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나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반대 측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도킨스가 이 책을 쓴 목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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