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작년 말부터 올해 중순까지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일해 오던 프로젝트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직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말로만 듣던 번아웃이 찾아왔다. 나같이 일을 좋아하는 인간은 일이 많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해야 할 일을 누군가한테 뺏겼을 때 번아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매일 들어가야 하는 미팅은 말 그대로 지옥 같았고, 작은 말들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하나하나 다 싫었고 믿었던 리더마저 나를 버린 듯했다. 매일 밤엔 이유 없이 눈물이 줄줄 났고 앞으로 이 일을 몇 년이고 더 할 자신이 아예 없었다. 결국 한 달 휴가를 내고 집에 누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일을 안 하니 마음이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문제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고 더 단단하게 마음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내 머릿속엔 두 가지 선택지가 둥둥 떠다녔다. 그만두고 내 사업을 시작해 보기 vs 대충 시키는 것만 하며 월급루팡. 문제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이 고민을 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번아웃이 이렇게 무서운 건지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겪어보기 전엔 정말 상상조차 못 했다.
일단 마음이 힘든 상황에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싶지가 않았고, 회사 내에서 다른 팀으로 옮기는 옵션을 선택했다. 팀 이동도 쉽진 않았지만 운 좋게 옆팀으로 빠르게 옮길 수 있었고, 팀을 옮긴 지 한 달이 조금 넘어간다.
이 시간 동안 혀를 깨물며 겨우 버텼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는 마음을 주워 담으며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자기 계발 도서 + 커리어 조언 글들을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제 조금은 나아진 걸까?
새로운 팀은 따뜻하고 친절했다.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재촉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 번아웃도 곧 끝이 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번아웃은 치유되는 성질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하자 또 예전의 상처가 툭 하고 터져 나왔다. 또 숨으려 하고 도망치고 싶어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는 나를 보게 되었다.
번아웃으로 상처가 난 마음은 영원히 피가 멎지 않고 줄줄 흘러내리는 건 아닐지 무섭다. 언젠가 피가 멎고 딱지가 생기고 아물더라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흉터가남을 것만 같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이런 상처들에 무뎌지며 그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자존감을 지켜나가는 과정일까.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매일 버텨나가는 우리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오늘도 수고했고 내일도 무사히 지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