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환상 도서관 #03
지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류 문명이 살고 있는 어느 한 행성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민트색 모래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곳이 있다.
우리는 그곳을 민트 사막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곳은 뜨거운 태양 아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열사의 땅은 아니었다.
차갑고, 건조하며,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을 상쾌한 박하 향이 찌르듯 파고드는
사막이었다.
그곳은 아름다웠으나 기이했다.
민트 사막의 모래는
그 어떤 형태의 결속도 허락하지 않았다.
단단한 바위를 올려두면 모래알처럼 바스러졌고,
물을 부으면 닿기도 전에 민트색 안개가 되어
증발해 버렸다.
사막에 서식하는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잘게 부수어 흩어지게 하는,
일말의 결합조차 거부하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그 사막의 입구, 경계선에 휠체어에 탄 병든 어머니와 아들, ‘이안’이 서 있었다.
어머니의 피부는 이미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을 들어 사막의 저편, 아득한 지평선을 가리켰다.
"저 너머에 있을 거야.
금은보화가 가득한 유리 성, 그리고 그 성을 짓는 '유리 거인'이.
그 성을 발견하면 우리는 부자가 될 수 있어."
소년, ‘이안’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의 땀을 식혔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
"어머니, 그런 건 없어요. 이 사막에서는 성은커녕 돌탑 하나도 쌓을 수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건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낸 거짓말일 뿐이에요."
"아니야! 그이는 똑똑히 말했어.
내 반지는 유리 거인이 만든 성의 일부를 녹여 만든 것이라고.
이 반지가 그 증거야.
그리고 유리 성에 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인 셈이지."
어머니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왼손 약지를 이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기이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보석상의 진열대에 놓인,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트색 모래를 수천 번 정제하여 응축시킨 듯한 탁한 투명함.
빛을 받으면 난반사하며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빛을 조용히 삼켜버리는 듯한
기이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공허한 중심에 무언가 불길한 것이
웅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찝찝한 영롱함이었다.
이안은 그 반지를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거짓말이야.’
이안은 확신했다.
민트 사막의 모래는 성분상 고열을 가해도
유리로 변하지 않는다.
그저 미세한 가루가 되어 흩어질 뿐이다.
그것이 학계의 정설이었고, 모두가 아는 상식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몽상가였다.
어머니에게 줄 다이아몬드 반지를 살 돈이 없어,
출처를 알 수 없는 싸구려 유리를 주워와 그럴싸한 이야기를 입혀 프러포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그 반지는
일종의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평생을 무언가를 이루려다 실패한 사람이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으나
손가락 관절염으로 좌절했고,
사업에 도전하였으나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았다.
그녀의 인생은 민트 사막의 모래처럼,
쌓으려 하면 무너지고 쥐려고 하면 흩어졌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에 집착했다.
"이안, 넌 꼭 성공해야 해.
엄마처럼 살면 안 돼.
의사가 되어야지, 아니면 판사라도."
어머니의 기대는 무거웠다.
이안이 시험에서 하나라도 틀려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밥을 굶으며 원통해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는 곧 이안의 삶에 채워진 족쇄가 되었다.
이안은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과는 늘 평범했다.
그는 어머니가 원하는 명문대에 가지 못했고, 전문직이 되지도 못했다.
그저 그런 대학을 나와,
병원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이 되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실망은 침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이안을 볼 때마다 혀를 찼거나,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쌓이고 쌓여
이안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응어리가 되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에도 실패했지.’
이안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의 내면은 이러한 깊은 무기력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결정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죽기 전 단 하나의 소원이라며,
유리 거인을 찾아달라는 어머니의 억지를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가요, 가."
그는 평생 그래왔듯,
어머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사막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길잡이가 필요했다.
이안은 사막 입구 투어리스트 센터에서
가이드를 고용했다.
가이드는 온몸을 두꺼운 회색 천으로 감싸고 있었고, 눈만 내놓은 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가이드는 어머니의 목적지를 듣고는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유리 거인이라... 글쎄요.
30년 넘게 사막을 떠돌아다니며
숱한 기현상을 마주했지만,
유리 거인은 처음 듣는군요.
그나저나 저희가 안내해 드릴
'사해(沙海) 1구역'에는 민트 해파리나 민트 문어 등
다들 아시는 동물들밖에 없으니
괜한 기대는 안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행은 제공된 특수 로브를 입고 가이드가
이끄는 낙타에 짐을 싣고 사막으로 들어섰다.
