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일상]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가볍게 5k만 뛰자고 나갔다가 20k 뛰고 왔습니다.
평일에는 보통 5k 뛰고 주말에는 10k를 뛰곤 합니다. 허나 매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즘 꽤 피곤한지라, 오늘 주말이긴 하지만 5k만 설렁설렁 뛰고 오자고 나섰습니다. 나간 시간이 아침 7시네요.
속도를 높이진 않았습니다. 오늘의 페이스 기분은 ‘설렁설렁’이니까요. 괜찮은 컨디션에서의 페이스는 1k에 6분 정도 달리는 속도입니다. 오늘은 7분 페이스로 시작했습니다. 계속 되뇌네요. 7분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요 다리라는 놈이 제멋대로 속도를 높이곤 합니다.
달리기가 그렇습니다. 천천히 달리면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평일에는 출근 준비로 바쁜지라 속도를 조금 높여서 달리기 효율을 높이곤 합니다. 오늘은 여유로운 주말이지만 앞서 얘기한대로 피곤한 몸에 과함은 독일 듯하니 적당히 달리려 합니다.
집에서 강변까지 골목길을 지나갑니다. 강변 달리기 길까지는 1k 가량 가야 합니다. 아침 기온은 20도 정도. 달리기에 딱 좋은 온도네요.
이럼 안 되는데. 몸이 가볍습니다. 분명 피곤했는데. 천천히 달리니 몸에 무리가 안가니 더욱 그런 기분이 드나 봅니다. 주변도 천천히 둘러보며 달리니 맛도 나네요.
강변으로 들어서자 1k가 지났습니다. 지난 두어 달 강변 따라 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다 마무리가 됐습니다. 아직 아스팔트 냄새가 남아 있지만 달리기는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지난 한달 여간 점심 저녁 약속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대만에서는 신년회를 춘주(春酒)라 표현하는데 1~3월에 집중적으로 많은 기업들이 이런 모임을 합니다. 작게는 10~20명, 크게는 수백 명 단위의 모임 행사를 합니다. 이때 술도 어지간히 먹습니다.
신년회 춘주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섞여서 진행되는 또 다른 연례행사로 웨이야(尾牙)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굳이 해석하자면 송년회입니다. 송년회야 당연히 12월에 해야 하건만 설날 전후까지 하다 보니 신년회 춘주와 송년회 웨이야가 섞여서 2~3월이 지나갑니다. 송년회 웨이야에서 술이 빠질 리는 없구요. 대만 고량주, 위스키, 맥주, 와인이 한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모습도 많고, 한국 연관 기업이라 한다면 소주 등도 함께 올라와 있곤 합니다.
2~3월이 유난히 분주한 데는 춘주와 웨이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신구 지사장 교체가 3월말에 있다 보니 환송회도 빼곡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아침 달리기를 빼먹지 않으려 애 썼네요. 허나 피곤에는 장사 없습니다. 하루 이틀 거르는 날이 있었고 뛰는 날에도 5k를 겨우 채우는 경우가 생기네요. 이러니 하루 패턴이 다소 어그러지곤 했습니다.
강가 따라 2k, 3k 지나갑니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힘들지가 않아요. 5k를 뛰자면 2~3k 지점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제가 달리는 코스는 갔다가 돌아오는 루트입니다. 그래서 일단 달리면 반환점까지의 거리에 곱하기 2를 하면 총 달리는 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돌아올 걸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무리를 하게 되니까요.
허나 달리기 맛이 나쁘지 않으니 부러 돌아올 걸 망각했습니다. 머 적당히 하다 ‘돌아가야겠다’ 생각하겠지 싶었습니다.
웬걸, 보통 10k를 뛰자면 가곤 하는, 5k 반환지점까지 달려‘버렸습니다.’ 이날 따라 유난히 꽃향기도 코 끝에 살랑입니다. 기분이 내킵니다. 더 내딛습니다. 총 거리 13k 달리자면 돌아서는 중간 지점 6~7k에 있는 간이 매점이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도 멈춰지지 않습니다. 페이스 타임은 초반의 7분에서 오히려 6분 40초대로 줄어들었습니다.
간이 매점을 지나가면 이제 완연히 도심이 아니라 전원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공간으로 변신합니다. 한쪽에는 강폭이 툭 하고 넓어지고 다른 한쪽에는 멀리는 양명산이 보이고 논밭이 자리 합니다. 논밭에는 무언가 모종이 촘촘히 심어져 있네요.
돌아올 걸 생각 못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슬슬 돌아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단수이를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관두라는 지역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럼 이제 10k 가까이 뛰었다는 징표입니다.
애플워치가 10k 뛰었다고 알려줍니다. 고민 없이 돌아섭니다. 중간까지가 10k를 넘어서는 것은 아직 제게 미지의 세계입니다. 돌아올 걸 생각 안했다곤 하지만 오늘이 미지의 세계로 들어설 시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무념무상이 된다거나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순간이 온다고도 하는데 사실 저는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달리면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달리기의 효능은 제게 무념무상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스트레스 받고 자신 없는 상황들이, 달리면서 생각하게 되면 ‘머 그까이거 되겠지’, ‘충분히 가능하겠는데?’란 생각으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이번 달리면서도 그런 효능을 많이 느끼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자 다시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10~13k 지점의 넓은 강폭을 지나 간이 매점 앞까지 왔습니다. 매점 앞의 잔디밭에는 자전거 동호회 사람 몇 몇이 몸을 풀고 있습니다. 엉덩이도 두드리고 허리도 돌리고 있네요. 조만간 자전거도 한 대 사려 하는데 흘낏 어떤 자전거를 타고 있는지 봅니다.
이제 보통 10k 달리면 반환하던 5k 지점까지 왔습니다. 그곳까지 왔다는 것은 오늘 달린 거리로는 15k를 달린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13k 넘어서니 슬슬 다리 내딛는 게 처음만 못합니다. 그래도 아직 1k 스플릿 단위 시간이 6분대입니다.
어제 금요일 저녁에도 약속이 있어 늦게 집에 와서는 애플워치를 충전 안했더니 16k 지나면서 워치가 꺼졌습니다. 이제 ‘깜깜이 구간’에 들어섰네요. 17k부터는 구간 시간을 잴 수 없지만 잴 필요는 없습니다. 걷고 뛰고를 반복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드디어 집 근처입니다. 처음 1k 구간의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19k 구간인 셈이지요. 이렇게 다시 한번 20k를 뛰었습니다. 올해 들어 두 번째 20k 완주입니다. 지난해까진 20k 뛰어 본 적 없으니 머 인생에서의 두 번째 20k인 셈입니다.
돌아올 걸 생각 못하고 안하는 것도 간혹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두 번째 20k를 뛰었으니까요. 지난 한 두 달 고생한 몸에게 건강한 선물을 준 듯합니다. 헉헉 대고 있지만 개운한 기분은 덤입니다. 돌아온 시간은 9시 반입니다.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