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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Jul 13. 2023

밥의 온도

따뜻한 밥의 힘

밥의 온도


진화 이경희


찬밥이라는 말은 쓸쓸한 느낌을 준다. 어린 시절 찬밥을 먹었던 기억은 희미하지만 식어버린 밥을 혼자 먹던 느낌은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다. 따뜻한 밥은 식감과 냄새부터 다르다. 언제 찾아가도 갓 지은 솥밥과 된장두부찌개를 차려주시던 외할머니의 밥상에서는 구수한 김이 올랐다. 부모님과 헤어져 살던 학창 시절 주말마다 외가로 향하는 언덕은 지친 마음을 일으켜주는 환대의 길이었다.


외할머니의 따뜻한 밥을 기억하기에 나 역시 손녀의 밥상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이유식을 챙겨주러 가던 발걸음이 유아식으로 바뀌며 횟수가 줄었지만 요즘도 1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저녁밥을 해주고 함께 놀다가 잠들기 전에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별식 후에 듣는 이야기가 후식 겸 자장가인 셈이다.


얼마 전에는 유치원에서 소풍을 간다고 도시락을 싸달라기에 어떻게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할까 궁리를 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어려서 그런지 아침마다 등원 시간을 늦추며 소풍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베이비시터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색색의 채소를 다져 초절임 하거나 볶아 밥과 비벼 미니 초밥틀에 넣고 흔들면 호두알만 한 꼬마 주먹밥이 만들어진다. 어떻게 신호등 주먹밥을 만드는지 이야기해 주며 소풍 가는 날 신호등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예고를 했더니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드디어 소풍날 일찌감치 도시락 가방을 메고 신바람 나게 등원하는 뒷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그날 유치원에서 보내준 소풍 사진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고 함박웃음을 띄는 손녀의 얼굴울 보며 내 마음도 뿌듯하고 따뜻해졌다. 먹어서 따뜻한 밥이 있고 먹여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밥이 있구나, 두 아들 키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밥의 온도를 손녀를 통해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남편은 종종 유년기에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이야기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 집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어머니가 시골 학교에 발령이 나자 두 식구만 시골생활을 하며 무척 외로웠다고 한다. 학령 전의 어린아이가 아침에 출근하는 어머니가 차려둔 밥상을 끌어당겨서 점심을 먹고 비가 오는 날에는 함께 놀 친구가 없어서 혼자 하루종일 비 내리는 걸 바라보며 심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짠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25년 동안 시어머니와 남편이 유독 따뜻한 밥상을 강조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성년이 된 이후 10여 년 간은 나 자신이 새로운 공부를 하고 일에 골몰하느라 식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치 밥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자유롭게 지내다가 팬데믹으로 집 안에서 지내야 하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집밥과 자라나는 아이를 위한 밥상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 가정식 요리를 연구하고 새로운 재미를 느끼며 잃어버린 3년을 건너왔다. 요즈음은 오랜 세월의 주방 근속에 대한 보너스라도 받는 듯 남편이 아침식사를 차린다. 그가 차려 주는 현미잡곡식빵, 달걀 반숙, 올리브유에 볶은 토마토와 양파를 꾸준히 먹으며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6인 식탁에 둘이 앉아서 먹는 간단한 식사지만 얼마나 따뜻하고 감사한지...


최근에 노년학 전문가의 강의를 들었는데 무엇을 먹느냐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먹느냐라고 한다.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치매의 비율이 적은 수녀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더니 혼자 사는 노인과 달리 말년까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녀들의 식생활 패턴이 치매유병률을 현저하게 낮추었다고 한다. 그들은 늘 밥상에 둘러앉아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손녀에게 향하는 마음의 추가 홀로 계시는 어머니에 대한 무게보다 기운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가뵙거나 함께 모이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그리 자연스럽게 내리사랑에 충실할까. 어머니를 따라 나이가 들어가는 사 남매가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고 미지근하건만 어머니는 매일 ‘밥은 먹고 다니냐’며 걱정을 하신다.

지난 주말 어머니는 식사 거르지 말고 끓여 먹으라고 가래떡을 뽑아 나눠 주셨다. 굳은 떡을 썰며 어깨를 어루만지다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그 많은 밥상이 떠올라 울컥했다. ‘이번 주말에 어머니 모시고 맛있는 밥 한 끼 먹자. 어머니께 우리 얼굴 보여드리는 게 보약이다.’ 사 남매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더니 남동생들도 마음이 통했는지 모두 ‘좋아요’라고 답이 왔다. 이번 가족모임에는 특별히 베트남에 사는 막냇동생도 참석한다. 그 동생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올해 92세 되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우리는 모두 60년 이상을 무사히 살았다. 헤아려보니 어머니와 사 남매의 나이를 합해보니 무려 39년이다. 이것이 바로 따뜻한 밥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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