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 - 그래.

다른 언어, 같은 고개 끄덕임

by 슬로하라


한국어처럼 익숙한 말 한마디가,
반가움과 궁금증을 동시에 불러냈다.



지나가던 두 아저씨의 대화 틈에서 들린 짧은 대답, "Gre!"

흔쾌히 그러나 쿨하게 튀어나온 듯한 그 소리가 내 귀에는 한국어 "그래!"처럼 들렸다.


'간다?'라는 뜻일까.

동사 원형은 iti(to go, 가다)인데, 현재형으로 쓰일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단어다. 그중 하나가 바로 gre, 3인칭 단수형태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직역하면 '그/그녀/그것이 간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gre는 단순히 기본적인 뜻을 넘어서, 실제 대화 속에서는 훨씬 더 넓게 쓰이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소리가 비슷해 신기하다고만 여겼는데, 공부하던 교재에서 문맥 속 쓰임을 접하며 더 넓은 의미를 알게 됐다.


Gre. ― 된다, 진행된다, 괜찮다, 그렇게 잘 흘러간다.

상황이 흘러가는 과정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했다.


누군가 "Kako gre?"(잘 지내?)라고 물으면

짧게 "Gre."(잘 돼, 괜찮아) 하고 대답할 수 있다.

"Ali gre?"(그거 돼?)라는 물음에도

"Gre."(돼, 가능해)라는 대답처럼 자연스럽다.


나는 긴 문장 앞에서는 자주 멈칫한다.

동사의 활용이 꼬이고, 격변화가 어지럽게 따라붙는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은 뒤엉키고, 마음도 움츠러든다.


그런데 짧은 한마디 "Gre."는 복잡한 설명 없이도 대화가 흘러갈 수 있다는 단순한 힘이었다.

영어로 치면 "That’s fine." / "It works." / "Okay." 정도의 담백한 느낌을 품고 있던 것이다.


상황을 긍정하고, 흐름을 수락하는 짧은 호흡.

정말로 "그래."와 닮아 있었다.


한국어의 "그래."도 그렇다.

어떤 말에는 동의로, 어떤 상황에는 수락으로, 때로는 체념 섞인 긍정으로. 짧지만 그 안에 수많은 뉘앙스를 품는다.


낯선 언어 속에서도 닮은 말을 만났다는 건 작은 위로였다.

요즘 이런 겹침을 귀에 담는다.


어떤 말은 소리는 익숙하지만 뜻이 다르거나 반대다.

'Ja.'는 발음이 한국어 [야]처럼 들리지만, 뜻은 'Yes / 응'이라는 긍정이다.

'Ne.'는 더 극적이다. 소리는 한국어 [네]와 거의 같지만, 뜻은 오히려 'No / 아니'라는 부정이다.

익숙한 소리가 정반대의 다른 의미로 다가오니, 처음엔 그때마다 웃음이 났다.


어떤 말은 뜻으로 닮았다.

'Tako.' '그래, 그렇지.' 혹은 '맞아'처럼, 동의와 맞장구의 표현이다.

'Dobro.' '좋아.'라는 수락과 긍정짧은 반응이다.

언어는 다르지만, 한국어의 짧은 반응과 겹쳐서 한층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말이 훨씬 많다.

어쩌면 언어란 다르면서도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그래. / Gre."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에 이어지는 건 아닐까.


내가 이곳에서 쓰는 짧은 단어들이 언젠가는 내 언어처럼 몸에 붙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는 순간이, 낯선 언어를 조금씩 내 언어로 당겨오는 힘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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