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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후기

한강 <검은 사슴>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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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결말 및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주의 바랍니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지명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다. 한강은 그동안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된 적이 거의 없어서 이례적이라는 말도 나왔다.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밝힌 수상 이유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다. 이는 한강의 작품 세계를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라 하겠다.


나도 한강의 작품을 좋아해서 2000년대 이후 출간된 작품들을 대부분 읽었지만, 그 이전에 출간된 초기 작품들은 아직 다 읽지 못했다. 10여 년 전에 처음 읽었던 『채식주의자』를 기점으로 해서 그 앞뒤로 발표된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읽어 나가는 중인데,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 감정 소모가 큰 편이라 절충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강의 작품은 언제부터 그러했을까 궁금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는 한강의 작품을 다 못 읽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작품을 다 읽었다)


한강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은 구매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표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목도, 표지도 검은 이 책 속에 담겨 있을 ‘어두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한강의 작품 세계를 논의한다면 이 작품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읽게 되었다.




「검은 사슴」은 1998년에 문학동네에서 처음 출간된 후 2017년에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되면서 한차례 개정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수정되었는지는 작가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다듬고, “조용히 덧붙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개정판의 내용이 초판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간주하여 2017년 출간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작품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갖고 있다. 인영과 명윤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갑자기 사라진 의선의 행방을 찾는다. 명윤은 의선이 황곡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인영에게 같이 갈 것을 요청하였다. 잡지사 기자인 인영은 내키지 않았지만, 황곡에 있는 탄광 사진작가인 ‘장(종욱)’을 인터뷰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같이 가기로 한다. 황곡에 도착한 인영과 명윤은 장을 만나 인터뷰를 하지만, 장은 비협조적이다. 그는 이미 기존의 사진과 필름을 화재로 모두 잃었으며, 더 이상 사진도 찍지 않고 ‘안’에게 빌붙어 근근이 살아가던 중이었다. 어렵사리 인터뷰를 마친 인영과 명윤은 우연히 의선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고, 오지인 어둔리 연골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의선이 왔다 갔다는 흔적만 발견할 뿐 끝내 의선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탔던 열차가 사고를 당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인영과 명윤도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그들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상이 이 작품의 플롯이다. 작품의 분량에 비해 플롯은 이처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이는 작품의 큰 줄기일 따름이다. 이 작품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 각각의 이야기가 굵은 가지를 이루어 뻗어 나가며, 작품의 서사를 더 깊게 만들고 틈을 메운다. 이는 한강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사를 밀고 나가는 힘 대신 주인공들의 감정과 독백, 무의식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대체로 그들의 과거에서 비롯되며, 과거에 속박되어 있어 현재 역시 그의 지배를 받는다. 과거의 기억은 가까운 과거부터 먼 과거까지 층위를 이루고 있으며, 의식부터 무의식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강은 그러한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장마다 시점이 바뀐다. 주로 인영 또는 명윤의 시점이지만, ‘장’이나 의선의 시점이기도 하다.


초반부에는 인영과 명윤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나온다. 그들은 왜 의선을 찾아야 했을까? 그들은 의선과 어떤 관계였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독자들은 인영과 명윤의 행적을 따라가지만, 그들이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 여정이 애초 명윤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외 다른 단서나 확신을 줄만 한 무언가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여정은 실패의 반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의선은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의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도 나중에 밝혀지지만, 의선은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본의 아니게 거짓을 꾸며낸 존재가 되었다. 명윤이나 인영은 단지 그것을 믿었을 따름이다.


서울에서 황곡으로, 더 오지인 월산, 어둔리, 연골까지 찾아가는 길은 더 거칠고 험난해졌고 아예 길도 사라졌다. 거기에 눈까지 내리면서 모든 것을 덮어 버린 절망의 상태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인영과 명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찾으려 한 것은 의선이나 영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의선은 작품 내에서 많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녀가 왜 대낮에 알몸으로 도로를 질주하였는가?’ 일 것이다. 더불어, ‘그녀가 왜 인영이 그동안 찍은 사진과 필름을 모두 불태웠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단순한 정신 이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작가는 의선이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으나, 그러한 것 치고는 개연성이 부족했다. 다분히 정상적이었던 한 인간이 현실을 견디다가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이 이해할 수 있게 그려지지는 못한 것이다. 의선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묘사를 반복할 뿐 그 이상의 단서는 주지 않다가 마지막에 “약초꽃 피는 때”에 가서야 모든 것을 숨 가쁘게 쏟아낸다.


하지만 의선을 통해 한강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게 된 모티프를 엿볼 수 있다. 의선은 육식을 싫어하며, 폐소공포증을 갖고 있다. 또한 햇빛에 대한 동경이 있으며, 그러한 의선을 명윤은 ‘식물과 같다’라고 느낀다. 의선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연골)에서 태어나 줄곧 어두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사회인이 되어 지낸 곳들 또한 어두웠다. 어두움은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분위기이며, 중간중간 빛과 대조를 이룬다. ‘검은색’은 그러한 대조를 더욱 극명하게 만들었으며, 후반부의 흰 눈은 검은색과 대비를 이룬다.


