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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후기

윤대녕 <반달>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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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은 1988년 단편 「원(圓)」으로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등단한 이후 현재까지 꾸준하게 장편•단편 소설을 발표하고 있으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첫 번째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을 비롯해서 현재까지 여덟 편의 소설집을 발표하였다.


2014년에 출판사 ‘문학동네’에서는 한국문학전집을 구성하면서, 기존에 발표되었던 윤대녕의 중•단편 작품 중 아홉 편을 선별하여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펴냈다. 작품 제목 및 최초 수록된 작품집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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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수록된 작품은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0년간 발표된 대표작들이며, 발표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어 그의 중•단편 작품 세계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표제작 「반달」은 이 소설집에 처음 수록된 것이다.




윤대녕의 작품 세계는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 감수성, 예술가 주인공, 존재의 근원 탐구, 도시 문화의 감각적 수용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집에서도 잘 나타났다. 이러한 특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우선 그의 섬세한 문장 표현과 묘사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과 장면의 묘사뿐만 아니라 인물의 대사도 마치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였으며, 시각화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작품 내에서 주로 색채와 명암의 대비로 나타났지만, 후각적 효과도 적절히 가미함으로써 시에서의 공감각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도시 문화의 감각적 수용이라는 측면도 포함된다. 이러한 시적, 서정적인 문체는 그의 작품을 더욱 정제하며, 미학을 추구하는 그의 경향을 볼 수 있다.


각 작품에서 묘사되는 도시, 특히 서울은 복잡하면서도 권태롭고, 바쁘게 돌아가면서도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도시는 윤대녕의 주제 의식을 가장 잘 발현할 수 있는 곳이지만, 도시 이외에도 섬, 특정 지방 등도 그러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주제 의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소들을 적절하게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상당수가 예술가라는 측면은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상춘곡」, 「찔레꽃 기념관」, 「대설주의보」 등에서 나타난다. 「지나가는 자의 초상」의 주인공의 직업이 사서라는 것은 예술가와는 거리가 있지만,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크게는 예술가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 예술가들은 현실적이며,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지 못한다. 그들은 생활을 위해 통속적인 일도 마다할 수 없으며, 지질한 소시민적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인물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의 근원 탐구’라는 측면은 실존주의로 볼 수도 있다. 수록작들의 인물들은 대체로 불완전하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다. 불완전했던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기도 한다. 대다수는 관계로 인한 상처에 기인한다.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에서 주인공을 비롯하여 세 명의 등장인물은 느닷없이 미아리로 점을 보러 간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여러 곳으로 이동하거나 떠돌기도 하는데, 이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한 이동•여정•방랑은 자의적이기도 하고 타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또는 현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공통적으로는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변화하기도 한다. 이는 각 인물이 가진 상실, 부재, 결핍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며,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적인 요소가 추가되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특히 불교적인 소재가 많이 나타난다. 아울러 선운사(「상춘곡」), 백담사(「대설주의보」) 등 절이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에서의 점집은 사찰은 아니지만, 유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소재가 상징적으로 쓰인 것 외에도 작품 전반에서 불교 철학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인연, 업, 윤회 사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주로 인물 간의 대화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그들이 추구하거나 벗어나고자 갈망하는 것인 동시에 작가의 사상을 대변하면서도 실존적 의미 탐구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수록작에서는 이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내용 면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긋난 애정 관계다.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과 「빛의 걸음걸이」, 「찔레꽃 기념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러한 애정 관계가 나타나는데, 이는 주인공의 경험이거나 혹은 제삼자 (예를 들어 「탱자」에서의 큰 고모)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대체로 과거형이다. 과거의 일들은 작품 내에서 액자식 구조를 이루거나 혹은 현재의 일들과 병렬식으로 구성되어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의 기억이나 생각을 따라가는 방식이 많이 나타났다.


아울러 대부분의 작품에서 가족의 서사가 등장하거나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그러한 서사가 없더라도 가족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이기도 하고, 결혼을 통해 만들어진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혼을 통해 만들어진 관계는 앞서 언급했던 ‘어긋난 애정 관계’와 엮인다. 심지어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에서는 한 여자를 두고 삼촌과 조카가 삼각관계의 구도를 이루기도 한다. 이는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만, 윤대녕은 이를 과감하게 소재로 썼다. 각 작품 내에서 가족의 서사 역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주변 인물, 즉 다른 가족 구성원을 통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전통적 가치의 부정과 가부장적 질서의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주인공과 가족 간의 갈등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갈등의 표출을 통해 당대 여성들이 겪은 문제들을 그려낸 것이다. 더욱이 집이라는 장소가 갖는 구속성과 가족 관계에서 구속성은 작품의 긴장감을 높이고 갈등을 증폭하는 역할을 한다.


각 작품의 주인공 또는 화자는 대체로 작품 내 시점(시간)에서 작가의 나이와 유사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아마도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며, 후일담의 성격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 그러한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경험이 얼마나 반영되었느냐는 것이 아니라, 설사 그것이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하고 구체화했느냐는 점이다. 윤대녕은 우리 사회의 문제, 개개인의 문제, 그리고 인간관계의 문제의 해법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에서 끄집어 내려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특정한 사건에 집중하거나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것을 지속해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작품 내에서 무언가 사건이 빠르게 진행된다기보다는 느리게 흘러가거나 혹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는 그의 작품이 대체로 과거의 일들을 회상 형식으로 다루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말도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이후의 이야기를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더욱이 그는 작품 내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한 틀을 만들어 놓고 작품을 쓰는 듯하다. 이 ‘틀’은 앞에서 언급했던 그의 특징들이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그만의 독특함이다. 그래서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독자가 몰입할 수 있게 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매 작품의 초반부에서는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엽서나 편지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고, 어떠한 서사가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문장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소설가로서 작품을 쓸 때 첫 문장을 어떻게 쓰느냐가 가장 중요한데 윤대녕은 그러한 방식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가장 의외이자 인상 깊었던 작품은 표제작인 「반달」이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최근작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의 종합 상자 같기도 하면서도 이전의 작품과는 다소 결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퀴어’를 다루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비록 그가 동성애 요소를 소극적으로 도입했지만, 이는 실존주의 문제를 더 확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동요 <반달>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면서 작품의 구성도 가사에 맞추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1~2절의 가사에서 인용한 것을 소제목으로 하고 있다. ‘반달’은 불완전한 모양의 달이며, 주인공의 결핍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서 ‘반달’을 보거나 느꼈던 여러 순간을 회상하는데, 이는 그의 삶의 중요한 지점을 통과하는 의례이기도 했고, 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마지막 부분의 소제목은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인데, 이는 <반달>의 2절 마지막 부분의 가사이다. 방황하던 그가 만난 한 여성이 ‘샛별’로서 그를 구원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듯 윤대녕의 주제 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확장되고 깊어짐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완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대녕은 1990년대 한국 문학계의 변화를 도모하였으며, 기존 한국 문학에서 자주 다루어지지 못했던 실존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풀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반달』 수록작들을 통해 보았듯 그의 중•단편 소설은 스토리보다는 주제와 분위기에 더 집중하고 있으며, 인간관계의 문제를 통찰력 있게 다루고 있다. 작품 내에서는 등장인물의 기억과 여정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서사를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개연성을 상실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특히 그의 작품에서 과거의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방랑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랑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작품 특징이 그를 1990년대~2000년대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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