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환상 도서관 #4
탑의 창문을 통해 엘라는 지난 9년 동안 3,285번 하늘이 어두워지고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딸아.
이 목걸이는 우리 왕국을 악마로부터
지켜주는 보물이야."
11살의 엘라에게 며칠 동안 진행된
마법의 의식이 끝난 후 목걸이를 걸어주던 아버지,
국왕의 손은 따뜻하면서도 떨리고 있었다.
목걸이 끝에는 붉은빛이 도는 투명한 보석,
'시간의 돌'이 매달려 있었다.
국왕은 엘라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우리는 악마와 싸우고 있다고.
악마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장 순수한 혈통인 너의 힘이 필요하다고.
"네가 20살이 되는 날,
목걸이가 빛날 것이다.
그때 탑에서 나오너라.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9년이 지난 지금도
엘라의 귓가에 이명처럼 남아 있었다.
엘라는 탑 안에서 혼자 자랐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벽의 구멍으로 식사가 들어왔고, 책과 장난감이 주어졌다.
엘라는 아버지를 믿었다.
자신이 이 지루하고 고독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곧 나라를, 모두를 구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리고 오늘, 엘라의 20번째 생일.
목걸이의 붉은 보석이 심장 박동처럼 진동하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끼기긱.
녹슨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탑의 철문이 스스로 열렸다.
9년 만에 맡는 바깥공기는 상쾌했다.
엘라는 떨리는 다리를 옮겨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탑 밖의 세상은 눈이 부시게 화려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왕국의 거리는 색색의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소리가 없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시장의 활기,
아이들의 울음소리 대신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와 솜뭉치가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엘라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말을 걸었다.
행인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단추로 된 눈, 솜으로 채워진 몸,
꿰매진 입을 가진 거대한 곰 인형이었다.
"……."
곰 인형은 엘라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더니,
태엽이 감기는 소리를 내며 무심하게 지나쳐갔다.
엘라는 뒷걸음질 쳤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를 끄는 말은 목각 인형이었고,
마부는 양철 로봇이었다.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는
헝겊으로 만든 인형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왕국 전체가 거대한 장난감 상자처럼 변해 있었다.
겉보기에는 테마파크처럼 보였지만,
과거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 엘라의 표정은
점점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엘라는 아버지를 찾아야 했다.
왕궁으로 향하는 길은 기억 속에 선명했다.
인형들은 엘라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기괴한 춤을 추듯 거리를 활보했다.
왕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알현실까지 뛰어가는 동안 경비병 인형들은
창을 엑스 자로 교차했다가 엘라의 목걸이를 보고는 길을 터주었다.
알현실의 문을 열자,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엘라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옥좌에 앉은 남자는 엘라의 기억 속 아버지보다 훨씬 젊었다.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피부,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근육질의 몸.
9년 전보다 오히려 20년은 더 젊어진 모습이었다.
국왕은 엘라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낯선 눈빛이었다.
"누구냐, 너는."
"저예요, 엘라.
아버지가 탑으로 보내신 엘라요.
오늘이 제가 스무 살이 되는 날이에요."
엘라가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붉은빛이 국왕의 눈동자에 비쳤다.
그제야 국왕의 눈이 커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는 옥좌 팔걸이를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다.
"엘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국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엘라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딸을 다시 만난
아버지의 기쁨이 아니었다.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을 발견한 사람의 난처함,
그리고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계산적인 눈빛이었다.
"그래, 내 딸아.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어."
국왕이 엘라를 안았다.
하지만 엘라는 아버지의 품에서 온기가 아닌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국왕의 시선은 엘라의 얼굴보다는
그녀의 목에 걸린 '시간의 돌'에 꽂혀 있었다.
엘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아버지, 밖에... 사람들이 왜 다 인형으로 변한 거죠?"
국왕은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도로 넣어라."
"네?"
"엘라는 탑으로 다시 들어가야 해."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알현실 구석에 서 있던 근위병 인형들이
덜그럭거리며 엘라에게 다가왔다.
엘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잡아! 놓치면 안 돼!"
왕궁 전체에 경보가 울렸다.
인형들이 기괴한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며
엘라를 포위해 왔다.
막다른 복도에 몰린 엘라가 주저앉으려는 찰나,
천장의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인형들을 덮쳤다.
"이쪽입니다, 공주님!"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엘라의 팔을 낚아챘다.
그는 왕궁의 비밀 통로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남자는 엘라를 데리고 하수구를 통해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두운 숲 속에 도착해서야 남자는 후드를 벗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 그는 국왕의 최측근이자
군단장이었던 '리우'였다.
"리우 경? 당신이 왜..."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저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가시죠."