사해 1 구역의 풍경은 몽환적이었다.
하늘은 보라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빛이 옅게 감돌았고
그 아래로는 중력을 무시한 생명체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창백한 실리콘과 같은 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민트 해파리’가 하늘을 유영했다.
놈들의 촉수는 5-6 미터 아래로 늘어져 모래 표면을
훑고 지나갔는데,
촉수가 닿는 곳마다 모래알들이 파랗게 발광하며
튀어 올랐다.
모래 속에서는 '사막 오징어'들이 흐느적흐느적
움직였다.
매끄러운 유선형 몸체를 가진 녀석들은 모래를
물처럼 헤치고 다니며,
간헐적으로 먹물을 대신해 차가운 민트색 가스를
뿜어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강렬한 박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처음에는 상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향기는 코 점막을 마비시키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안은 멍하니 하늘을 떠다니는 해파리를 바라보았다.
녀석들은 목적지가 없었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기류가 이끄는 대로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스스로 헤엄칠 근육은 물론,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투명한 몸체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번개 자국처럼 보이는 혈관 말고는 텅 비어있었다.
‘왠지… 나와 닮은 것 같아.’
이안은 불현듯 생각했다.
자신의 삶이 저 해파리와 다를 게 무엇인가.
어머니에 휩쓸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전공을 선택하고,
원하지도 않는 직업을 꿈꾸다 결국 여기까지
떠밀려온 것이라 생각해도 될 법한 인생이다.
저항하려 해 봤자 태생과 함께 부여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부여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죄책감은
어느새 학습된 무기력이 되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뼈에 새겨졌다.
해파리 한 마리가 낙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안은 손을 뻗어 그것을 슬쩍 만져보았다.
치약 같이 시린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
"이안! 저길 봐라! 저기 빛나는 게 있잖니!"
어머니는 사막의 경치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의 시선은 항상 지평선 너머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저건 그냥 모래에 반사된 햇빛이에요."
"아니야, 저건 신호야. 아버지가 보내는 신호라고!"
이안은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그는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며칠 후, 그들은 거대한 언덕 위에 도착했다.
사해 1 구역의 끝이었다.
언덕 아래로는 보다 짙은 민트색 모래로 가득한 '사해 2 구역'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1 구역과는 공기의 질감부터가 달랐다.
무겁고, 습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감까지 감돌았다.
가이드가 낙타를 멈춰 세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은 못 갑니다."
이안도 동의했다.
사해 2 구역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애초에 투어리스트 센터에서 얘기된 바이다.
언덕 아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서 냄새가 났다.
그것은 무엇인가가 부패할 때 나는 냄새인 동시에 인공적인 방부제가 섞인 냄새였다.
"어머니, 이제 돌아가요. 충분히 보셨잖아요. 저 아래는 사람이 갈 곳이 아니래요."
"....... 아니, 나는 못 돌아간다.
벌써 돌아가면 굳이 여기까지 힘들게 온 이유가 없어.
어차피 나는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몸.
아들, 정 가기 싫다면 나라도 갔다 오겠다.
가이드 분, 제발... 내가 가진 돈을 다 줄 테니 저를 저 아래로 데려가주시겠어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녀에게 이번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의 끝에서
의미를 찾는 마지막 도전이자 도박이었다.
가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여러분, 저 아래 2 구역은 '긴 다리 생물'들의 영토입니다.
긴 다리 생물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공상과 현실 사이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다시 말해, 공상 세계에서도 현실 세계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녀석들인 거죠.
그래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악하고 인간을 종으로
삼으려 하거나 그들 입맛에 맞게 이용하려 합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 혹은 그 이상의 지능과 더불어,
기이한 마법을 부리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물론 제 스스로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저희 가이드 또한 일생에 한두 번만 수행 목적으로
가는 곳이고,
일반인에게는 더더욱 절. 대. 금지된 곳입니다."
"상관없어!
유리 거인이 저기 있단 말이야!
정 싫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야 돼!"
어머니의 눈은 이미 이성이 아닌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휠체어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언덕의 경사면을 향해서.
"어머니!"
이안이 손을 뻗을 새도 없이,
휠체어는 언덕 아래로 가속도가 붙으며 내려갔다.
