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이 건네준 고요한 시간
내가 사는 동네에는 신호등이 없다. 횡단보도는 있지만, 그뿐이다. 대신 원형으로 된 회전교차로(roundabout)가 있어 길들이 둥글게 흩어진다.
초록불이 켜지면 걷고, 빨간불이 켜지면 멈추는, 정해진 순환의 질서. 하지만 이곳에는 불빛이 길을 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혼란은 없고, 오히려 더 단정한 질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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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앞에서, 원형 교차로 앞에서 모두 잠시 멈춘다. 사람이 먼저, 상대의 길이 먼저. 그것은 규칙이라기보다 습관처럼 배어 있다.
횡단보도 저 멀리 걸어오는 이를 위해, 차들은 멀리서부터 속도를 늦춘다. 그 앞에 기꺼이 시간을 둔다. 자전거를 탄 아이에게도, 걸음이 더딘 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빨간불이 없어도 멈추고, 초록불이 없어도 내어주는 풍경.
원형교차로를 빠져나가며, 돌아나가며, 다시 되돌며 문득 생각한다. 어느 길로 빠져야 할지 몰라, 몇 번을 뱅글뱅글 도는 게 지금의 내 시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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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누군가를 재촉하는 빵빵 소리 대신, 고요히 멈추는 시간이 배려가 된다. 직선만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돌아나가거나 되돌 수 있는 길. 머뭇거리다 몇 번을 뱅글뱅글 돌아도 괜찮은 길. 중요한 건, 어느 길로 빠져나가든 그 길을 마주할 용기다.
길 위에 묻어 있는 이 다정한 질서처럼, 지금의 내 시간도 그렇게 용기를 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