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실재하는가?

물리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묻는 존재의 의미

by 칼란드리아
이 세상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허상에 불과한가?


최근 나는 이러한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 물리학을 파고들다 보면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양자역학적 세계관에서는 더욱 그렇다. 원자의 내부는 텅 비어 있고, 입자들은 관측되기 전까지 확정된 위치를 갖지 않는다. 우리가 '단단하다'라고 느끼는 감촉조차 사실은 전기적 반발력이 뇌에 전달되는 신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영화 '매트릭스' 속 세계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까?


이러한 물음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답을 찾기 위한 시도이지만, 결론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른다. 그저 떠오른 생각들의 집합일 따름이다.




먼저 물리학의 관점에서 시작해 본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물질'을 보고, 만지고, 느낀다. 그런데 '물질'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당혹스러워하거나 의아해할 것이다. '물질' 또는 '물체'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물질이라 부르는 것은 손에 잡히고, 공간을 차지하며, 무게가 있는 것이다. 이는 뉴턴의 고전역학적 관점이다. 질량을 가진 단단한 덩어리, 힘을 가하면 움직이는 것. 직관적이고 명쾌하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에 이르러 물질에 대한 기존 개념이 무너졌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유명한 공식 E=mc²를 통해 "물질과 에너지는 같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물질은 '에너지가 뭉쳐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 물질이 사라진다는 것은 ('흩어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에너지가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물질은 단단한 것도 아니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양자역학, 특히 양자장론에 이르면 설명은 한층 더 모호해진다. 양자장론에 따르면 우주 전체에는 '장(field)'이 깔려 있다. 전자기장, 힉스장 등 수많은 에너지 장들이 우주를 가득 채운다. 우리가 '입자'라 부르는 것은 그 장이 에너지를 받아 들뜨거나 출렁이는 상태다. 입자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장의 일시적 진동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며, 장이 연속적이기에 입자 역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은 '물건'이 아니라 '사건'이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미시 세계의 입자들은 관측자의 눈길이 닿기 전까지 '확률의 구름'으로 존재한다. 이 또한 물질이 확정된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리학자들은 입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이를 페르미온(물질 입자)과 보존(매개 입자)으로 구분했다. 페르미온은 물질을 구성하고, 보존은 힘을 매개한다. 페르미온은 '파울리 배타 원리'에 따라 두 입자가 동시에 같은 상태를 점유할 수 없다. 이 원리 덕분에 물질은 서로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며, 부피와 형태를 갖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원자 내부는 99.9% 이상 텅 비어 있다. 우리가 '단단함'이라 믿었던 촉감은 입자와 입자가 맞닿은 것이 아니라, 전자기장 사이의 전기적 반발력이 뇌에 전달한 추상적인 신호일뿐이다.


현재 물리학적 해석에 따르면 '질량'조차 힉스장과 입자의 '상호작용(결합)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물질'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과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현대물리학의 표준모형은 힘과 에너지의 근원을 물질 그 자체가 아닌, 우주의 '게이지 대칭성(Gauge Symmetry)'을 유지하려는 수학적 질서에서 찾는다. 그리고 여러 보존 법칙은 그 조건이자 결과가 된다. 이는 '시간 평행이동 대칭성'에서 유도되며, 에미 뇌터(Emmy Noether)가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학의 모든 보존 법칙이 자연의 어떤 연속적인 대칭성과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물리 법칙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대칭성(시간 평행이동 대칭성)은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이어지고,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대칭성(공간 평행이동 대칭성)은 운동량 보존 법칙으로 이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는 우주가 시간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힘은 에너지가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기울기'에서 나타난다. 대칭이 깨지는 곳에서 힘이 발생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결국 대칭이 깨지는 현상이다.


우주의 네 가지 근본적인 힘—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은 우주 탄생 직후 하나의 통합된 힘으로 존재했다가, 우주가 팽창하며 식어감에 따라 '자발적 대칭성 깨짐(Symmetry Breaking)'을 통해 분화되었다는 가설이 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던 하나의 근원 에너지가 식어가면서 네 갈래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힘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 이론적으로도 실험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았다.