휠체어 바퀴가 모래를 가르며 낸 자국이
뱀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안은 가이드을 뒤로하고 어머니를 쫓아
허겁지겁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가이드의 당혹스러운 외침은
금세 모래바람 소리에 흩어졌다.
사해 2 구역의 모래는 1 구역보다 훨씬 입자가 고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얕은 눈 밭을 걷는 느낌이었다.
이안은 넘어진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보지 않고 오직 하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들리니? 거인의 숨소리가 들려."
그때였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 …… 쿵.
불규칙적인 진동은 지진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언가가 걷는 소리였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실루엣들이 나타났다.
‘긴 다리 생물들의 행렬’였다.
그 광경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찢고 나온 듯한
초현실적인 기이한 꿈과 같았다.
수십 미터 상공에 거대한 코끼리의 몸통이 떠 있었다.
그 육중한 몸통을 지탱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다리 네 개였다.
관절이 앙상하게 튀어나온 그 긴 다리들은
너무나 부드럽게 마치 땅에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움직이고 있었다.
이름 모를 탐험가의 에세이에서 본
'사원의 코끼리'였다.
코끼리의 등 위에는 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신전이 얹혀 있었다.
신전의 무게 때문인지 코끼리의 걸음은 특히나 느렸고,
신전의 깊은 곳에서부터 금색 광채가 흘러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이상(理想)을 짊어지고
느릿느릿 떠도는 방랑자처럼 보였다.
이안은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도 코끼리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 뒤로 '구멍 난 시계 기린'들도 보였다.
목이 비정상적으로 긴 기린들의 머리는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들의 몸통에는 구멍 난 모래시계가 박혀 있었다.
모래시계 구멍들 속에서 모래가
거대한 폭포처럼 떨어졌다.
떨어지는 모래가 너무나 많아
금세 모래가 동이 날 것 같았지만,
마치 무한히 모래를 생성하듯
그치지 않고 모래가 쏟아졌다.
행렬의 중간, 코끼리 한 마리가 멈춰 섰다.
코끼리는 긴 코를 늘어뜨려
이안의 얼굴 앞까지 가져왔다.
코끼리의 눈은 깊고 맑았다.
"불쌍한 아이로구나. 소년이여.
조심하지 않으면… 너도 곧…
우리처럼 긴 다리를 갖고 말 거야.”
코끼리의 낮은 목소리가 이안의 뇌리에 직접 울렸다.
어머니는 코끼리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거인은? 유리 거인은 어디 있지?"
코끼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긴 코를 들어 사막의 북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모래 폭풍이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기둥처럼 회오리치고 있었다.
"폭풍의 눈.
그곳에 그분이 있다.
하지만 조심해라.
그분은 마음속 깊은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니…"
코끼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위기는 그때 찾아왔다.
행렬의 끝자락, 기괴한 마찰음과 함께
모래 위를 기어 오는 거대한 거미 다리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상체는 인간이었으나
하체는 여덟 개의 털북숭이 긴 거미 다리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은 꿰매져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 남자의 등 위에는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마녀가 타고 있었다.
마녀는 남자의 거미 배에 안장을 얹고,
가죽 고삐를 쥔 채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녀는 이안과 어머니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녀의 살기어린 시선이 이안에 꽂혔다.
"어머, 저 아이의 다리는 참 싱싱하네.
근육이 탄탄하게 붙어 있구나."
마녀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여보, 당신 다리가 다 닳아서 삐그덕거리는데,
저 아이의 다리를 잘라서 갈아 끼우면 딱 맞겠어.
어떻게 생각해?”
거미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르륵'거리는 소리만 냈다.
“아이야, 네 다리를 주면 어머니는 행복하게 해 줄게."
마녀가 채찍을 휘두르자, 거미 남편이 흉측한 속도로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쳐!"
이안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 거미 다리가 모래를 찍는 소리가 타닥타닥
쫓아왔다.
이안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는 코끼리가 가리켰던 곳, 폭풍 속으로 몸을 던졌다.
폭풍의 외벽에는 살을 찢는 듯한 칼바람이 불었다.
민트색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산탄총의 총알처럼 이안의 피부를 때렸다.
이안은 휠체어 손잡이를 결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았고,
눈을 뜰 수조차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본능적으로 전진했다.
어머니의 억지가 만든 이 지옥의 끝에 무엇이 있든,
끝을 봐야만 했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소음이 뚝 끊겼다.