리우는 엘라의 손과 허리를 잡고 창문을 깨고
하늘을 날아 자취를 감추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리우와 엘라는 국경 근처 숲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엘라는 리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버지는... 악마와 싸우고 계신 게 아니었어요?"
리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른 장작을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사실, 싸운 게 아니라 거래를 하신 겁니다.
공주님은 제물이셨고요."
리우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국왕은 늙어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
그는 영원한 젊음을 얻기 위해
전설 속의 '악마'를 찾아 헤맸고,
결국 땅 밑에 봉인된 악마를 만났다.
악마는 국왕에게 영원한 젊음과 마법을 주는 대가로,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시간의 돌과 함께 공주를 탑에 가두어 둘 것을
요구했다.
“공주님은 이용만 당해오신 겁니다.
국왕의 야욕을 위해서..."
리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지배를 영구히 하기 위해,
백성들의 영혼을 인형 속에 가두었습니다.
아이와 같은 동심만 남겨
자신에게 절대복종하게 만들었죠.
제 가족도,
제 부모님도 모두 솜뭉치와 태엽 덩어리가 되었고,
인간 시절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렸습니다."
리우의 눈에 증오가 이글거렸다.
"저는 이 저주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주님이 필요해요."
"제가요? 전 아무 힘도 없어요."
“공주님과 '시간의 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왕의 횡포를 멈추기 위해서는
그에게 힘을 준 악마가 깃들어 있는
검은 나무를 파괴해야 합니다.”
리우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십자가 모양을 그렸다.
"저는 사실 악마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악마는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존재하고,
국왕에게 영원한 젊음까지 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약점이 있습니다."
리우가 십자가의 가로축을 가리켰다.
"세계를 이루는 커다란 두 축은 시간과 공간입니다.
하나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다른 하나에 더 크게 구속되게 마련이죠.
악마는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대신,
'공간'에 매우 큰 지배를 받습니다.
특히 인간 세계에서는 특정 공간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죠.”
"그렇다면 악마의 위치를 알고 계신단 말인가요?”
"네. 제가 어렸을 때,
국왕을 수행해 갔던 곳.
북쪽 설산 지하 있는 용암 동굴입니다.
용암 동굴 안에 지옥과 인간 세계를
연결해 주는 검은 나무가 있습니다.
악마는 그 나무를 매개로 하여 인간 세계에서
인간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무만 파괴한다면
악마는 인간 세계에서 사라지고,
국민들 또한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엘라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잃어버린 9년이
아버지의 욕망을 위한 제물이었다니.
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용암 동굴에 가기 위한 첫 관문인
북쪽의 설산에 다다랐을 때,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늑대인간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바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으르렁거렸다.
"인형 왕국 놈들의 냄새가 나는군.
하지만 신선한 인간의 냄새도 나."
늑대인간은 굶주린 듯 입맛을 다셨지만,
당장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의 동굴 주변에는 이미 사냥한 짐승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배가 부른 탓이었다.
"흠… 갑자기 웬 인간이 여기에 왔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너희들은 운이 좋군.
배가 부르니 오랜만에 인간들과 대화나 좀 해볼까.
간단한 퀴즈를 맞히면 보내주지.
대신, 틀리면 너네들이 나의
츠지기리(辻斬り)*** 상대가 될 거야. 흐흐흐.”
츠지기리(辻斬り) -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이 거리에서 무작위로 지나가는 사람을 칼로 베어 살해하는 행위를 뜻하며, 이는 주로 칼솜씨를 시험하거나 단순히 재미로 행해졌다. 소설 속 세계관과 에도 시대의 연관성은 없고 온전히 단어만 차용함.
늑대인간은 칼날처럼 번쩍이는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늑대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 엄청난 완력을 얻기 위해.
둘,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살기 위해.
셋, 인간의 고기와 피를 마음껏 마시기 위해."
엘라는 리우를 쳐다보았다.
리우는 긴장한 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엘라는 늑대인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는 짐승의 야수성,
악마와 같은 광기와 살의 뒤로 깊은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인간 시절의 기억은 잊혀진지 오래겠지.
혹시 이 자도 악마와 거래를 해서 늑대 인간이 된 걸까?
"정답은...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살기 위해?"
엘라는 말했다.
늑대인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정답이구나. 똑똑한 인간이군."
늑대인간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하늘에 뜬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인간 시절이었을 때는 나약하고,
괴롭힘 당하고, 가족에게도 쓰레기 취급을 받기 일쑤였지.
하지만 어느 날, 붉은 보름달이 뜨고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천하무적이었어.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했지.
그 순간의 쾌락, 누군가보다 우위에 서는 안도감...
