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강가에 서서 건너편 숲을 바라본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숲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요즘 소용돌이 치는 바깥 세상과 거리를 두고 비교적 안전하고 익숙한 땅에 머물며 닻을 내리고 있다. 평소대로라면 거리낌 없이 배에 올라 새로운 세상으로 난 길로 나아갔을 테지만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기상황에 대비하며 잠시 쉼표를 찍고 숨을 고르는 것이 내 마음의 풍경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구촌을 둘러 보고자 했던 계획도 잠시 보류하고 있다.
대자연과 가까이 만났던 여행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큰 바람과 해일이 숨을 죽인 보르네오 북단 해변은 잠잠했다. 맑은 바닷물 속에는 손에 잡힐 듯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고 맹글로브 밀림을 돌아나온 농도 짙은 녹즙 빛깔의 강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투명한 바다, 태풍이 발생하는 위도 바로 아래라고 그곳을 ‘폭풍 아래’라고 불렀다.
‘폭풍 아래’서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배를 타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이르면 석양은 핏빛 일렁임으로 수만 년 새끼나무를 낳아 이룬 숲을 싸고 돌았다. 맹글로브 나뭇가지 끝마다 반짝이는 불빛이 총총이 꼬마 등불을 켜면 숲에서는 반딧불이들의 허니문 축제가 시작된다. 넘치는 생명들의 삶터라 부산해 보이지만 '폭풍 아래' 적도를 지나는 파도와 바람은 조용히 꿈을 꾸며 뒤척이며 잦아든다. 태풍의 눈은 더 북쪽 바다로 나가야 생성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회색 비구름 한 조각 다가올 때마다 파라 세일링의 낙하산을 타고 망망대해 위로 떠올라 원시림을 바라보며 단숨에 날아오른다. 수영을 못해도 산소 헬멧을 쓰고 바다 밑을 걸을 수 있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용기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기에 망설임 없이 그런 활동에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동행하는 여행을 기대하며 유효기간이 끝난 여권을 십 년짜리 전자여권으로 갱신해 드렸는데 지난 연말 감기를 오래 앓고 난 이후 평소에 하지 않던 말씀을 하셨다. “이 반지는 네가 해준 것이니 도로 가지고 가거라. 통장과 비상금은 여기 두었으니 혹시 내게 무슨 일 생기면 챙기고...” 이것 저것 가방에 넣어 주실 때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고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낯선 강가에 서서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시대를 맞아 발을 담글 것인가 뺄 것인가 전전긍긍 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준비하는 듯 초연한 자세로 일상을 보내신다. 음식을 조금밖에 못 드시면서도 기운이 나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고 서점에서 영어사전과 국어사전을 사오셨다. 학창시절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가질 수 없었던 사전 두 권을 드디어 사셨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평생 그 소원을 품고 사셨다는 걸 알았다. 그 귀한 걸 외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손자에게 주고 싶다고 했더니 스마트폰에 다 들어있어서 괜찮다고 했다며 아쉬워 하셨다.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고 가족 단체방에서 소식과 사진을 주고 받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 방대한 정보가 작은 물건에 다 들어간다는 건 지 20세기의 초반(1932년)에 태어나 90년 이상 격동의 시대를 적응하며 살아온 어머니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증조모인 어머니와 증손녀인 서연이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 영상통화 덕분이다. 네 살인 서연이는 영상통화를 하며 증조할머니께 뽀뽀를 하고 하트를 날려 보내고 어머니는 증손녀의 재롱잔치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보며 흐뭇해 하신다.
최근 들어 생성형 AI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며 똑똑한 비서 하나 채용해서 활용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 전문가는 ‘생성 AI는 생성한다기 보다는 있는 것을 찾아내고 발견을 하는 편에 가깝고 발견을 위해 탐색하는 대상은 초고차원의 공간으로 가능성의 수는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으며, 그런 AI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탐험하는 인간의 여정에 함께 하는 동반자’라고 했다. 하지만 낯선 세계는 역시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이 땅에 살면서 점차 업그레이드 된 시대로 옮겨가기도 이렇게 두려운데 천상의 세계를 소망하며 준비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과연 어떨지, 낯선 강가에 서서 좁아진 어머니의 등에 얼굴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