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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선동자 Jun 14. 2020

성 고정관념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2019년 여름 부모교육에서 강의했던 내용입니다.

필자의 사진


많은 분들이 저를 보시며 ‘와 저런 사람은 처음 본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긴 머리도 그렇고, 핫핑크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머리띠를 하는 것도 그렇고... 어디서 쉽게 볼 수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이 드시겠죠. 근데 이게 그냥 단순히 제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교육적 차원에서의 큰 그림이라면 믿어지시나요? 제가 올해 5월에 한 부모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처음엔 저를 그저 유별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래 지내고 보니 제가 그런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의미를 학부모님들과 나눌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모임의 테마를 성 고정관념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정하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참 순수합니다. 아직 활짝 열려있는 마음을 가지고, 아직 사회의 규칙과 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죠. 이 유년기의 순수한 마음이 나중에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떠한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아동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은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곳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밤하늘을 보면 다양하고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잖아요. 그만큼 다양한 모습과 가능성이 펼쳐져 있고,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죠. 그런 밤하늘같은 마음이 몸에 깃들어 있는 아동기에는 그렇게 순수함을 지니고 세상을 바라보다가, 점차 자라나면서 사회에 발을 디디고 굳건히 자리 잡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면서 어른이 되어 갑니다.


그러한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무한한 가능성을 가장 많이 제한하고 구속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성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이런 거 못해", "난 이런 거 할 수 없어", "남자가(혹은 여자가) 왜 이런 걸 해야 돼?" 하면서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려 하는 것. 예를 들자면 축구를 같이 하는데 “여잔데 왜 축구를 해야 돼요?” 한다든지, 고무줄놀이를 같이 하려는데 “남자가 왜 이런 걸 해요?“ 라고 하든지. 이렇게 성 고정관념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마음과 행동양식을 가장 많이 구속합니다.


제가 교실에서 경험했던 한 가지 경험을 나누어 드릴게요.  어느 날 한 남자아이 A가 분홍색 도시락 통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걸 본 B라는 아이가 “우와 얘 여자 꺼 갖고 왔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아이는 그 분홍색 도시락 통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부모님한테 떼를 써서 새로 샀겠죠. 형이 여자 거 갖고 왔다고 놀린다고 말이죠. 왜 이 아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도시락 통을 새로 샀어야 했을까요?

그래서 “우와 얘 여자 꺼 갖고 왔다”라고 했던 그 아이를 불러서 물어봤죠. 그걸 왜 여자 거라고 생각했냐고. 그랬더니 분홍색이어서 여자 것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한테 분홍색은 여자 색이 아니다. 앞으로는 선생님이 분홍색 옷을 자주 입고 오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핑크 매니아가 됐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성 고정관념에 영향 받으면서, 자기를 자유롭게 드러내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행동에 한계를 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러면 아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성 고정관념 에 부딪혀서 맘껏 펼치지 못하게 되죠. 그래서 제가 성 고정관념이 없는 교실, Gender-free 교실을 위해 실제 실천하고 있는 사례들을 말씀을 드릴게요.


첫 번째는 제가 겉모습에서 보이는 이미지입니다. 제가 머리가 긴 것, 핫핑크를 즐겨 입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남자도 머리가 길 수 있다, 남자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이 ’남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색깔이나 머리길이 등 의미 없는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게 몸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스토리텔링입니다. 아이들이 저의 모습이 흔치 않으니까 자꾸 물어봐요. 선생님은 왜 머리가 길어요?, 선생님 여자같아요, 선생님은 왜 핑크색을 좋아해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단 머리에 대해서는 “아주 먼 옛날에 가위나 바리깡이 발명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땐 여자도 남자도 모두 머리가 길었지. 머리를 자를 수 있는 도구가 없었으니까”, “나도 어릴 땐 남자는 원래 머리가 눈썹만큼만 자라는 줄 알고 있었어. 근데 ‘머리를 안 자르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3년동안 머리를 안 잘라보니까 이렇게 길게 자라더라고. 너희들도 한 번 도전해보는 게 어떻겠니?”

왜 분홍색을 좋아하냐는 아이들의 물음에도 “옛날엔 남자는 붉은색 옷을 입고 여자는 푸른색 옷을 입었는데 왜 그땐 지금이랑 반대였을까? 여자 남자에 정해진 색깔은 없어. 그리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어. 옛날엔 여자아이들이 분홍색을 주로 좋아했지만 겨울왕국이 나오고 나선 엘사 드레스 색이 하늘색이니까 하늘색 좋아하는 여자아이들도 많아졌잖아? 우리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을 맘껏 좋아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아직 제가 차마 도전하지 못하는 치마의 경우도 “저 멀리 스코틀랜드라는 나라가 있는데, 거기서는 여자가 바지를 입고 남자가 치마를 입는다? 그리고 치마가 먼저 만들어졌게? 바지가 먼저 만들어졌게? 원래 치마는 사람이 처음 옷을 만들어 입을 때부터 있었어. 하지만 말을 타게 되면서 치마를 입으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어 바지라는 옷을 만들어 입게 된 거야. 남자들이 주로 말 타고 전쟁에 나가다보니 남자들이 바지를 더 많이 입게 되었지”

이렇게 아이들이 물어보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편견의 근원으로 찾아가서 그 편견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아이들이 느끼게끔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입니다.


