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문장 연습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by 슬로하라


이곳의 미안함은 사과가 아니라, 여백으로 건네진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외운 말 중 하나가 "Žal mi je."였다.
미안합니다.


언어를 잘 몰라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을 때
가장 먼저 꺼낼 수 있는 말.
그건 한국에서 오래 몸에 밴 예의이자, 관계의 기본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는 그 문장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종종 실수를 했다.


마트 계산대에서 동전을 헷갈려 내기도 하고,
지나가다 무심코 어깨를 부딪히거나,
지도를 찾다 길을 막을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급하게 영어로라도 그 미안함을 내뱉곤 했다.


그들은 대개 이렇게 말했다.
"V redu." 괜찮아요.
혹은 "Ni problema." 문제없어요.


미안함을 전할 틈조차 없이,
그들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상황을 부드럽게 덮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굳이 밝히지 않았다.


사과를 주고받기보다
상황을 조용히 덮어두는 편을 택한다.
그건 냉정함이 아니라,
작은 실수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나는 그 평온함이 처음엔 낯설었다.


한국에서라면, "괜찮아요"보다 "죄송해요"가 먼저였다.
누군가의 기분을 상할까, 불편한 공기가 생길까,
그 예상만으로도 말 앞에 붙이는 공식 같은 거였다.


그건 관계를 지키기 위한 예의이자,
관계의 균형을 지켜내고 마음의 거리를 조율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가끔, 그 반대의 자리에 서기도 했다.


막연히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거나,
내 요청의 의도와 다른 상대방의 실수로 불편해진 순간에도
때로는 "Oprostite." 또는 "V redu."라며
괜찮다는 말을 나에게 건네듯, 스스로에게도 말했다.


처음엔 조금 뻔뻔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그건 무심함이 아니라,
작은 일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걸.


'괜찮아요'가 먼저였고, '상황을 무르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틈을 조용히 덮을 줄 아는,
그런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언어는 단어보다 태도였다.


사소한 실수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대화는 빠르게 부드러워지고,
상황은 자연스러운 제자리를 찾는다.
그 안에는 작은 일들을 문제로 삼지 않으려는
느긋한 리듬이 있었다.


사과보다 평정을, 정확함보다 여백을 택했다.
그건 감정의 절제가 아니라,
서로의 실수를 허락하는 문화였다.


나는 그 여백이 허용된 분위기에서 배운다.
사과가 없어도 관계는 이어진다는 것,
말이 없을수록 마음이 명확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히려 서로를 더 편하게 만든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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