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속도와 길을 배우는 시간
짧은 단어들이 이곳의 삶의 리듬과 방향을 알려준다.
길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해안길 난간 등에서,
간혹 마주하는 단어가 있다.
POZOR [포조르]
굵고 선명한 서체.
아래 작은 글씨들은 어떤 내용인지 온전히 알지 못해도
그 자리에서 필요한 말이라는 건 단어 하나로 충분히 짐작됐다.
'조심(주의)'를 알리는 문구였다.
주차장을 들어서는 곳에서도,
나가는 길목에서도 역시 마주하는 단어가 있다.
PARKIRIŠČE [파키리쉬체] 주차장
VHOD [우호드] (사람용) 입구, VHOZ (차량용) 입구
IZHOD [이즈호드] (사람용) 출구, IZVOZ (차량용) 출구
동선을 안내하는 표지판 같은 단어들이다.
운전을 하다 보면
또 다른 표지판에도 눈이 머문다.
둥근 테두리 안에 적힌 속도 제한 숫자들,
혹은 그 옆이나 아래에 간단히 붙어 있는 말들.
(VI) VOZITE [뷔 보지테]
조심해서 적절한 속도 내에서 운전하라는 뜻이었다.
지나치는 표지판들이 알려준 건
길의 상태보다 오히려 나의 속도였다.
길 위에서 내 속도를 분명히 붙잡아 주는,
그 이상의 속도를 내지 말라는 짧은 권유의 말이었다.
길이 막힌 곳을 지날 때면
또 다른 단어들이 나를 멈춰 세운다.
OBVOZ [오브보즈] 우회
ZAPORA CESTE [자포라 체스테] 통행 제한 구간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지금은 지나갈 수 없는 길인지
짧은 단어 몇 개가 분명하게 알려준다.
또 길 위를 달리다 보면
앞차와 거리를 두라는 단어들도 보인다.
Upoštevaj varnostno razdaljo!
[우포스테바이 바르노스트나 라즈달뇨]
'안전거리를 지키라'는 짧고 분명한 지시.
부드러운 권유를 벗어나,
지금의 속도와 간격을 정확히 확인하라는 단호한 말이다.
길 위 곳곳의 표지판의 단어들은
이렇듯 한 번 더 바라보게 한다.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이지만,
나의 움직임과 마음의 폭을 함께 조절해 주는 듯하다.
짧은 단어 몇 개로도 이곳에서의 삶의 속도와 방향을
하나씩 읽어 가는 중임을 알게 된다.
눈에 스쳐 지나가는 말들 속에서,
이곳의 길과 나의 하루가 조금씩 익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