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석(石)사

기묘한 환상 도서관 #5

by 기묘 Khimyo


Chapter 01. 루나리스와 마법석


"후우..."


루안은 빗자루질을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이 시릴 만큼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설원에 내리 꽂히며 포근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루안의 시선은 그 너머,

마을 가장자리를 향했다.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는 투명한 돔 모양의 결계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결계 너머의 세상은 지옥이었다.


북대륙의 끝, '잭 프로스트' 산맥의 살인적인 눈보라가 결계를 들이받으며 흩어지고 있었다.


이곳 '루나리스(Lunaris)'는 그 척박한 설산 분지에 자리 잡은 기적이자 기이한 온실이었다.


"루안, 오늘도 부지런하구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안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웃집 제빵사 마사 아주머니였다.


"안녕하세요, 마사 아주머니."


"그래. 리나는... 좀 어떠니? 오늘이 고비라고 들었는데."


그녀는 걱정스러운 말투와 달리, 입가에는 온화하고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투박하게 깎인 뗀석기 모양의 회색 돌 하나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돌 표면에 새겨진 주황색 룬 문자가 희미하게 박동하며 웅- 웅- 거리는 소리를 냈다.


루안의 뺨에 닿을 정도로 따뜻한 열기가 그 돌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마을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힘, **'마법석'**이었다.


"누나는... 선생님 말씀으로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아요."

"저런, 쯧쯧. 리나처럼 착한 아이가 벌써..."


마사는 혀를 찼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슬픔보다 어떤 경건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위로하듯 루안의 손을 잡았다.


순간 루안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두꺼운 모직 소매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사람의 살색이 아니었다.


시멘트 반죽처럼 칙칙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잿빛.


마법석을 오랫동안 사용한 마을 사람들이 걸리는 루나리스 마을만의 토착병인 석화병(石化病).


"그래도 고통 없이 가는 거니 다행이야.

탑으로 가면 하늘 위 요정 세계에서 요정님들이 맞이해 주시겠지.

너도 너무 슬프게만 생각하진 마려무나."


마법석이 주는 편리함의 대가.


그 온기에 영혼을 너무 오래 노출시킨 자들에게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병.


루안은 잡힌 손을 빼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외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누나가 죽어가는데 그게 어떻게 다행이지?'


5년 전이 떠올랐다.


불치병에 걸린 누이를 살리겠다며,

어린 루안은 리나를 업고 저 잭 프로스트의 눈보라를 뚫고 이곳에 왔다.

이 마을의 이장이자 마법석을 발명했다는 위대한 마법사,

알케스터라면 고칠 수 있다는 소문 하나만 믿고서.



알케스터는 기적을 행했다.

누이의 불치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하지만 그 기적의 대가는 가혹했다.


치료를 위해 사용한 수많은 마법석 기구들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누이의 몸이 서서히 돌로 변한 것이다.


"어머, 이장님이 오시는구나."


마사의 들뜬 목소리에 루안은 고개를 돌렸다.

진료소 쪽에서 낡은 가죽 가방을 든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긴 머리카락과 수염,

권위가 느껴지는 짙은 푸른색 로브.


가슴에는 주황빛 눈이 새겨진 펜던트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 마을의 이장이자 유일한 의사인 알케스터였다.


"루안, 늦어서 미안하구나. 아침부터 급한 환자가 있어서 말이야."


그는 더없이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루안은 그 웃음 뒤에 가려진 미세하고 묘한 건조함을 느꼈다.

마치 환자를 보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점검하러 온 기술자처럼.


"선생님... 누나가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해요.

귀에서... 긁는 소리가 들린다고요."


"긁는 소리?"


알케스터의 하얀 눈썹이 꿈틀 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덤덤한 표정으로 가방을 고쳐 들었다.


"석화가 뇌신경 근처까지 진행된 모양이군.

청각 신경이 굳어가면서 생기는 이명(耳鳴)이다.

서둘러야겠어."


알케스터의 걸음이 빨라졌다.

루안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 뒤를 따랐다.



Chapter 02. 진찰


루안의 집은 찜통처럼 더웠다.

방 한가운데 놓인 마법석 난로가 과도할 정도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룬 문자가 새겨진 투박한 돌들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우..."


침대 위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 누워 있었다.


루안의 누나, 리나였다.


목 아래로는 이미 인간의 부드러운 살결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거칠고 딱딱한 회색 암석이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얼굴 근육과 입술,

그리고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뿐이었다.


"누나, 선생님 오셨어."


