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배우와 뒷것 이야기
인생에도 더블 캐스팅이 있다면
진화 이경희
그해 겨울, 나는 호암아트홀 무대 뒤 분장실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특수분장의 최고봉인 전예출 선생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분장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자꾸 지워졌다. 바로 무대에 서야 했지만, 마음은 아파서 누워 있는 어린 아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쓰러져 못 일어나는 상황이 아닌 한, 어떤 경우라도 직접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 연극판의 불문율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부은 눈매를 감추기 위해 예정보다 더 과장되고 독특한 분장을 한 채 연기를 하며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는 진실로 지금-여기밖에 없구나.’
1년 내내 연습하고 드디어 연말 무대에 올린 그 연극은 기독여성문인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극화한 작품이었다. 원로 문인 김자림 극작가와 드라마 <보통사람들>을 쓴 나연숙 방송작가는 문인들이 쓴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각색했고, 문인들은 직접 본인의 역할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그 성과로 월간 《주부편지》라는 소책자가 탄생했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매월 발행되고 있다. 그 이후로 무슨 일엔가 몰두할 때마다 문득 ‘이 일이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인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여러 역할의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예전에는 이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으나, 근래에는 개성 있고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를 맡고 싶어 뮤지컬 <빨래>의 하숙집 할머니 역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괴팍한 할머니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진한 호남 사투리와 백발 가발 착용을 불사하고 연습에 몰입했으나, 그 작품은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올라갈 수 있는 무대가 없다면 그 어떤 역할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을.
얼마 전에는 모처럼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 <인터뷰>를 보려고 대학로 소극장 표를 예매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그 배우가 아닌 다른 배우가 더블 캐스팅으로 출연한다고 했다. 그 역시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으나, 내가 보고 싶었던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연극 무대에서 오랫동안 무명 시절을 보내던 그가 최근 들어 OTT 드라마 시리즈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점점 열광하는 대중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실시간으로 무대에 오르는 횟수가 줄어든 게 아닐까 추측하며, 배우에게는 무명 시절에서 벗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이해했다. 무대에 직접 서는 것 외에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기다리기 때문이겠지.
대학로에는 오랜 세월 스스로를 ‘뒷것’이라고 부른 천재가 있었다. 그에 의해 수많은 배우와 가수가 탄생하고 뮤지컬 한 작품이 14년이나 장기공연을 했다. <지하철 1호선>이라는 작품이 4,000회나 공연되는 동안 출연자들이 여러 차례 바뀌고 바통 터치가 일어났으며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와 같이 실력 있는 배우들이 배출되었다. 그 작품에서 연변 처녀 역으로 출연했고 지금은 세계적인 샹송 가수가 된 가수 나윤선도 바로 ‘뒷것’ 김민기 님이 배출한 인재 중 하나다. 스스로 노래하며 국민 가수로 불리던 그가 무대에서 내려와 배우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고 출연료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제작자가 된 것은, 대학로의 문화적 생태계를 바꾸고자 하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존재는 숨기고 후배들의 성장을 돕는 ‘뒷것 정신’은 어떤 분야에서도 필요한 상생의 비밀이다.
짧지만 의미 있는 수필극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으면서 품고 있는 나의 꿈은, 예술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우며 돕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지켜야 하는 부담이 있고 무대 밖에서 맡은 삶의 역할이 버거울 때면 ‘인생에도 더블 캐스팅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연극에서 배역을 맡으면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하고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반드시 무대를 지켜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막 뒤에서 목소리 연기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연기자의 마음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선택적으로 올라가고 빠지는 더블 캐스팅이 없다. 크든 작든 ‘지금-여기’서 내가 맡은 역할이 있을 뿐이다.
무대에 서기까지 배역을 맡은 사람들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며 호흡을 맞추고, 무대에 올라가서는 관객들과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연극의 매력이 아직도 ‘뒷것’이 되지 못한 나를 배우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아버지의 고드름> 짧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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