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소소한 일상]
우산장수, 양산장수 이야기 다들 아시지요? 옛날에 우산을 파는 아들과 양산을 파는 아들, 이렇게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비 오는 날에는 양산장수 아들이, 맑은 하늘의 날에는 우산장수 아들이 걱정이 되었지요. 걱정이 마를 날이 없는 셈입니다.
이에 어느 사람이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이 많이 팔리니 우산장수 아들에게 좋고, 맑은 날에는 양산이 많이 팔리니 양산장수 아들에게 좋은 것 아니겠어요? 했다지요. 그제야 어머니의 염려와 걱정이 사그라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상황에서 종종 인용되곤 합니다. 대체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매우 좋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정신과 신체를 망치는 정도가 아니라면 적당한 걱정은 오히려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위 이야기의 어머니에 적용해 본다면 걱정하는 게 무슨 득이 되겠냐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걱정하면서 마음을 써주다 보면 의도치 않더라도 내가 계속 건재해서 걱정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동안의 한국 휴가를 마치고 다시 대만에 돌아온 지도 벌써 2주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참 더디게 간다 싶은데 일주일이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 보면 시간보다 빠른 게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는 일주일 동안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고 돌아와 2주의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저 우산장수와 양산장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지금 어머니의 살아가는 힘의 5할 이상은 저렇게 자식을 염려하는 ‘걱정’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어머니의 ‘걱정’은 다양하면서도 반복적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영양제는 챙겨 먹니? 네가 그렇게 약한 것은 초유를 못 먹어서 그래, 그러니 영양제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저 약하지 않습니다. 제 덩치를 보고 약하다 하면 아마 눈이 동그라질 거에요.)
공항버스 타러 미리 나가라. 그러다 놓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버스 시간 1시간 전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지금 나가야 하지 않니? (지금 나가면 길에서 30분 기다려야 한다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3~4번 되풀이해서 걱정하시니 도리가 없습니다. 약간 부아가 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걱정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인지.
(그런데 어머니 걱정을 간혹 새겨들어야 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실은 이날 공항버스 타러 나갔다가 아차 싶었는데요. 예전 같으면 그 시간 그 공항버스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날 보니 십여 명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약간 불안했지만 머 출발 지점에 있는 정거장이니 별 일 있겠냐 싶었죠. 허나 별일이 있었습니다. 사전 예약한 사람 제하고 나니 버스에 남은 좌석이 9개 밖에 없었고 정류장에서 앞서 기다리던 사람들 대충 세어보니 제 자리는 없더라고요. 지하철로 인천공항까지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미리 1시간 전에 나갔으면 탈 수는 있었으니 어머니 말씀이 맞았네요.)
운동은 하니? 뱃살 나오면 안 되니 운동 잘 해야 한다. (아침마다 달리기 열심히 한다고 말씀드리면) 무리하면 안 된다. 적당히 해야 해. (무리해서 안 해요 라고 말씀드리면) 운동화가 중요하다. 푹신하다고 다 좋은 게 아니야. 잘 골라야 하는데... 하여간 이렇게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걱정이 어머니에겐 살아가는 힘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자식인 ‘나’에게는 이렇게 걱정해서 챙겨줘야 하는 누군가가 필요할 터인데 그 역할을 해줄 당신이 있어야 하니까요.
걱정을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렇게 되지 않길 빌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걱정으로 걱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기운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기운을 주고 복을 빌어줘야 하는, ‘걱정’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80 넘은 노모에게 중요한 삶의 가치일 수 있습니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께 죄송하기도 하고 잘 돌봐드리지 못해 마음 한 구석이 허한 마음인지라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마음은 아내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아내는 간혹 그래서 어머니의 ‘걱정’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부러 제 시시콜콜한 부분을 어머니에게 다 이야기해요.
이런 것이죠. “어머니 오늘 이 사람이 감기 기운이 조금 있나 봐요. 목이 간질간질하대요.” “어머니 이 사람 어제 늦게 들어왔는데 와서는 바로 안자고 빵을 또 먹었어요” “어머니 이 사람 고기를 너무 먹어요. 야채를 잘 안먹어요.”
어머니는 그럼 이 이야기를 듣고는 제게 전화하십니다. 또는 제가 전화하면 ‘걱정’ 한 바가지를 투척하십니다. 목이 간질간질하면 목수건 하고 잠을 자거라. 그렇게 빵을 먹으면 어떡하니, 그것도 잠자리에. 고기 줄여야 한다, 거기도 야채 요리 많을텐데 그런 거 먹어 등등이요. 전화하는 내내 여러 번 반복해서 제게 주입식 교육을 하십니다.
저는 사람 사이의 기운을 믿고 말의 힘을 믿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걱정과 기운, 복을 받기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신의 영역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무언가인 셈이지요. 어머니는 정말 이렇게 중요한 미지의 무언가를 하고 계시기에 제 옆에 오래오래 계셔야 하는 것이고요.
물론 일반적으로 ‘희망’이 살아가는 힘이라 얘기하곤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은 그리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주곤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걱정’도 ‘희망’의 다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 되어야 하는데 라는 걱정 또는 그리 되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이란 표현에서 ‘걱정’을 ‘희망’으로 등치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의 걱정을 하루에도 수십번 듣고 있노라면 아휴 좀 그만! 이란 말이 튀어나와 버립니다. 생각과 행동이 어쩜 이리 다른지요. 그래서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적당한’ 걱정은 말하는 사람에게도 힘이 되고 듣는 사람에게도 힘이 됩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의 살아가는 힘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