루안이 다가가자 리나가 힘겹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메마른 소리를 토해냈다.


"루안... 시끄러워... 너무 시끄러워..."


"리나야, 괜찮다. 내가 왔다."


알케스터가 침대 옆에 앉아 청진기를 댔다.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 돌로 변한 리나의 가슴에 닿자

'깡, 깡' 하는 마찰음이 났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은 사물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선생님... 거짓말..."


리나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감각이 없어진다면서요... 편안해진다면서요...

아니야... 더 잘 들려... 내 몸 안에서...

사각... 사각... 긁고 있어... 뼈를 긁고 있어..."


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물조차 뺨을 타고 흐르다

회색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환각을 넘어서는,

생생한 공포였다.


"환청이다.

리나야, 진정하렴.

뇌가 굳어가는 과정에서 오는 혼란일 뿐이야."


알케스터는 익숙하다는 듯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유리관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걸 맞으면 편안해질 거다.

신경 안정제란다."


"싫어... 싫어! 내 몸 안에 벌레가 있어!

루안! 살려줘! 안에서 나를 파먹고 있다고!"


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돌로 변해 굳어버린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 근육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필사적인 모습에 루안은 뒷걸음질 쳤다.


"루안, 누나를 잡아라!

몸부림치면 바늘이 부러진다!"


알케스터의 호통에 루안은 얼떨결에 누나의 머리를 잡았다.

손에 닿은 리나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으흑... 으극..."


알케스터는 망설임 없이 리나의 목,

아직 돌로 변하지 않은 유일한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약물이 들어가자 리나의 눈동자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려있던 얼굴이 강제로 이완되며 축 늘어졌다.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루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누나 말이 사실이면요?

정말 몸 안에 뭐가 있는 거면..."


"루안."


알케스터가 주사기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석화병 말기 환자들은 뇌까지 딱딱하게 굳어간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공포와 환각을 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임상 반응이야.

네가 동요하면 리나는 더 불안해한다."


루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의 말이었다.

그를 믿어야 했다.


아니, 믿지 않으면 지금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리나는 전신이 완전히 돌로 변했다.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완전히 멈춰버렸다.

완벽한 석상이 되었다.

하지만 루안은 보았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입모양이 소리 없이 벙긋거리며

'도와줘'라고 발음하는 것을.


그리고 완전히 돌이 된 그녀의 가슴팍에서,

아주 미세하게 툭 하고...

무언가가 안에서 밖을 치는 듯한 진동을.


Chapter 03. 장례식


다음 날 아침, 리나의 이송식이 진행되었다.

하늘은 잔인할 정도로 맑았다.

투명한 돔 모양의 결계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 덮인 마을을 보석처럼 비추고 있었다.


"축하하네, 루안. 리나는 선택받은 거야."


"요정의 나라로 가는 길이니, 웃으며 배웅해 주자고."


검은 로브를 입은 마을의 지도층들이 앞장섰고,

그 뒤로 두꺼운 털옷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줄지어 따랐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 대신 알 수 없는

담담함 속에 기묘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행렬의 옆으로는 주황빛을 내는

작은 마법석들이 둥둥 떠다니며 길을 밝혔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아름답지만,

어딘가 현실감 없는 광경이었다.


행렬의 목적지는 마을 서쪽 절벽 끝,

안갯속에 우뚝 솟은 '회색 탑'이었다.


매끄러운 시멘트가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밝은 회색 암석들을

억지로 쌓아 올린 듯한 높은 건축물.


그것은 신성한 사원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공장 굴뚝이나 소각장에 가까워 보였다.


'끼이익-.'


탑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루안은 훅 끼쳐오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향긋한 꽃향기 밑에 깔린

비릿한 쇠 냄새와 곰팡이 냄새.


알케스터와 인부들은 수레에 실린

리나의 석상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탑의 내부는 거대한 원통형 구조였고,

벽면을 따라 벌집처럼 수천 개의 벽감(보관함)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석화병 환자들이

돌이 된 채 잠들어 있었다.



"자, 이제 작별 인사를 하렴."


알케스터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안은 리나의 석상 앞에 섰다.


회색 돌로 변해버린 누나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루안은 떨리는 손으로 석상의 뺨에 손을 댔다.

차가워야 할 돌덩이가 미지근했다.


아니, 뜨거웠다.


"어...?"


루안이 흠칫 놀라 손을 떼려던 찰나,

손바닥을 통해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

아니었다.


그것은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가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긁어대는 진동에 가까웠다.


