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영화는(어벤져스 엔드게임같은) 누구보다 빠르게 본 후에 (유료 시사회도 놓치고 심야 영화로 본 거지만) 후기를 남겨야 한다. 보는 내내 들었던 놀란 영화의 특색이라고 할 만 한 지점들이 몇개 느껴져서 그것부터 적어보겠다.
첫번째 관람은 4DX로, 두번째는 아이맥스로 한번 더 보고, 아마 관람이 몇회 더 필요할 지 모르겠는데, 뭐 2D레이저로 두어번 더 보면 많이 본게 아닐까... 그래도 아이맥스로 보고나서 3회차 보러가기 전에는 놀란의 다른 영화들을 시간 순으로 한번 쭉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 종이를 반 접듯 중간 지점이 존재하는데, 관객들이 가장 혼란을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이는 메멘토에서부터 드러난 특징인데, 메멘토에서도 기억의 파편들이 모이다가 기억의 파편을 전부 붙여서 모자이크상을 만든 장면부터 선명한 사진이 되는 끝까지, 관객들에게 숙제를 안겨준다. 영화 상에서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짜맞춰서 이후 장면들을 해석해야 하는지라는 숙제를.
역시 프레스티지에서도, 복제기계를 만든 순간이 중간에 나타났을 때 관객은 놀라기 시작한다. 과연 이 이후를 마술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사기라고 해야 할까...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에서는 배트맨과 조커의 중후반부 긴 싸움, 하비 덴트의 희생까지가 그 지점이다.
인셉션에서는 더 깊이 내려가야한다고, 밖에서 세운 꿈의 계획을 꿈 안에서 세우고, 더 깊고 깊은 꿈을 넘어서 무의식까지 가기로 결심한 시점이 있고, 인터스텔라에서는 닥터 만을 만났을 때가 되지 않을까.
2. 연장선상으로, 처음과 끝은 항상 같은 장면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맨 처음 장면에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힌트가 제공되어 있거나 첫 장면이 결말의 시점, 또는 결말 이후의 시점이다.
메멘토에서도 이야기를 다 알면 재미없지 않냐고 묻는 주인공의 질문이 있고, 프레스티지에서도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최고의 마술사의 공간이동을 보여주고, 배트맨 트릴로지 역시 영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영웅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부조리를 겪고 그걸 극복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장면이 있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대놓고, 맨 첫 장면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시점 이후의 인터뷰라는걸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놀란 감독이 얼마나 교묘하냐면, 첫 장면을 통해 결말을 다 알려주면서도, 중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서 그 결말을 잊은 채로 푹 몰입하고 보게 만드는 재능이 아주 특출나다는 것이다.
3. 인터스텔라에 이어서 또 한번, 문과는 이해 못 할 영화를 만들어놨냐는 비판을 받을 것 같다.
참 재미있게도 놀란 감독은 5년마다 이런 데칼코마니 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소재만 달라질 뿐 그의 수법은 위에서 얘기한 요소를 그대로 플롯에 활용한다.
00년 메멘토, 06년 프레스티지, 10년 인셉션, 15년 인터스텔라, 그리고 20년의 테넷.
각각의 소재는 기억, 착각, 꿈, 우주(시공간), 시간이다. 그리고 공통점은, 저 소재를 사용해서 항상 뭔가를 훔쳐내거나 막아내려고 한다는 것.
인터스텔라에 대해서는 그래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서 조금이나마 피부로 와닿을 수 있겠지만, 이번 테넷의 경우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 당장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의 시간여행 법칙을 이해 못 하고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영화는 오죽할까.
공간이라는 물리적 3차원에 시간축을 더한 인터스텔라보다(그렇기 때문에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을 병치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는 결국 크게 보면 중력의 영향이 아닌가, 공간-질량체가 중력을 받는다는게 당연한 만큼, 대학물리 수준에서 시간을 정의하는 빛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나오니까) 훨씬 더 추상적이고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시간축은 한개밖에 없고, 심지어 그걸 단순히 이동한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달리 한다는 개념이 테넷에서 얘기하는 인버젼아닌가.
인버젼을 만나 이후에서 겪게 되는 공기의 흐름, 중력의 방향, 열전달의 방향 모두 엔트로피의 역행이라고 설명하는데, 바로 이 부분부터 문과생들이 어려워 할 법한다. 그렇다고 이과생에게도 익숙한 내용이 절대 아니다... 열역학을 학부 3학년 4학년이 되도록 다루는 과가 물리학과, 화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 신소재공학과 정도 되려나. 심지어 메인 커리큘럼에 있지도 않고, 온도와 압력과 에너지를 다루지 엔트로피는 정말.