나는 그 짧은 변신의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악마에게 빌었지."
그는 자신의 칼날 같은 손톱과 팔을 내려다보았다.
늑대인간은 손톱으로 뒤쪽의 길을 가리켰다.
"너희도 악마를 만나면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지
기대가 되는군.
사실 그게 너희를 오늘 죽이지 않는 이유다.
폐광 입구는 저쪽이다."
엘라와 리우는 거대한 폐광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독성 가스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리우가 마법을 써서 빛의 구체를 띄우자,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끄어어어..."
그들은 좀비였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뼈가 드러난 채,
누더기를 걸친 존재들.
그들은 엘라와 리우를 공격하려 했지만,
리우가 빛을 강하게 비추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때, 엘라는 구석에 웅크린 작은 체구의 좀비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익었다.
썩어가는 얼굴이었지만,
어릴 적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친구 '안나'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안나? 너 안나니?"
좀비가 고개를 들었다.
탁한 눈동자에서 눈물 대신 고름이 흘러내렸다.
"공주님...?"
안나였던 좀비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은 우리의 동심을 빼앗고 인형으로 만들지 못한 실패작들을
이 폐광에 매장해 버렸어요.
동심을 잃어버린 우리는... 너무나 빨리 늙어가기 시작했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누군가 악마에게 기도했어요.
우리를 죽게 하지 말아 달라고."
안나는 자신의 썩은 팔을 들어 보였다.
"악마는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우리를 죽지 않게 해 주셨죠.
몸이 썩어 문드러져도 의식은 생생해요."
그때, 동굴 깊은 곳에서 쿵, 쿵 하는 진동이 울렸다.
좀비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공포가 아닌,
광기에 찬 눈빛으로 변했다.
"하나가 되어야 해... 더 이상 흩어지면 아파..."
안나도 다른 좀비들처럼 중얼거렸다.
안나는 갑자기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다른 좀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곳에서부터 좀비의 몸들이 난잡하게 엉겨 붙은 커다란 지렁이가
난폭하게 몸을 비틀며 다가왔다.
흩어져 있던 안나를 포함한 다른 좀비들도
거부할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지렁이와 하나가 되었다.
수백 명의 좀비들의 살과 살이 융해되고
뼈와 뼈가 뒤엉켜 지렁이는 더욱 거대해졌다.
지렁이의 표면에는 수많은 좀비 얼굴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박혀 있었다.
"도망쳐요!"
리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거대 지렁이는 미친 듯이
폐광을 헤집고 다니며 벽을 들이받았다.
"이쪽으로!"
안나의 얼굴이 박힌 지렁이의 꼬리 부분이
엘라 앞을 스치며 외쳤다.
엘라는 본능적으로 안나의 튀어나온 팔 뼈를 잡았다.
리우도 엘라의 허리를 잡고 지렁이의 등에 올라탔다.
"꽉 잡아!"
"쾅!"
지렁이가 막다른 벽을 뚫고 지나갔다.
그곳은 바닥이 없는 낭떠러지였다.
거대 지렁이와 엘라,
리우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붉은빛이 강해지고 숨 막히는 열기가 차올랐다.
지렁이는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용암 지대 한복판의 흑요석 바닥에 처박혔다.
"끄아아아악!"
충격으로 지렁이의 몸이 터져 나갔다.
이에 따라 몸을 구성하던 좀비들도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들은 뜨거운 용암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는 대신,
기이한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따뜻해... 이제… 안 아파..."
안나를 비롯한 좀비들은
스스로 용암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들은 녹아내리면서야
비로소 안식을 찾은 듯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그렇게 시시하게 갈 거면
나에게 왜 소원을 빈 것이지.
흐흐흐."
거대한 용암 동굴 전체를 울리는
웅장하고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라와 리우는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암 호수 한가운데,
잎이 하나도 없는 거대하고 뒤틀린
검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의 뿌리는 용암 깊숙이 박혀 있었고,
가지는 마치 사람의 손처럼
하늘을 향해 비틀려 있었다.
"악마..."
엘라가 중얼거렸다.
바로 저것이 지옥 세계의 악마를
담고 있는 그릇 같은 매개체였다.
리우가 앞으로 나섰다.
엘라는 리우가 강력한 마법을 통해
단번에 나무를 파괴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우는 검은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약속대로 공주를 데려왔습니다.
위대한 존재여."
엘라의 눈이 커졌다.
"리우?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제 저에게 국왕의 힘을 주십시오.
그 늙은이를 폐위시키고 제가 왕이 될 힘을!"
리우는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사실 그의 진짜 목표는
공주와 왕국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나무의 줄기에서
사람의 얼굴 형상이 니타났다.