"선생님! 누나가...

누나가 아직 따뜻해요!

안에서 뭐가 움직인다고요!"


루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알케스터는 루안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노인의 악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만 가자.

영혼이 떠나는 과정에서 남는 잔열(殘熱)이다.

너무 오래 있으면 산 사람에게 좋지 않아."


"아니에요!

이건 잔열이 아니야!

귀를 대보세요!

소리가 들린다고요!"


루안이 저항하며 석상에 귀를 대려 했지만,

알케스터는 억지로 루안을 탑 밖으로 끌어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들이 루안의 앞을 막아섰다.


'쾅-.'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루안은 보았다.


어두운 탑의 천장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리나의 석상 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루안은 이때 강하게 느꼈다.


5년 동안이나 루나리스에 살았지만

이 마을에는 여전히 그가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 누나와의 작별도 마무리되었으니,

루안은 얼른 이 마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Chapter 04. 잠입


그러나,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루안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기 전 딱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안에 무언가가 분명 있었어...'


누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리고 탑에서 느꼈던 그 기분 나쁜 움직임.


알케스터의 서두르던 태도.


'확인해야 해.

만약 누나가 아직 살아있다면?

돌 속에 갇혀서,

무언가에게 산 채로 갉아먹히고 있는 거라면?'


새벽 2시.

루안은 진료소 뒷문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루안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 들고 창문을 내리쳤다.


'챙그랑!'


요란한 파열음이 났지만,

밖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에 묻혔다.


루안은 깨진 창틈으로 기어 들어갔다.


손바닥이 유리에 베여 피가 났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료실 안은 어두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하고

차가운 달빛만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루안은 곧바로 알케스터의 개인 서재로 직행했다.


평소 알케스터가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잠긴 책상 서랍.


루안은 진료대에 있던 쇠지렛대를 가져와

서랍 틈에 끼우고 체중을 실었다.


'우지끈.'


나무가 쪼개지며 서랍이 열렸다.


그곳에는 돈이나 보석 대신,

낡고 두꺼운 검은 가죽 노트가 한 권 들어있었다.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다.


루안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창백한 회색 종이 위에는

알케스터의 필체로 빽빽한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앞부분은 평범한 진료 기록 같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용은 기괴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리나'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발견한 순간,

루안의 호흡이 멈췄다.



[실험체 번호 25048: 리나]

진행도: 100% (완전 고치화 완료).

상태: 최상급. 과거 불치병 치료 명목으로 고농도 마법석 포자에 지속적으로 노출됨. 예상치 못한 급속한 석화(고치 형성)가 진행됨.

특이사항: 임종 직전 체내 기생체의 활동음을 듣고 발작함. 즉시 신경 차단제 투여하여 제압.

비고: 이 정도 영양 상태라면 여왕급 성체가 부화할 것으로 기대됨. 오늘 밤 자정, 탑에서 부화 유도제 투여 예정.


"기생체... 고치...?"


루안은 뒷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충격적인 해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인간의 갈비뼈 안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괴생명체의 그림.


그것은 단순한 벌레가 아니었다.


통통하고 주름진 애벌레 같은 몸통에서,

기괴하게 길고 뒤틀린 수많은 다리가 뻗어 나와

인간의 장기를 휘감고 있는 끔찍한 형상이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루안은 입을 틀어막았다.


기록에 따르면 회색 돌로 변한 피부는 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약한 유충을 외부의 추위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단단하게 바꾸는 번데기 같은 껍질로 보였다.


또한 알케스터는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숙주로 삼아,

그들의 몸속에서 괴물을 길러내는 일종의 사육사였다.


'누나는... 누나는 죽은 게 아니야.!'


배신감과 공포가 머릿속을 하얗게 태워버렸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맹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루안은 노트를 품에 찔러 넣고

진료실 구석에 있던 대형 해머를 집어 들었다.


루안은 깨진 창문으로 다시 뛰쳐나갔다.

목적지는 탑이었다.



Chapter 05. 다시 탑으로


탑의 거대한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루안은 해머로 자물쇠를 몇 번이나 내리쳤지만,

마법석으로 강화된 쇠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젠장... 열려라 좀!"


시간이 없었다.

루안은 탑 뒤쪽,

오물이 흘러나오는 배수구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안은 쇠창살을 해머로 비틀어 열고,

좁고 미끌미끌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통로로 들어선 순간,

훅 끼쳐오는 악취에 루안은 헛구역질을 했다.


그것은 단순히 하수구 냄새가 아니었다.