특히 중력은 다른 힘들과 달리, 질량과 에너지가 시공간 자체를 휘게 만드는 기하학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이를 설명한다. 중력은 다른 힘들과 성질이 전혀 달라 통합이 가장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힘의 근원적 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력 역시 '존재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은 어떨까? 우리는 누구나 시간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에서 시간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한쪽에서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으며, 물리적으로는 오직 '엔트로피'의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시간은 물리적 실체 없는 관념이라는 것이다. 주로 양자역학과 열역학의 관점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반면 상대성이론을 제시한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실체의 한 축으로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한 '시간 지연(Time Dilation)'—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만들 때 시간의 흐름도 함께 변한다는 현상—은 시간이 단순한 관념이 아님을 보여 주는 증거다.


최근의 이론물리학 일부에서는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방정식으로 알려진 '휠러-드윗 방정식(Wheeler-DeWitt equation)'에서 시간 변수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가설도 제시된다. '휠러-드윗 방정식'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시도인 양자 중력 이론의 초기 방정식 중 하나이다.


이 방정식의 가장 큰 특징이자 난제는 방정식에 '시간(t)' 변수가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우주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기술할 수 없게 되는데, 이를 '시간의 문제(Problem of Time)'라고 부른다. 결국 '시간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시간은 시공간의 한 축이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뇌 안에서 작동하는 관념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한 것 같다. 시간뿐 아니라 물리적인 모든 것의 실체가 결국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허상에 불과한가?'라는 의문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리학이 세상을 에너지와 장으로 환원할 때, 우리는 자칫 허무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에너지의 요동이나 대칭의 깨짐으로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 역시 그러한 것에 불과한 걸까? 물리학자이자 의과학자로서 나는 오랫동안 이 물음의 답을 찾아왔다. 그리고 최근에 그에 가장 근접한 답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 같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 3부작 중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읽으면서 힌트를 얻었다. 독일의 철학자인 그는 이 책에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도발적으로 들리는 이 선언의 의미는 "모든 것을 담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틀로서의 '세계'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떤 것은 그 정의상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다.


어찌 보면 세계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물리학의 이론들도 결국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가브리엘도 물리학의 이러한 한계를 비판한다. 다만 물리학의 설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신실재론에서 '물질은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실재한다'이다. 다만 그것은 "의미라는 장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에너지의 상태"로서 실재한다. 이는 물리학적 해석과 의미장의 해석을 모두 포괄한다. 어느 하나의 유일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도 물리 법칙에 종속될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관념'이라 부르는 것도 실체 없는 환상일 필요가 없다. 어찌 보면 '조건과 맥락에 따라 구분해서 보자'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인 셈이다.


그 핵심은 '의미장(Sinnfeld, Field of Sense)'이다. 가브리엘은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장 안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존재를 '물리적 실체'가 아닌 '관계와 맥락'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를 다시 정의하자면, 세계는 모든 의미장의 총집합이 될 터인데—바로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언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어느 면에서는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독일어 원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파악했으니 일단 따라가 본다.


물리학적으로 세상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책상'이라는 물체도 그 흐름 속에서 나타난 하나의 '사건'이다. 하지만 일상의 의미장 안에서 책상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느껴지는, 실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실재한다'라고 할 수 있다.


'실재'의 개념은 관념도 포함한다. 수학이라는 의미장 안에서 숫자는 물리적 실체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과 감정 역시 의미장 안에서 실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브리엘은 계속해서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의미이며, 의미가 부여된 것은 실재한다. 설사 물리적 실체가 없더라도 의미는 부여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인 것도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입자 덩어리 중 하나인 타인에게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물질을 넘어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답을 얻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이며, 그리고 '관계'라는 것이다.