나무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언제나 즐겁군.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그래, 이해는 한다.
후후후.
약속은 지켜야지.
하지만 그전에...
환술은 이제 풀도록 하거라,
리우."
리우는 악마의 말에 따라 주문을 외웠다.
공주의 눈에서는 별 다른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나무 가지가 뱀처럼 뻗어 나와
엘라의 앞에 거울 하나를 들이밀었다.
"네가 누군지,
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보아라,
가엾은 아이야."
엘라는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거울 속, 20살의 아름다운 공주는 없었다.
피부는 쭈글쭈글하게 말라비틀어졌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듬성듬성 빠져 있었으며,
이빨도 몇 개 남지 않은 노파가 서 있었다.
"이게... 나…?”
"탑 안에서 너는 9년을 기다린 게 아니라,
90년에 다다르는 세월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 남자가 너에게 몰래 먹인 약과 마법이
너의 인지를 왜곡시켰을 뿐."
악마의 말에 엘라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거칠고 늘어진 피부가 만져졌다.
리우가 일어서서 엘라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놀랐나?
안타깝지만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시간의 돌을 내게 넘겨라."
리우가 엘라에게 다가왔다.
엘라의 몸이 분노로 떨렸다.
아버지에게 속았고,
9년이 아닌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겼으며,
리우에게마저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으아아아악!"
엘라는 절규했다.
“어차피 시간은 지났고 일은 벌어졌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녀는 리우가 방심한 틈을 타,
품속에 숨겨두었던 늑대인간이 몰래 공주에게 건넨
날카로운 손톱 조각을 꺼내 들었다.
푹!
단검처럼 예리한 뼛조각이
리우의 목을 꿰뚫었다.
"윽!"
리우는 눈을 부릅뜬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 엘라야... 그렇지.
이제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 순간,
엘라의 목에 걸린 시간의 돌이
붉은빛을 내며 깨져버렸다.
목걸이에서 나온 붉은빛은 곧바로 엘라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엘라의 배가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이내 뱃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절규 끝에
엘라의 다리 사이로 알이 굴러 나왔다.
알은 몇 분간 공중을 부유하더니
유리 조각 같은 파편을 분산시키며 깨졌다.
그 안에서,
검은 점액이 꿈틀대며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20살의 엘라와
똑같이 생긴 여인으로 변모했다.
알에서 나온 존재는
늙은 엘라에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너의 정신적 죽음과 리우의 물리적 죽음.
이로 인해 나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공간에까지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전 너희 아버지가 마법의 의식을 진행할 때
나는 너의 배 속에 작은 씨앗을 하나 심어두었지.
너가 리우를 죽인 순간
나는 너의 마음에 깃들 수 있었고,
그 후 다시 한번 너의 배 속의 씨앗으로 이동하여
이렇게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제 나는 시간뿐만이 아닌,
공간의 구속도 받지 않게 된 완벽한 자유를 얻었다.
이 점은 너에게 고마워해야겠군.
하지만 너는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겠지.
너에게 내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점은 좀 아쉬워.”
악마는 자신의 매끈한 팔다리를 감상하며 웃었다.
그 후 악마는 손을 뻗어
마법진을 형성한 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국왕이 있는 지상으로 갔을 것이다.
온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악마가 사라진 용암 동굴은 다시 고요해졌다.
리우의 시체 옆에 덩그러니 남겨진
늙은 엘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젊음도, 가족도,
심지어 자신의 존재 자체까지
악마에게 빼앗긴 셈이었다.
"추워."
용암의 열기 속에서도
엘라는 뼈가 시리는 추위를 느꼈다.
그때, 검은 나무의 뿌리 쪽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믿었던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한... 인간...
살고 싶다면... 이리로..
검은 나무의 밑동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곳은 악마가 빠져나간 뒤 남은 껍데기이자,
또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그 안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엘라를 간절히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에서 무한한 고통을 받는
영혼들의 것이었다.
엘라는 기어갔다.
쭈글쭈글한 손으로 나무뿌리를 잡고,
그 어둡고 깊은 구멍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엘라의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영원히 불타는 고통과
비명이 존재하는 곳.
하지만 그곳에 있는 영혼들은 엘라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악마의 알을 잉태한 사람이자,
자신들을 괴롭히던 악마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다 버려진 자라는 것을.
당신은... 우리의 새로운 주인...
당신이 느낀 고통으로 인해 세상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질 거야.
지옥의 망령들이
엘라의 지친 몸을 감싸 안았다.
엘라는 편안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엘라의 평온한 두 눈에서
진한 피 눈물이 흘러나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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