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단 코엔/조엘 코엔 감독, 하비에르 바르템 주연, 2008년, 미국 스릴러 >
이 영화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보았다. 제목을 보고 심각한 노인 문제나 노인 복지에 관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점을 보고 놀랐다. 노인 문제와 매우 높은 평점, 코엔 형제의 작품이란 점을 미루어 볼 때 예술 영화 같기도 했다. 그 예술성의 코드가 나와 맞지 않을 만약의 경우가 염려스러워 영화보기를 망설였을 수도 있다. 때론 남들의 열광 속에 스며들지 못할 때, 뭔가 묘한 낙오의 느낌이 싫기도 했다.
영화를 그 자체로 내 멋대로 즐겨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기록하기가 어려웠다. 난 이 영화가 어려웠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동안 영화의 내용을 되짚어 본 후에야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나의 시각으로 내 마음대로 영화를 말해본다.
전직 군인이었던 르웰린 모스는 우연히 총격전 현장에서 돈가방을 발견한다. 그는 아내를 친정으로 보낸 후 돈가방을 가지고 마을을 떠난다. 마약 거래 조직이 고용한 킬러 안톤 쉬거는 돈가방 속 추적기를 쫓아 르웰린 모스의 뒤를 쫓는다.
킬러인 안톤 쉬거는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이다. 이 사건과 관련 없는 자들 조차 서슴지 않고 잔인하게 죽인다. 이 자는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광기에 차있는 사람이다. 경찰도, 지나가다 자신을 도와준 노인도, 눈에 거슬리는 자들은 마구 죽이는 잔인한 살인자다.
난 영화를 보는 동안 르웰린 모스와 함께 이 사이코패스에게서 도망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는 거침없었고, 잔인했고, 무서웠다. 그 쫓고 쫓기는 긴장감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내가 생각한 노인 복지에 관한 예술 영화가 아닌, 잔인한 스릴러 범죄 영화였다.
이 영화의 큰 축에는 쫓기는 자, 쫓는 자 외에 이들을 지켜보는 자가 있다. 영화의 제목을 부여한 주인공이다.
그는 이 사건 담당 경찰인 에드이다. 은퇴를 앞둔 그는 3대째 경찰 집안이고 경찰임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자부심에 비해 항상 사건 현장에 뒤늦게 나타나고, 그다지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에드는 범죄의 단서를 과거 부모 세대와 자신의 경험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필사적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그 살인마를 추적하기 힘들 텐데, 에드의 행동은 뭔가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살인 현장을 뒤쫓아 가며 은퇴 전 마지막 범죄 현장을 견학 나온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직업의 베테랑이 아닌 마치 인턴사원 같다. 제 역할을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스릴러 영화를 숨죽이며 보다가 영화의 말미에 에드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뭔가 영화의 실마리가 풀리나 싶었는데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묘한 꿈 이야기로 끝이 난다. 허무했지만, 명확하게 이 영화의 제목이 에드의 시선에서 이야기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과거의 노인은 지혜로운 어른의 상징이었다. 후손들은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해 모여들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 젊은이들은 노인의 지혜에서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미래를 대비한다. 노인의 지혜를 전수받고 노인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지금은 '노인의 지혜'는 더 이상 경청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노인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검색을 통해 태초부터 미래까지의 무궁무진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획득한다. 많은 정보량 못지않게 검증된 과학적 데이터는 노인의 지혜보다 훨씬 가치를 지닌다. 노인의 지혜는 그저 잔소리와 말이 안 통하는 그야말로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노인과 젊은 세대는 서로 간의 소통이 부재한 단절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영화 속 노인들은 몇 가지 공통된 양상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이다. 남에게 쓸데없이 참견한다. 말이 많다. 자신의 인생 궤적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앞날을 예견하는 것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해석한다. 위험을 감내하고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나고 나니, '과연 이런 행동 패턴이 비단 노인만의 특성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그저 이런 성향의 사람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이런 성향을 "노인"으로 규정해버린다. 사회가 집단으로 합의해서 그들을 몰아내는 것은 아닌지 슬퍼지는 대목이다.
영화 속 에드는 은퇴를 앞두고 몹시 지쳐있다. 결국 많은 이들을 지켜내지 못했고, 살인마 안톤 쉬거를 놓쳐버린 이번 사건은 그를 더욱 두렵고 늙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은퇴하고, 남은 생을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을 탓하며 노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젊고 유능한 경찰이었다면 이 사건을 해결하고 안톤 쉬거를 검거할 수 있었을까? 이 영화에서는 그 누구도 안톤 쉬거의 예측 불가한 과감한 행보를 막긴 어려워 보인다. 늙은 경찰관이어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엔 우연과 무질서 마저 존재한다.
쭟기던 르웰린 모스는 뒤쫓던 안톤 쉬거가 아닌 마약 조직원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것도 장모가 실수로 알려준 정보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마치 영화 속 절대 신처럼 존재하던 안톤 쉬거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고, 겨우 겨우 몸을 추스르며 사건 현장을 도망친다.
결국 혼란과 우연, 불확실성, 무질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범죄 속 그 혼란 앞에 모두가 무기력해질 수 있는데도...
그런데도, 영화의 제목은 잔인하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결론지어 버렸다.
잔인한 범죄 영화라는 점에 가려서 이 영화가 인생을 축소시켜 보여주었다는 것을 몰랐다. 르웰린 모스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도, 아내도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누구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다.
쫓는 자, 쫓기는 자, 방관하는 자,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자,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 이유 없이 당하는 자, 운이 좋은 자...
노인 vs 젊은이
남 vs 여
진보 vs 보수
꼰대 vs M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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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엔 어쩌면 의도되었든 아니든 수많은 갈라치기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프레임들을 씌운다는 것 자체가 무색한데도 누군가는 굳이 편을 나누며 살아가고, 이 프레임을 적용하여 해석한다. 자신만의 해석을 정답인 양 강요하고, 이 해석을 수긍하지 않는 자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기도 한다.
다시 한번 인생을 살아가며 통찰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엔 어려웠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헤매었다.
우린 무질서한 세상 속에서 각자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대로 살아가야 함을 느꼈다. 그 신념을 지키되 자신의 삶의 규칙만을 강요하지 않는 유연함과 존중, 변화, 수긍, 배움 등을 함께 지켜나간다면 그는 노인이 아닌 영원한 청년일 수도 있다.
젊은 노인, 젊은 꼰대가 존재하듯, 청년 같은 지혜로운 노인도 존재하는 법이다.
영화는 내게 어떤 성향과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 보게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한 번 더 이 영화를 본다면 조금은 덜 긴장하고, 조금은 더 쉽게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