4. 그래서 사실 열역학 베이스가 없는 관객에게 어렵긴 하겠지만, 쉽게 말하자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와해 세력과 구원 세력이 자꾸 충돌하는데,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종종 나온다. 그에 대한 답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은 하지만... 나도 그 답을 듣고서 도대체 그래서 어쩌라는거지? 라고, 인셉션을 봤을때보다 훨씬더 심각한 정도의 인지적 불쾌함이 느껴졌달까.
언젠가 인터스텔라에 대해, 이 영화가 크리스찬의 엄청난 간증의 결과라는 유튜브 리뷰를 본 적이 있다.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도 안 나고, 신학적인 의미에서 논리가 상당하다는 기억만 남아있는데, 오늘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리뷰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만큼의 이해도 해석도 못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사들을 생각해보면 물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들이 잔뜩 들어가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굉장히 신앙적으로 해석될 말들이 많지 않나...
5. 음악에 대해서는, 어 이상하다, 이 영화도 역시 한스 짐머가 했을 거라고 마냥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이상했다.
한스 짐머가 보여주는 특이한 선율은 없고, 기존에 존재하는 음악을 샘플링을 해서 덩케르크에서처럼, 인셉션에서처럼 길게 늘어뜨려서 이게 소음인지 음악인지 모르다가 음악이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수법을 쓰지도 않았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에서처럼 느린 세박자 템포의 신비롭고 성찰적이며 명상적인 특징도 드러나지 않아서, 중간쯤 되서 이거 한스 짐머가 안했나봐,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테넷도 기본적으로 수사물의 플롯이 있는데, 초반 수사가 진행되면서 나오는 고음 현 리듬위에 깔리는 저음 현과 저음 금관의 멜로디가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의 음악과 너무 비슷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음악이 한스 짐머가 아니었다는 걸 집에 와서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런 음악을 써달라고 한 건 놀란 감독의 지시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
+ 그래서 이 음악은 루드비히 고란손이라는 스웨덴 영화음악 작곡가가 했다는데, 왜 익숙한가 했더니 18년에 블랙 팬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고, 그 작품의 감독인 라이언 쿠글러가 다른 영화 음악도 그에게 맡겼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영화 감독과 음악 감독의 콤비에 대해서는 또 여러 멋진 사례들이 있고 할 말도 많은 부분인데, 또다른 좋은 작곡가를 알게 되서 흥미롭다.
++ 한스 짐머는 어디 갔느냐?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하는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듄의 음악에 전념해야 해서, 놀란 감독의 콜에 응하지 않았다는 간단한 코멘터리를 발견했다. 찾아보니 이 영화도 캐스팅이 아주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화려하다. 거의 모든 배우들이 어디선가 주연, 1조연 하던 조합이다... 이 영화도 굉장히 화제가 커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개봉한 테넷과 곧 개봉할 원더우먼 1984가 헐리우드 영화 산업의 코로나 위기에 어떤 성적표를 내고, 어떤 방향을 제시할 지에 대한 시험지가 될 거라서... 국내 언론도 아직 그 영화에 대해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고 있는 듯 하다.
6. 다시 돌아오면, 놀란 감독의 테넷은 그냥 어쩌다 이번엔 새로운 걸 한 번 해볼까, 라는 생각에서 나온 영화가 아니라 10년, 20년 전부터 분명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봐야지, 라고 생각해서 발전시켜 온 결과물 중 하나인 것 같다. 퍼즐 조각을 맞추며 윤곽이 드러났을 때 그를 되짚어 가는 것은 메멘토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고, 맨 처음에 강렬하게 나타난 훅-이야기의 실마리를 던지는 것은 다크나이트의 첫 장면 조커의 은행털이와 같고, 복잡하고 난해한 물리학적 이론을 녹여내어서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서사를 영화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인터스텔라와 인셉션에서 보여주지 않았나. 덩케르크에서는 전혀 관련없는 타임 스케일과 공간을 각각의 시점에서 진행시키다가 한 곳에 응집시켜서 클라이막스를 자아내고, 육해공에 걸맞는 시간의 흐름과 액션을 보여준다.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은 3-5번씩은 봤고,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와 인셉션은 20번씩은 본 것 같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테넷이 그의 이전 필모그래피의 집대성인지, 아니면 테넷처럼 미래에 만든 영화들이 이미 과거의 영화에 쓰여있었는지를 한번 확인해봐야겠다는 열망이 생겼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인데, 과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한 것일까, 일어난 일이 일어났다고 알려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