물리학자 중에서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카를로 로벨리다. 그 역시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루프 양자 중력 이론'을 제시하여 리 스몰린과 함께 이 분야를 이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빼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물리학 대중서를 다수 출간했지만, 다루는 분야가 워낙 복잡하고 어렵다 보니 쉽게 다가서기는 쉽지 않다. 또한 두 사람은 시간을 보는 관점과 양자역학의 해석에서 차이를 보인다.


로벨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입장이며,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해체하려 한다. 그는 양자역학도 '관계적'으로 해석한다. 이미 1990년대 중후반부터 그런 주장을 펼쳐왔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찰자의 개입 없이는 확정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찰 이전의 입자는 모든 가능성이 중첩된 파동함수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측하는 순간 무한한 가능성이 하나의 확정된 상태로 '붕괴(Collapse)'한다.


반면 로벨리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물리적 대상은 독립적인 속성을 갖지 않으며, 오직 다른 대상과 상호작용할 때만 속성이 나타난다." 즉, 관찰자는 불필요하다. 관찰 대상은 다른 물리계와 관계를 맺을 때만 물리적 상태를 가지며, 관계가 없다면 아무런 속성도 가지지 못한다. '파동함수의 붕괴'는 물리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관계를 맺은 계(系) 사이에서만 일어날 뿐, 그 외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중첩 상태가 유지된다.


로벨리에게 우주는 무수히 많은 양자적 사건들의 네트워크이며, 시간은 그 사건들 사이의 인과 관계를 우리가 거시적으로 읽어낸 '부수적 현상'이다. 실재는 '관계의 그물망(스핀 네트워크)'이고, 그 그물망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루프'이다. 연결이 사라지면 공간도 사라진다. 네트워크의 선(관계)이 없다면 점(존재)도 존재할 수 없다. 존재보다 연결, 즉 장과 네트워크가 더 근본적인 것이다.


로벨리의 저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이러한 생각을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한 책이다. 최근작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도 같은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후자는 산문집에 가까우며, 그의 생각을 여러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간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의 주장 일부에는 동의하지만, 상당수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의 주장이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보다는 '무엇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라는 주관적 판단이 중요해진다.


가브리엘의 관점에서 가치는 "어떤 의미장이 현재 나의 존재를 더 풍요롭고 진실하게 설명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물리학적으로는 내 아이의 웃음과 길가의 돌멩이 모두 에너지장의 요동일 뿐이지만, '사랑과 가족'이라는 의미장 안에서 아이의 웃음은 절대적인 무게를 지닌다. 물리학적 에너지는 우리 삶의 하부 구조를 이루지만, '사랑'과 '창조'라는 의미장은 우리 삶의 상부 구조를 지탱한다. 가치의 우선순위는 '무엇이 더 물질적인가'가 아니라, '어떤 의미장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더 깊이 설명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나의 세 번째 답이 나온다. 그것은 '가치'다. 그런데 가치는 어떻게 부여되는가? 누가, 어떻게 가치를 매길 수 있는가? 가치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주관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 모두 중요한 것인가?


'의미'나 '관계'에 비해 '가치'는 객관화하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의미와 관계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 그리고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가치이다.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에서 유물론과 구성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유물론은 물리학적 개념들을 포함하는데, 물리학 외의 의미장들을 하위 현상으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한다고 그는 본다. 반면 구성주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가브리엘에게 '관찰'이란 새로운 실재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무수한 의미장 중 하나에 참여하는 행위다.


구성주의는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구성한 이미지 체계만을 본다"라고 주장한다. 미술로 치면 인상주의에 가깝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물론은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외부에 객관적 실체가 있다는 믿음은 세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이 객관적 실체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가브리엘은 유물론과 구성주의 모두 각각의 의미장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일 뿐이며, 다만 어떤 의미장에서 관찰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라고 보았다.