썩은 고기와 독한 약품,

그리고 눅눅한 곰팡이가 뒤섞인 역겨운 냄새.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사각...


밖에서는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이곳 내부에서는 수천 배로 증폭되어 울리고 있었다.


루안은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탑의 중앙 공동(空洞)으로 들어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원통형 벽면 전체에,

사람 모양을 한 돌들이 낮과는 달리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벽면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꿀렁거리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어지러웠다.


저 수많은 돌 안에 무언가가 정말 있는 것일까?


천장 위에서는 희미한 주황색 조명이

뚝뚝 떨어지는 점액들을 비추고 있었다.


루안은 공포를 짓누르며

나선형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올라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3층, 4층...

그리고 마침내 꼭대기 층,

리나의 이름이 적힌 벽 앞에 도달했다.


"누나!"


리나의 석상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아침과는 모습이 달랐다.


리나의 회색 얼굴 정중앙,

미간에서부터 턱까지 거대한 금이 가 있었다.


쩍. 찌지직.


갈라진 틈 사이로

누런 점액질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젖은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루안은 비명을 지르며 해머를 들어 올렸다.


"비켜! 내가 꺼내줄게! 저리 가란 말이야!"


루안이 해머를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파창-!


리나의 석상이 내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날카로운 돌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안은 팔로 얼굴을 막으며 뒤로 넘어졌다.


뿌연 돌가루 먼지 사이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것은 나방이 아니었다.


가고일처럼 두껍고 투박한 상체,

그 밑에 달린 여러 개의 곤충 다리,

그리고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회색 피부를 가진 괴물이었다.


놈은 젖어있는 거대하고

묵직한 날개를 펄럭이며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루안을 절망케 한 것은

괴물의 외형이 아니었다.


놈의 꼬리였다.


바위처럼 뭉툭하게 생긴 꼬리 끝부분.


그곳에 리나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눈을 감고,

아주 평온하게 잠든 표정으로.


마치 조각가가 바위에 새겨놓은 부조처럼,

누나의 얼굴은 괴물의 꼬리 일부가 되어 있었다.


"키이이이익-."


괴물이 날개를 털자,

반죽 발효 구멍 같은 피부 조직에서

회색 가루가 루안의 얼굴로 쏟아졌다.


루안은 기침을 하며 바닥을 기어 뒷걸음질 쳤다.

해머를 잡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늦었구나, 루안."


어둠 속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알케스터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인자한 마을 이장이 아니었다.



그는 푸른색 로브 위에

두꺼운 고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앞치마는 검붉은 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점액들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렸다.


그의 손에는 방금까지 무언가를 절단하고 도려낸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 묻은 수술용 도구가 들려 있었다.


그의 뒤로,

천장 어둠 속에 매달려 있던 수십 마리의 거대한 성체들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 당신...

당신이 누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었다고!"


루안이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알케스터는 피 묻은 메스를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마치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괴물이라니. 숭고한 존재이자, 구원자라 해야지."


"미친 소리 하지 마!"


"루안, 밖을 보렴.

잭 프로스트의 추위는 인간 따위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법석 없이 우리가 단 하루라도 살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알케스터가 리나(였던 괴물)를 가리켰다.


괴물의 꼬리에 박힌 리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건 공생(Symbiosis)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마법석을 통해 열기와 빛을 제공하고,

우리는 저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이지.

달에서 떨어진 운석에서

내가 처음 저 '루나모스(Lunar Moth)'의 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인류의 구원을 보았다."


"구원...? 저게 구원이라고?"


"고통 없는 삶, 추위 없는 삶.

그리고 죽어서는 저렇게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 있지 않느냐.

비록 모습은 조금 바뀌었지만,

리나의 일부는 저 아이와 영원히 함께하는 거란다."


알케스터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루안에게 다가왔다.


그의 목에 걸린 눈 모양의 마법석 펜던트가

기괴한 주황빛을 내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Chapter 06. 합체


"으아아아!"


루안은 바닥에 떨어진 해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 미친 노인과 괴물을 죽여야 한다.

죽여서 누나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 생각 하나만이 공포를 덮었다.

하지만 알케스터는 여유로웠다.


그가 피 묻은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순간, 탑의 천장 어둠 속에 매달려 있던

수백 마리의 루나모스들이 일제히 날개를 떨었다.


웅- 웅- 웅-


귀가 아니라 뇌를 직접 타격하는 듯한 끔찍한 공명음.


놈들의 꼬리의 마법석에서 흘러나오는 초저주파였다.


