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환상 도서관 #02
또 다시 하늘 위 차원의 문이 나타나,
거대한 입이 등장했다.
거대한 입으로부터 강력한 돌풍이 불어왔다.
"전방에 돌풍! 돌풍이 몰아친다!"
망루 위에 선 병사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센 바람이 성벽을 강타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마치 신이 장난을 치듯, 미지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가 온 힘을 다해 바람을 부는 듯 했다.
병사들은 서로의 팔을 엮어 인간 사슬을 만들며 비명 섞인 기합으로 버텼다.
깃발은 찢겨 나갔고, 견고하던 첨탑의 지붕이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성의 가장 높은 곳, 그 모든 아비규환을 지켜보는 기사단장 ‘드리피스’는 눈을 더욱 날카롭게 떴다.
그의 옆에는 이 나라의 공주 또한 서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최근 몇 개월 사이... 태풍이 더욱 거세졌어요. 마치 하늘이 우리를 벌하려는 것 같아요."
공주는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드리피스는 묵묵히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하고 기괴한 입을 노려보았다.
"거세진 만큼 저희도 대비하였습니다. 이번 태풍이 지나가면, 이번에는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저 '사악한 입'을 베어버리고 이 지옥 같은 태풍을 끝내겠습니다."
드리피스가 칼을 뽑아 하늘 속 커다란 구멍을 겨누었다.
칼끝이 가리킨 그 입에서는 여전히 흉폭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기이한 정적이 흐르는 밤.
왕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갈 텐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네."
"이번엔 반드시 이 악랄한 태풍을 영원히 멈추겠습니다."
드리피스는 결연히 비행선에 올랐다.
그리고 하늘에 달린 거대한 입을 향해 돌진했다.
거센 기류가 그를 집어삼켰다.
빛이 사라지고, 차원의 문이 닫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드리피스는 딱딱한 나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평범한 소녀의 방이었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거인이 사는 방인양 모든 것이 거대했다.
드리피스의 상식은 무너졌다.
그가 살았던 공주와 성이 있는 세계는 거인 소녀의 책상 한 켠, 유리병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채만한 침대, 탑처럼 높은 책상.
그리고 그 책상 앞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드리피스를 내려다보았다.
"에취!"
소녀가 재채기를 했다.
드리피스의 몸이 낙엽처럼 날라갔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덮치던 태풍의 위력과 같았다.
"너는... 누구지? 내 '감정 보관함'에서 벌레가 나온 건가?"
소녀가 거대한 손가락으로 드리피스를 집어 들었다.
"나는 왕국을 지키는 기사단장 드리피스다!
네가 우리 세계를 공격하는 거대한 입술의 정체인가?"
드리피스의 외침에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에 놓인 드리피스를 그의 세계가 담긴 유리병 옆으로 옮겼다.
뚜껑이 열린 유리병 안에는, 드리피스가 살던 왕국이 거대한 소녀의 시선에서는 장난감처럼 들어 있었다.
성벽, 마을, 그리고 자신이 방금 떠나온 왕궁까지.
"이게... 내 세상이라고...?"
드리피스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온 나라의 목숨을 건 투쟁이, 고작 소녀의 책상 위에 놓인 장난감 안에서의 몸부림이었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을 해다오."
드리피스가 절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잘 몰라.
얼마 전, 우리 마을에 한 마녀가 찾아왔어.
마녀는 사람들에게 이 '감정 보관함'을 나눠줬지.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이 병에 대고 천천히 바람을 불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했어.
실제로 그랬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병을 사용해.
덕분에 마을에는 갈등이 사라지고 가정의 평화는 물론, 온 마을의 평화가 찾아왔지."
"너희의 평화가... 우리에겐 재앙이었다."
드리피스는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병에 대고 쏟아낸 분노와 짜증이,
우리 세계에서는 태풍이 되어 우리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당장 멈춰라!"
소녀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가 누군가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멈출 수 없어. 감정 보관함이 없으면 내가 미쳐버릴지도 몰라."
"좋은 생각이 났어! 잠시 마녀에게 다녀올게"
소녀는 마녀를 찾아 방 밖으로 나갔다.
마녀는 숲속의 불길한 작은 법당에서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맞이했다.
"호오, 병 속의 작은 사람이 튀어 나왔다구? 그럴 일이 없는데..."
소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해결책을 요구했다.
마녀는 킬킬거리며 검은색의 아주 작은, 손가락만한 검은색 상자를 꺼냈다.
"간단해. 이걸 그 기사의 나라에 사는 공주에게 전해주라 하렴.
이 상자를 열고 공주가 비명을 지르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거야."
소녀는 그 작은 상자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드리피스에게 자신의 유리병보다 훨씬 작은,
기사의 손에 딱 맞는 검은색 '감정 상자'을 건넸다.
"이걸 가져가.
네가 모시는 공주에게 줘.
내가 너희 세계에 바람을 불 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 검은 상자를 열고 안에다 소리를 지르라고 해줘.