'장(Field)'은 네트워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리학에서의 장이든, 신실재론에서의 의미장이든 결국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관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얻는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불교의 연기설(緣起說)과 맞닿는다. 관계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엮인 그물이 '인드라 망'이며, 이는 루프 양자 중력 이론의 스핀 네트워크 개념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 그물 속에서의 떨림이 서로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불교는 여러 면에서 물리학과 유사성을 갖는다. (도교 사상 역시 물리학과 접점이 있다) 불교 교리 중 특히 주목할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많이 알려진 말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색(물질)은 공(비어 있음)이나, 공은 허무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품은 잠재적 '장'이다.


이를 물리학적으로 풀면 물질(색)은 에너지(공)와 등가라는 말과 같다. 물리학에서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없다'라는 의미다. 비어 있어도 에너지는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공이어도 에너지가 가해지면 입자가 생길 수 있다. 실제로 양자 진공 상태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무수히 발생한다. 우리가 관측하지 못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실재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다시 말해, 완전한 '무(無)'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는 오래된 철학적 주제인데, 논리적으로는 '무'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려 더 이상 '무'가 아니다. 가브리엘의 주장대로라면 '무'라는 개념이 철학적 사유라는 의미장 안에 나타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대상으로서 실재하게 된다.


절대적 허무로서의 무는 불가능하다. 오직 '어떤 것이 없는 상태'로서의 상대적 무, 혹은 모든 가능성을 품은 존재의 배경만이 실재할 뿐이다. 허상이라는 것조차 결국은 실재한다.




이렇게 나는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을 의미, 관계, 가치로 보았다. 그 중심은 당연히 '나'가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중심은 그 자신이며, 인간이든 생명체든 무생물이든 마찬가지다. 설사 입자나 에너지의 파동으로 환원되더라도 그 중심점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그 중심점으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사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확률을 따져보면 거의 0에 수렴한다. 우주의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는 나를 중심으로 한 계산에 불과하다. 우주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일 따름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확률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은 그렇게 될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런데 우연이 모이면 필연이 될 수도 있을까? 통계적으로도, 물리학적으로도 어떤 값으로 수렴하거나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무작위성 속에서도 경향성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의 대칭성이 깨지면서 나타나는 결과, 즉 '힘' 때문일 수도 있다. 그 힘이 세상을 움직인다. 어쩌면 인류는 그 힘에 '신'이라는 존재를 부여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가 쌓아온 모든 것을 허무주의로 돌리지 않으려면, 이 역시 의미와 가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모든 분야는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며,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 된다. 과학, 예술, 철학, 종교, 그 밖의 모든 학문은 그러한 집대성의 산물이며, 인류의 문명은 그 결과물이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배타적일 수 없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 각각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은 어떤 근원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들을 바탕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 따름이다. 물리학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과 '어떻게'이지, '왜'가 아니다. '왜'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철학이거나 종교다.


하지만 그 답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과학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가 중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의 이 고민도 그럴 것이다. 그렇더라도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유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고유한 의미장을 형성한다.


결국 이는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에 가치를 둘 것이냐의 문제다. 안타깝게도 그 상대적 차이가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이 단지 타인의 문제만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타자화'는 불가능하다. 나를 타인이나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물리학적 '장'이든, 신실재론의 '의미장'이든, 불교의 '인드라 망'이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더 강한 힘이 그물망 안으로 잡아당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허상에 불과한가?


이 물음을 처음 던진 것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더 정확하게는 유물론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허상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적 에너지의 장인 동시에, 철학적·예술적·종교적으로 의미를 갖는 장이다.


설사 물리학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텅 빈 진공 안에서조차 에너지의 요동이 있다. 그 요동들이 맺는 관계는 실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도 실재한다. 이 세계는, 우주는 에너지가 흐르는 '장'인 동시에, 의미가 직조되는 '장'이다.


그러나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다. 관계를 유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대상을 관찰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나의 삶은 그러한 과정의 연속이며, 그 서사가 나를 만든다.


다만 이 세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 '실재한다'는 것도 순간적일 따름이며, 그 자체로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변화하는 순간마다 세상이 존재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시간을 아무리 잘게 쪼개더라도, 시공간적 연속성은 유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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