루안의 고막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루안은 해머를 잡기도 전에 바닥에 처박혔다.


전신의 근육이 마비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코와 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쯧쯧.

너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았어,

루안."


알케스터가 천천히 다가왔다.


피와 점액으로 얼룩진 그의 앞치마가

루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는 루안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품에서 마법석 하나를 꺼냈다.


표면에는 갓 새겨진 룬 문자가 주황색으로

격렬하게 번쩍이고 있었고,

돌 틈 사이로는 뜨거운 수증기가 솔솔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돌이 아니었다.


껍질을 깨고 나오기 직전의,

굶주린 기생체 알이었다.


"너의 그 분노와 절망은 아주 훌륭한 양분이 될 거다.

숙주의 감정이 격할수록 아이들은 더욱 튼튼하게 자라거든."


"오지 마... 저리 가...!"


루안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알케스터는 노련한 솜씨로 루안의 셔츠를 북 찢어발겼다.


드러난 맨가슴 위로 차가운 탑의 공기가 닿았다.


"고통이 오래가진 않을 거다.

이 아이가 네 안에 들어가면...

모든 슬픔이 사라질 거야."


알케스터는 루안의 가슴 위에

뜨거운 마법석을 올려놓았다.


치이익.


피부가 타는 냄새와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메스가 번뜩였다.


서걱.


"으읍...! 끄읍!"


루안의 가슴이 예리하게 갈라졌다.


붉은 피가 솟구쳐 올라 알케스터의 회색 돌을 적셨다.



피 냄새를 맡은 돌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돌의 밑면이 쩍 갈라지더니,

가느다란 촉수와 곤충의 다리 같은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루안의 벌어진 상처 부위를 파고들었다.


살을 찢고, 근육을 헤집고,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이물감에

루안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지옥 같은 고통은 찰나였다.


기생체가 신경계에 접속하는 순간,

루안의 뇌 속으로 엄청난 양의 신경 전달 물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어...?'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코를 찌르던 시체 썩는 악취는

어느새 달콤하고 향긋한 라일락 꽃향기로 변해 있었다.


루안의 눈동자가 풀리며 초점이 흐려졌다.


시야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피 묻은 앞치마를 입고 메스를 든 알케스터는,

눈부신 하얀 로브를 입은 자애로운 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리나의 얼굴을 꼬리에 매단 흉측한 나방 괴물은...


"누나...?"


눈부신 날개를 가진 천사처럼 보였다.


황금빛 오로라가 그녀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비치고 있었다.



Epilogue. 영원한 겨울의 꿈

현실의 루안은 비참했다.


발끝에서부터 회색 시멘트 같은 석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이미 허리까지 굳어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박힌 기생체는

루안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주황색 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하지만 루안의 눈에 비친 세상은 달랐다.


차가운 회색 탑의 벽은 무너져 내리고,

그 너머로 찬란하고 따뜻한 빛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오로라가 춤을 추고,

공기 중에는 아름다운 빛의 입자들이

눈송이처럼 떠다녔다.


그 빛의 중심에서,

리나가 팔을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아픈 모습이 아닌,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으로.


"보이니, 루안?

이제 안 아파.

여기는 너무 따뜻해."


"네... 보여... 누나... 다 나았구나..."


현실의 루안은 돌로 변해가는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 앞에는 리나의 얼굴을 한 끔찍한 괴물이

턱을 딱딱거리며 루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괴물은 가시 돋친 앞발을 뻗어 루안을 껴안았다.


하지만 루안의 환각 속에서,

그것은 감동적인 재회였다.


루안은 눈물을 흘리며 누이의 품에 안겼다.


괴물의 차가운 돌 피부가

그에게는 어머니의 품 속 같은 따뜻함으로 느껴졌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잿빛이 번져가고 있었지만,

루안에게 그 색깔은 더 이상 칙칙한 회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성스러운 은빛이었다.


"그래, 이제 쉬렴.

긴 겨울이 지나고...

너도 곧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테니."


알케스터의 목소리가 천상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알케스터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직 돌로 변하지 않은 루안의 눈을 감겨주었다.


루안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탑에 들어올 때 보았던,

장례식 행렬 사람들의 미소와 똑같았다.


의식이 멀어져 갔다.


영원하고, 따뜻하고, 끔찍하게 평화로운 꿈 속으로.


탑 밖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루나리스 마을은 평화로웠다.


누군가의 거실 속 난로에서는

마법석이 활활 타오르며 방을 데우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온기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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