진공 상태의 적막. 공기는 차갑다 못해 폐부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식어 있었다.
폭풍의 눈, 그 고요한 중심부에는
거대한 구(球) 형태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고밀도로 응축된 무언가로
이루어진 듯한 유리로 이루어진
거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이라기보다 거대한 '건축물'에 가까웠다.
매끄러운 민트색 유리로 이루어진 거구는
하반신이 모래 속에 깊이 박힌 채 상체만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그 크기만으로도 하늘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폭풍의 틈새로 비쳐든 창백한 빛이 거인의 반투명한
신체를 통과하자,
거인은 사방으로 독성이 든
프리즘 같은 광채를 뿜어냈다.
거인의 얼굴에는 이목구비 대신,
그가 삼킨 수많은 몽상가들의 비명이 굴절된 듯한
기묘한 무늬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거야... 드디어 찾았어..."
어머니는 홀린 듯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생을 병마와 무기력에 찌들어 있던 다리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그녀는 바닥을 기어서라도 거인에게 다가갔다.
"거인님! 보십시오! 당신의 성에서 가져온 이 반지를!
나는 당신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나를 당신의 성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어머니가 치켜든 손가락에서 반지가
진동하며 민트색 빛을 발했다.
이안은 직감했다.
저 반지는 아버지의 선물이기 이전에,
미지의 무언가가 미리 던져놓은 미끼 같은 것이었다고.
"어머니, 안 돼요! 섣불리 다가가지 마세요! 저건…"
이안은 어머니를 붙잡으려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거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수상한 마력이
대기를 고정시켰다.
이안의 발이 투명한 유리에 박제된 것처럼
모래 위에 굳어버렸다.
근육은 비명을 질렀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안은 그저 고정된 시선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리 거인은 천천히 거대한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황홀경에 빠진 채
자신의 앙상한 손을 거인의 손바닥에 갖다 댔다.
그녀의 손끝이 거인의 차가운 표면에 닿는 찰나.
"쨍그랑-!!!"
사막의 정적을 찢는 소리는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유리가 박살 나는 듯한,
맑은 파열음이었다.
이안의 눈앞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인의 손길이 닿은 어머니의 반지에서부터
투명한 민트색 결정이 그녀의 온몸으로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그녀의 입술은
차가운 유리의 곡선과 함께 굳어졌다.
"엄마!!!!"
이안의 절규와 동시에,
거인과 어머니를 중심으로
거대한 민트색 소용돌이가 다시 폭발했다.
빛과 모래, 그리고 인간이었던 유리의 파편들이
뒤섞인 에너지가 공간을 휩쓸었다.
그 충격파는 이안의 신체를 종잇장처럼 밀어냈다.
이안은 공중으로 솟구치며 보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한 줄기 민트색 빛의 가루가 되어 거인의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을.
시야가 강렬한 민트색 섬광으로 물들었고,
이안의 의식은 그 차가운 빛 속으로 침몰했다.
이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서늘한 밤이 깊은 뒤였다.
희박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을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찔렀다.
이안은 사해 2 구역의 어느 이름 모를 구릉 아래
쓰러져 있었다.
입안에서는 쇠 비린내 섞인 피 맛이 났고,
온몸은 민트색 모래 알갱이들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통증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폭풍이 휘몰아치던 그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사막을 헤매며,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어디 있어요! 제발 대답 좀 해보세요!"
하지만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기괴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유리 거인도, 휠체어도, 그리고 평생을 허망한 꿈에
매달려 살던 어머니도 흔적조차 없었다.
오직 차가운 밤바람만이 민트색 모래를 쓸쓸하게
흩날리며,
방금 전의 폭동이 신기루였다는 듯 모든 흔적을
지워가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쯤, 이안은 탈진하여
차가운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안은 소금기가 얼굴에 하얗게 굳은 채,
가이드와 헤어졌던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지평선 너머에서 대지를 울리는 묵직하고
불규칙적인 진동이 다시 느껴졌다.
긴 다리 생물들의 행진이었다.
어제 보았던 그 행렬이, 끝없는 띠처럼 다시 소년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멍하니 그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행렬의 맨 마지막의 한 존재 앞에서
이안의 숨이 멎었다.
그것은 투명한 유리의 다리를 가진
움직이는 유리성이었다.