그러면 너희 세상의 태풍도 사라질 거야."
드리피스는 찝찝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작은 상자를 안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
왕국으로 돌아온 드리피스는 여왕과 공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감정 상자를 바쳤다.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거대한 입이 나타나 태풍이 불어올 때면,
공주는 아무도 없는 독방에 들어가 그 작은 병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아졌다.
왕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환호했다.
하지만 드리피스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공주가 병을 가지고 독방에서 나올 때마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공허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공주의 독방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드리피스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는 보았다.
공주의 손에 들린 검은 감정 상자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깨진 파편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순식간에 거대한 형체를 갖추었다.
그것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악마가 나타났다.
소년 악마의 몸 곳곳에는 비명을 지르는 수많은 얼굴이 기괴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공주의 상자 속에 들어있던 또 다른 세계, 그곳에 살던 악마였다.
"아아아악! 아파! 그만해! 시끄러워!"
악마는 아이의 목소리와 공주의 비명이 섞인 기괴한 소리를 내며 폭주했다.
공주의 비명을 오롯이 받아내다 결국 미쳐버린, '세 번째 세계'의 희생자였다.
악마는 공주의 방 천장을 뚫고 솟구쳤다.
그리고 드리피스가 막을 새도 없이, 하늘에 있는 거대한 입을 향해 날아갔다.
"안 돼!"
드리피스는 악마의 뒤를 쫓아 다시 유리병 밖의 세계로 나아갔다.
다시 소녀의 거대한 책상이 있는 방.
평화롭게 잠을 자던 소녀는 끔찍한 굉음에 눈을 떴다.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이 깨지며 검은 악마가 튀어나온 것이다.
악마는 방 안을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소년 악마는 집요하게 소녀를 쫓았다.
그것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소녀가 공주에게, 공주가 아이에게 떠넘긴 고통이 응축된 혼돈 그 자체였다.
소녀는 마녀의 법당으로 뛰어들었다.
"살려주세요! 병이 깨졌어요! 안에서 괴물이 나왔어요!"
마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쯧쯧. 감정을 너무 많이 채워 넣었구나. 용량을 심하게 넘어버린 것 같군."
그때, 법당의 지붕이 날아가며 거대한 악마가 내려앉았다.
뒤이어 드리피스도 도착했다.
악마는 마녀를 보자마자 증오에 찬 눈빛으로 달려들었다.
"너... 너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이냐!"
악마의 몸에 박힌 아이의 얼굴이 마녀를 향해 울부짖었다.
마녀는 당황하지 않고 진열대에서 커다란 호리병을 꺼냈다.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기이한 병이었다.
"시끄러운 놈이군. 너도 이 안에 들어가렴. 더 큰 병에 가두면 그만이야."
마녀가 주문을 외우자 흡입력이 발생하며 악마를 병 속으로 빨아들이려 했다.
악마는 고통스럽게 저항했다.
그 순간, 드리피스가 소리쳤다.
"멈춰라! 또다시 그를 가두려는 건가?
저 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비극을 언제까지 반복할 셈인가!"
소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편안함이 기사의 세계를 파괴 했고, 저 아이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더 큰 병에 가둔다면, 그 병 속의 누군가가 또다시 고통받을 것이다.
소녀는 마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요! 병은 이제 필요 없어요!"
소녀의 방해로 마녀의 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마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것들. 고통을 가두지 않으면 너희가 먹히게 될 텐데."
갈 곳을 잃은 악마는 주저 앉아 이성을 잃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천천히 악마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악마를 마주 보았다.
악마의 절규는 소녀의 아픔이자,
유리 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이었으며,
죄 없는 아이의 눈물이었다.
"미안해..."
소녀가 울먹이며 외쳤다.
"널 내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악마의 거대한 손톱이 소녀의 코앞에서 멈췄다.
악마의 몸에 박힌 수많은 얼굴들 일그러지더니, 악마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악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아아아앙!"
악마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검은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며, 악마는 본래의 작은 아이의 환영으로 변했다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억눌린 감정이 비로소 해방된 것이다.
마녀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리콜 서비스는 여기까지야. 다음번엔 추가 요금까지 톡톡히 받아내겠어."
마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드리피스는 다시 자신의 작은 세계, 소녀의 책상 위 유리 병으로 세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기사님."
소녀가 드리피스를 불렀다.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더 이상 병은 쓰지 않을게.
화가 나면 그냥 소리를 지르거나, 울어버릴 거야.
너희 세계에 태풍이 불지 않도록 조심할게."
"고맙군.
공주님에게도 전하겠다.
감정은 다른 곳으로 떠넘길 것이 아니라,
마주해야 하는 것이라고."
드리피스는 부서진 병 틈새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소녀는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소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소녀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병 속에 가두었듯이, 마녀가 소년 악마를 더 큰 병에 가두려 했던 것처럼…
'혹시... 나의 이 세계도,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은 아닐까?'
하늘 구름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황급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하지만 그 서늘한 공포는,
어딘가에 넣을 수도 없이 오롯이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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