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선동자 Mar 29. 2020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교육

기본을 갖췄으니, 비법은 너 자신에게서 찾으라

모두가 정점에 오를 수 없는 사회에서, 내 아이만 먼저 정점에 도달하게 하는 것만이 방법인가?

요즘 청년 세대들은 기성세대들과 달리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기업은 계속 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인력은 점점 기계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다. 거기다가 의료와 과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사회가 고령화가 되어, 청년층이 고령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경제적 부담은 더더욱 늘어나게 될 추세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될까? 선착순으로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야 거액의 상금을 얻을 수 있는 마라톤 같은 사회에서 내 자식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누구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라고 채찍질을 해야 할까? 같은 길, 같은 방향을 달리며 누가 먼저 상금을 거머쥐게 되나 경쟁하는 선착순 마라톤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굳이 그 마라톤과 같은 경기에서 상금을 먼저 거머쥐지 않고도 다른 방식으로 상금 이상의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을 그런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한국 사회에서 그런 교육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공교육, 사교육은 말 그대로 생존경쟁의 마라톤 교육이고, 한때 그런 교육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대안학교, 혁신학교도 요즘엔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물론 특정 단체나 국가의 지원을 거절하면서까지 교육의 소신을 지키려 노력하는 대안교육 현장도 많다)


미래 사회는 예측하기 힘든 사회다. 기계문명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력의 중요성이 점점 낮아져 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 밑에 고용돼서 안정적으로 월급 받으며 살아가기가 점차 어려워질 것이라고 한다. 불확실성, 예측하기 힘든 미래사회에서는 어떤 능력이 중요해 질까? 내가 생각하기로는 사유하는 능력이 미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될 것 같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힘은 사유 능력이 아닐까?

현재에만 해도 정보는 차고 넘친다.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진 게 권력이 되던 시대는 지나갔고, 앞으로는 그 지식과 정보의 접근성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앞으로는 그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그 정보를 이용해서 어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느냐가 중요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를 단순히 가지기만 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사유하고, 자유롭게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그런 능력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전 편에는 교육(敎育) 중 육(育)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봤으니 이번엔 교(敎)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가르침(敎)의 의미


교육(敎育)의 사전적 의미는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이고, 그중에서 교(敎)의 의미는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침'이다.


교(敎)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종교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종교만큼 가르침을 잘 대변하는 존재는 없는 것 같다. 종교가 기복신앙과 연결이 돼서, 종교 하면 기도하면서 복을 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종교의 출발은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종교(宗敎)에서의 교도 가르칠 교다.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천주교는 천주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종교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유교는 선비의 가르침, 무교(巫敎)는 무속신앙의 가르침이다. 거기서 가르침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삶을 살아가는 지혜"다. 옛 성인(聖人)들이 살면서 어떻게 하면 세상을 자유롭고 질서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실천했던 지혜들을 고스란히 모아 놓은 것이 성경, 불경, 도전, 사서오경 등의 경전이다. 그 경전에 제시된 성인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살아가고자 종교인들은 주기적으로 종교행사에 참여하여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참된 종교인들은 세상을 자유롭고 정의롭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종교의 본질과 그 의미가 이상적인 교육을 실천하는데 좋은 힌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종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종교에서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참된 나"를 찾아, 온전한 나로 이 세상에 우뚝 서는 것이다. 자립하여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종교가 가진 목표다.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참된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필요한 가르침들이 성경, 불경, 도전 등의 경전에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그 실천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생활한다. 굳이 법당이나 성당을 가야지만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자기 의지만으로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주기적으로 모여서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교(敎)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주고, 그걸 토대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홀로 당당하게 서게 하는 것이 본질인 것이다.

육(育)이 품어주고 몸소 보여주는 것이라면, 교(敎)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도록(홀로 설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소한 환경에 놓이면, 그 상황에 대해 더 잘 아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를 원한다. 만약 어떤 여행 가이더가 여행객들을 쌩판 모르는 여행지로 데리고 와서 자유롭게 지내라고 하면 과연 맘 편하게 지낼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가이더한테 "어떻게 지내야 돼요?" 하고 많은 질문들이 쇄도할 것이다.