전신이 투명한 민트색 유리로 빚어진 그 존재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것은 하나의 성인 동시에 전면부에
익숙한 여인의 얼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안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 머니?"
이안이 목멘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유리 성은 멈추지 않았다.
이안의 눈에 비친 생명체는,
그저 거인이 수집한 ‘일종의 표본’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소원은 사막이라는 거대한 진열장에 전시될 장식품으로 전락한 것일까.
더 이상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며,
오직 타오르는 집착의 기억만을 품은 채
사막의 일부가 되어 행진을 보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 성은 소리 하나 없이,
기괴할 정도로 우아하게 이안의 앞을 지나쳐갔다.
투명한 성 안에는 화려한 금은보화와 함께
커다란 반지 하나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성 내부의 공간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 유리 피부를 만지는 순간,
자신의 손가락 끝마저 차가운 유리로
변해버릴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소년은 가이드가 있는 언덕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멀어지는 유리 성의 반짝임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른거렸다.
가이드는 초조하게 낙타 위에서 곰방대를 빨고 있었다.
이안과 어머니를 지금껏 기다린 것이었다.
멀리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소년의 형체를 발견한
가이드가 낙타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소년의 곁에 있어야 할 휠체어와
노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가이드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뭐 하다 이제 돌아오는 거요?
그나저나… 당신 어머님은 어디 계신 거요?
혼자 돌아온 겁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이드의 시선이 소년의 손가락을 향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그 기이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가이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당신 어머니의 반지였던 것 같은데,
왜 당신이 그걸 끼고 있는 거지?
설마… 어머니를 사막에 버려두고 반지를…?”
그는 허리춤의 총에 손을 올리며
경계의 자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안은 가이드의 비난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의 약지를 보고 있었다.
반지는 단순히 손가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지의 경계면에서부터 가느다란 민트색 실핏줄이
번개 자국처럼 손가락을 타고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실핏줄이 지나는 자리마다 살점이 딱딱한 유리의
질감으로 변하며 투명하게 굳어갔다.
‘이게 언제부터 내 손가락에… 안돼… 안돼!!!’
어머니의 반지는 이안의 손가락을 으스러뜨릴 듯
조여왔고,
이내 차가운 유리의 냉기가 혈관을 타고
몸속 깊은 곳으로도 미약하게 느껴왔다.
이안은 미친 듯이 반지를 빼내려 했지만,
이미 반지는 뼈와 융합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싫어!”
이안은 가이드의 허벅지에 매달린 가죽 칼집에서
단검을 낚아채듯 뽑아 들었다.
가이드는 이안이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고 확신하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멈춰! 당장 칼 버려! 어머니를 버리고
이제 나한테까지 이상한 짓을!”
가이드가 장전된 총구를 이안에게 겨눴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이안의 시선은 오직 자신의 왼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기력하게 평생을 휘둘려 왔던 소년의 눈에
처음으로 생존을 향한 처절한 광기가 어렸다.
“끊어내야 해… 빼내지 못하면 잘라서라도!”
이안은 단검을 거꾸로 쥐고
자신의 약지 마디를 향해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사막의 정적을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쇠붙이가 뼈를 가르는 무딘 소리와 함께
민트색 가루가 섞인 선혈이 모래 위로 튀었다.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생살을 도려내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감각이
뇌를 헤집어 놓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반지를 통해 타고 올라오는 소름 끼치는 냉기가 이미 손목까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덜렁거리는 손가락 마디를 아등바등 대며
칼날로 썰어내고
가죽처럼 질긴 신경을 이빨로 깨물어서라도
떼어내려 발버둥쳤다.
마침내, ‘쨍그랑’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 조각이 모래 위로 떨어졌다.
이안은 피가 솟구치는 손을 움켜쥐고,
잘려 나간 손가락을 발로 차 언덕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아… 하아……”
분수처럼 쏟아지는 선혈과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해방감이었다.
시원하고도 무서운.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소년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하늘을 한 번 바라본 뒤, 그대로 힘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당황한 가이드가 총을 내리고 달려와
소년의 상태를 확인했다.
잘려 나간 손가락의 단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이드는 급히 손을 지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보게, 정신 차리게!
도대체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민트색 사막 위로 찬란한 해가 떴다.
사막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이름 없는 욕망들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끝)
https://brunch.co.kr/brunchbook/khimyo
기묘한 환상 도서관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구독, 좋아요, 후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