의선의 식물 모티프가 이후의 작품인 「내 여자의 열매」나 「채식주의자」에도 이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한강의 ‘자기 복제’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서사가 점점 더 구체화하고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는 차이도 있다.




한강의 작품에 대한 자기 복제 비판은 비단 특정한 소재에 국한하지 않는다. 한강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상처(상실감)를 갖고 있고, 그에 얽매여 있으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인영은 친언니가 제주도에서 배 전복 사고로 죽어 시체도 찾지 못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으며, 명윤은 고통스러운 가족사와 막내 누이가 습관적으로 가출하여 계속 찾아다닌 기억이 있다. 작중 현재 시점에서 명윤은 막내 누이를 찾지 못하고 포기한 상태로 나온다. 장의 경우에는 화재로 자신의 작품과 전 재산을 잃었고, 아내마저 서울로 도망갔다.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으며 빛을 동경한다. 이는 제목의 “검은 사슴”과 유사하다. ‘검은 사슴’은 작품에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을 의미하는데, 사슴처럼 생겼지만, 검은 털이 있고, 맹수와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들은 암석 틈에서 살며 햇빛을 보기를 갈망한다. 매몰된 광부들에게 나타난 검은 사슴은 그들에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지만, 광부들은 처음에는 검은 사슴을 두려워하다가 사슴의 뿔을 자르고, 이빨을 뽑아 그를 무력하게 만든 후 출구를 찾아간다. 하지만 정작 출구에 이르러서는 광부들은 검은 사슴이 못 나오도록 출구를 막아버리는데, 검은 사슴은 그렇게 죽어 가거나 혹은 운 좋게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햇빛에 곧 죽어 버린다는 것이다.


검은 사슴은 광부들, 특히 사고로 매몰된 광부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품 내 등장인물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어두운 동굴에 매몰되어 있으며, 밖으로 나가려 해도 나갈 수가 없다. 검은 사슴의 이야기는 각 인물에 의해 변주되어 같은 형상을 지녔지만,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한강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검은 사슴」의 경우에는 1990년대 후반 (정확하게는 1997년쯤으로 추정된다)의 폐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가상의 장소인 ‘황곡시’는 태백시 인근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 태백시도 1990년대 초반부터 탄광업이 쇠퇴하여 인구가 급감하였고, 도시는 활력을 잃게 되었다.


한강은 폐탄광촌이 갖는 상징성이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시공간 배경이 될 것이라는 점을 느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과 몰락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이 과정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무너져가는 것을 선명하게 그려내었다. ‘장’은 그러한 변화의 과정과 결과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인물이며, 그의 10여 년의 시간은 탄광촌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거기에 ‘임(영석)’ 역시 같은 상징성을 갖는 인물로 등장한다. 장의 서사에서 등장한 임이 의선의 부친이며, 인영과 명윤이 찾아다닌 또 다른 인물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는 독자만 알 수 있을 뿐 작중 인물들은 모른다. 하지만, 이 우연성은 임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놀랍지는 않다. 애초 ‘인영-명윤-의선-임-장’이라는 연결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IMF 체제’를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문장은 그러한 문제가 단지 폐탄광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게 하였는데, 작품이 쓰인 1997년경에는 그러한 것까지는 몰랐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작가가 나중에 덧붙인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에 바다 또한 상징성을 갖는다. 바다는 인영의 언니가 죽은 곳이자 의선이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의선이 바다에서 자살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작품 내에서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인영은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바다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그것은 죽음의 바다, 쓸쓸한 바다였다. 그래서 바다 역시 어두움의 세계였다. 의선은 바다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바다 사진에 빠져들었다가 이내 그것들을 불태워 버린다. 의선이 “이런 것은 좋지 않아요”라고 한 이유는 인영의 바다 사진에서 어두움과 상처, 절망감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의선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의선이 인영의 사진을 모두 불태운 일은 작품 내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의선과 인영 모두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인영이 그 사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게 되고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지만, 의선은 그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다에 침잠된 것이다.




단 4일간의 짧은 여행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인영은 열차 사고로 인해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열차 사고는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인영과 명윤이 죽음의 순간을 지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극한의 경험’이며, 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인영과 명윤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비록 의선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만났고 그로부터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명윤은 자신이 계속 찾아다니던 막내 누이를 우연히 찾을 수 있었다.


인영이 다시 돌아온 집은 ‘빛의 공간’이었다. 이 빛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인영은 비로소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의선은 그 빛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나중에 인영을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그 빛이야말로 한강이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작품 내 인물들과 공간에 대한 설정은 다소 과한 감이 있다. 첫 장편소설이니만큼 내용적, 형식적 일치성을 추구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과유불급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점은 이후의 소설에서는 점차 다듬어져서 한두 명의 인물에게 집적되도록 하였으나 그 무게감은 비슷하게 느껴진다.





한강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자기 글쓰기의 원동력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작품이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작가는 질문을 던지는 연약한 존재”라고 하였는데, “질문을 던질 뿐 답을 알려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답은 결국 독자가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실존주의와도 연결된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우리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어둠의 의미지, 상처 입은 개인들의 모습은 초기 작품집인 『여수의 사랑』부터 최근작까지 일관성을 보였다. 이는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에서도 잘 나타나며, 그의 작품 세계의 원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이후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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