세 번째는 놀리거나 놀림 받는 아이들을 적절히 지도하는 것입니다. 힘이 세고 운동을 잘하는 정희(가명, 여자아이)를 보고 아이들이 고릴라, 헐크, ‘쟨 여자가 아니야. 남자 같아’ 이렇게 놀릴 때가 있었는데, ‘그건 남자 같은 게 아니라 정희 같은 거야.’ 하고 말해줬습니다. 놀리는 아이들이 단숨에 바뀌지는 않지만, 점점 그런 얘기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지금은 그런 얘기를 적어도 제 앞에서는 하지 않게 됐죠. 그리고 헬로키티 물컵을 가져온 남자아이가 있는데, 아이들이 놀리니까 “선생님 친구도 헬로키티 좋아하는데” 하고 말해준 적이 있었고요. 머리가 긴 남자아이를 보고 여자 같다고 이야기하는 아이가 있으면 “넌 저렇게 할 용기가 있니? 저건 용기 있는 행동이니 칭찬해줘야 할 일 아닐까?” 하고 얘기를 해줬고, 놀림 받은 머리 긴 남자아이한테는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건데, 너의 그 용기가 참 멋지구나” 하고 얘기를 해줬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노력하고 있는 부분은, 동화책을 읽어주려고 하면 주인공이 대부분 남자고, 성별에 따라 다른 역할이 정해져 있잖아요? 저는 일부러 성별을 뒤바꿔서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이니 아이들이 점점 성 고정관념에 물들여졌던 생각과 습관들이 점차 벗겨저 나가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성 고정관념을 내면화 하고 답습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뭘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은 미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미디어라 하면, 만화책, 동화책, 영화, 만화영화, 유튜브 영상 이런 것들이요, 부모님들이 성 차별 없이 키우려고 하셔도 아이들이 기존 관습에 물들어가는 이유가 거의 미디어의 영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집에서 미디어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친척들 만나거나, 어린이집이나 학교 가면 다른 아이들이 다 그러고 있죠. 그리고 지금 많이 바뀌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학교 교과서에는 성 고정관념에 물들여진 삽화나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영향을 완전히 안 받기는 힘든 현실이긴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적어도 가정에서만큼은 아이들이 성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게 보호해주셔야 한다는 것이고, 혹시 아이들이 성 차별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아이들에게 잘 알려주고 바로잡아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직접적으로 모범을 보여주시는 게 가장 좋고요.


두 아이는 남매관계고, 왼쪽이 여동생, 오른쪽이 오빠의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 인스타그램 vero_james]


제가 성 고정관념에 영향 받지 않고 자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려주는 좋은 사례가 있어서 하나를 소개해드릴게요. 100년 전에 헝가리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그땐 체스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여자는 체스를 못한다, 그랜드마스터가 될 수 없다 하는 편견이 지배적이었죠. 그 편견에 도전장을 내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라즐로 폴가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성 고정관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라면 여성도 체스 그랜드마스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에겐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세 딸들을 체스 그랜드마스터로 키우고자 하는 목표를 정합니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큰 전제로 삼았던 것이 학교에 보내지 않는 거였어요. 학교에 가서 여학생이 체스를 한다고 하면 교사나 다른 학생들로부터 “여자도 체스를 하네?”, “여자는 원래 체스를 못해”, “여자가 체스를 한다면 얼마나 한다고”, “아무리 잘해봤자 남자한테는 안되지” 하는 온갖 편견에 가득한 말에 시달릴 게 뻔히 보였기 때문에,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성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는 가정환경에서 딸들을 키우고 직접 가정에서 교육을 합니다. 그렇게 폴가의 세 딸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스를 놀이처럼 즐겼고, 실력을 점점 쌓아 갑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첫째 딸은 여성 사상 최초로 세계 최고 체스 그랜드마스터가 됐습니다. 둘째와 셋째 딸도 역시 최고 그랜드마스터 자리에 올랐고, 막내딸의 경우엔 15세에 세계 체스 사상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됐어요. 이 세 자매가 학교에 다니면서 여자는 체스를 못한다는 편견에 시달렸다면 과연 체스 그랜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중간에 자기는 여자이기 때문에 체스를 잘할 수 없을 거라고 한계를 짓고 중간에 포기를 했겠죠.

이토록 성 고정관념이 인간의 일생에 상당 부분을 옭아맨다는 것이고, 성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만 해도 온전히 자기의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부모님들께서도 아이들에게 성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오늘의 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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