처음엔 생소한 환경에서 먼저 지내 본 선배에게 의지해서 그 생소한 환경에 대해 배워 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소한 환경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자유"가 아니고, 흔히 "방종"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하지만 그 환경에 충분히 익숙해지게 되면 더 이상 그 선배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의지해선 안된다. 그 환경에 익숙해진 후에는 자기 나름대로 그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삶의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을 때 그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자유의 전제조건은 기본기, 익숙함이다. 기본이 갖춰지고 익숙해져야 자유로울 수 있다. 악기 다루는 게 서툰 사람, 연주할 곡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 연주할 때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을까? 틀릴까 조마조마해서 음색이 어떻게 되든, 음정이나 박자가 틀리지 않는 것에 집중하느라 자유롭게 연주할 틈이 없을 것이다. 악기 다루는 기본기가 몸에 배어 있어야, 여유를 가지고 자기만의 맛깔나는 연주를 할 수 있다. 부분 부분 아무리 맛깔나게 연주를 한다 해도 기본적인 음이나 박자가 틀려버리면 그 연주 자체가 불쾌해진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이 충분히 몸에 배어 있어야 자유롭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본을 갖추되, 기본이 갖춰지면 그 기본을 뛰어넘고 자기만의 색깔을 발휘하는 게 자유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끊임없이 남의 삶을 어설프게 따라하며 살거나,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독불장군 식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기본이 갖춰지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흔히 방종이라고 표현한다)

인생이 자유로운 사람은 기본을 잘 갖춘 사람이다. 기본을 갖추고 그걸 토대로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인생을 잘 살아간다.


영화 쿵푸팬더에서 용의 문서가 의미하는 것은, "기본을 갖췄으니, 비법은 너 자신에게서 찾으라"

그리고 육(育)이 잘 되어야 가르침(敎)도 잘 된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듯, 육(育)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가르침(敎)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육(育)이 우물 안 개구리로 키우는 것이라면, 가르침(敎)은 우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극을 주는 것이다. 육(育)이 기본을 습득시키는 측면이 강하다면, 가르침(敎)은 그 기본을 뛰어넘도록 자극을 주는 것에 중점이 있다. 실천과 반복으로 여유를 얻고, 그 여유를 토대로 자기만의 색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로운 사람은 사유하는 능력이 강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기본 원칙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을 할까 하는 고민해 본 사람은, 어떠한 경험을 하더라도, 어떤 정보를 얻더라도,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경험이나 정보들을 본인의 사유를 통해 재창조해낼 수 있다.





교육의 방향성


그럼 사유할 줄 아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 방향성을 가지고 가야 할까? 내가 생각해 본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1. 원칙 교육 :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을 익히는 과정

- 인간이 이 땅에,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자연환경에 대한 예의, 내 몸에 대한 예의, 생명에 대한 예의 등등...... 인간 삶에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는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순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세상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생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고, 자연환경에 대한 감수성을 충분히 갖출 수 있도록 한다.

- 몸을 움직여 주는 것은 내 몸에 대한 예의이며, 몸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는 요소다. 체력과 건강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특히 신체가 계속 발달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신체 활동은 밥 먹는 것과 같이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니 직접 몸을 움직여 즐겁게 뛰어놀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고, 몸 수련을 통한 자기 수양을 할 수 있도록 한다.


2. 세상의 흐름에 대한 교육 :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이 실제 어떻게 흘러가는가 알아가는 과정

-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세상의 주류적인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원칙만 지키며 살다가는 세상 속에서 고립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휘하려면 세상이 돌아가는 주류 흐름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명에 대해 이해한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 문명, 우리 삶을 편안하고 풍족하게 만드는 기술 과학 문명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인류가 역사 속에서 어떤 문명의 변화의 흐름 속에 살아왔는지 알아본다.


3. 자립을 위한 교육 :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는 과정

- 나와 세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떤 가치관을 취하며 살 것인지, 어떤 실천을 하고 살 것인지,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살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 협동 노동, 운동 경기, 토론, 동호회 활동 등의 공동체 활동을 통해, 인간관계 능력을 키워 나가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배워 나간다.

-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통해, 옛 성인들이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면서, 성인들의 삶의 지혜를 자신의 본보기로 삼고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과정을 가진다.

- 여러 직업과 여러 형태의 기업체, 공적 기관 등을 살펴보면서, 나의 흥미와 적성을 고려하여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스스로 길 찾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 예술 활동과 창작활동을 통해, 나의 상상이 실제로 작품을 통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한다.





마무리

거창하게 많은 생각을 펼쳐 봤지만, 사실 교육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교육의 핵심은 때를 아는 것이다. 이끌어줘야 할 때 이끌어주고, 놓아줘야 할 때 놓아줘야 한다. 이끌어줘야 할 때와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아는 것이 교육자가 본질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때에 맞게 교육을 하도록 사회가 내버려 두지 않으니, 때에 맞는 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인다.

때를 알고 그때에 필요한 교육을 하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어느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이 상황에선 어떤 걸 필요로 하는지 알면, 주변에서 어떤 교육이 좋네 어떤 교육은 나쁘네 떠들어대도, 흔들리지 않고, 아이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을 적절하게 제공할 수 있다. 그 이해가 부족하면, 이 사람이 이런 얘기 하면 그게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이 저런 얘기 하면 그것도 맞는 것 같고, 혼란스러워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엔 교육자도, 아이도 피곤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교육 방식과 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육자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보다 교육자의 질을 높이는 것이 현재 교육자들이 가장 힘써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물 안 개구리' 육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