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우리의 20세기
< 우리의 20세기, 마이크 필스 감독, 아네트 베닝 / 엘르 패닝 주연, 2017 미국 >
1979년 산타바바라의 쉐어하우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잔잔하고 좋았다. 영화를 보며 산타바바라에 여행 갔던 언젠가의 여름이 생각났다. 내가 여행 가본 장소가 뜻하지 않게 영화에 나올 때, 추억을 소환해 보는 과정이 영화를 보는 큰 재미와 행복일 때가 있다. 내가 경험한 산타바바라는 영화 속에서 처럼 평화로운 도시였다. 특히 산타바바라 성당에서의 경건한 느낌과 성당 앞 잔디밭의 아름다운 장면은 아직도 선명히 떠올려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 아네트 베닝이 나온다. 내게 그녀는 < 러브 어페어 >에서
" I will "이란 노래를 사랑스럽게 부른 매력적인 배우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나이 든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체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이 당연한데도 속절없이 나이 든 그녀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게 되어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감정이 든 내 마음이 팬으로서 미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나라 여배우들의 과도한 시술과 너무 대조적인 문화적 차이에서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중견배우 중에서는 원미경, 윤여정, 고 윤정희 배우 정도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것 같다. 여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다른 배우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일반인도 쉽게 접하는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급된 배우들이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한국보다는 많은 자유가 주워졌을 것 같은 미국의 1970년대 이야기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국의 20세기도 여러 가지 제약과 불합리가 있었다. 원제가 20세기 여인들인 것을 보면 여권의 신장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같은데, 영화는 남녀를 떠나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차분히 다루고 있다.
도로시아는 늦은 나이 아이를 낳고 이혼 후 홀로 키우며 사춘기 아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그녀의 삶은 당시로서는 진취적인 싱글맘으로 용감히 살아가지만, 아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는 다른 엄마들보다 때론 과하게 아들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둘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작은 일에도 아들이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쉐어하우스에는 자궁경부암을 앓고 있는 사진작가 애비와 손재주가 좋은 자동차 정비사 윌리엄이 함께 살고 있다. 도로시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과 위로를 통해 챙겨주면서 서로가 가족 못지않게 친밀한 사이가 되어간다.
도로시아는 이렇게 세입자들과는 진심으로 소통하지만 아들과는 이런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점점 지치고 힘들어하던 어느 날, 아들 제이미의 오랜 여자 친구 줄리와 세입자 애비에게 제이미를 부탁한다. 자신이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역할 외의 다른 부분에서 그녀들이 도와줄 것을 제안한다. 도로시아는 당시의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펑크락과 춤, 그들의 놀이 문화를 접해보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에 몹시 서툴렀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도와주는 치유의 과정을 통해 갈등도 겪지만, 저마다의 아픔을 솔직히 노출하고 공감하고 도와주며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따뜻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해 주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보통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주된 전개이고 주변인들은 그야말로 병풍 같은 존재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각자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서술해 주는 과정에서 현재 시점의 묘사가 아닌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어떤 계기를 분석하며 인물의 현재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파악해 낸다. 영화 말미에서 그들의 미래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출 기법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저마다 영화 같았다.
사춘기 아들과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은 모두의 성장통을 겪어나가며 어느 날부터 마법처럼 자연스럽게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제이미는 도로시아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스스로 좌충우돌을 겪으며 훌륭히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엄마의 부탁을 받은 두 여인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론 그녀들의 변화까지 이끌어 내면서 말이다.
제이미가 묻는다.
"엄마는 행복해? 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때 생각했던 만큼 행복하냐고? "
도로시아가 답한다.
"행복한지 따져보는 것이야말로 우울해지는 지름길이야."
도로시아가 한 말들 중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위해 뭔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해결 못하는 것들도 있어. 그저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남자들은 그걸 못 하더라.
사랑에 빠진 모습을 사랑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넌 바깥세상에서 한 사람으로서 그 아이를 본 거야. 난 평생 볼 수 없겠지.
요즘은 어떤 게 좋은 사람이니?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진정으로 다가가고 이해하며 소통하고 노력하는 도로시아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멋진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그녀 역시 태어나 처음 해보는 엄마 역할에서 서툴고 힘겨워했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그 진심과 노력이 통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제이미 역시 엄마를 성숙하게 이해하고 엄마라는 존재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을 진심으로 존중해 주려는 어른스러움을 보여줘서 감동을 받았다.
도로시아가 운전하는 차 밖에서 제이미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함께 웃으며 나아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위험 천만한 상황은 상상도 못 했을 텐데, 각자에게 편안한 방식으로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며 같은 곳을 향하여 인생을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영화 속 그들의 20세기가 따뜻하게 보이는 것은 공감할 수 있는 갈등 상황 속에서 충분히 헤매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의 진심 어린 노력과 성장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들 뿐 아니라 MZ 세대와의 소통을 두려워하는 중년 세대들이 본다면, 영화 속에서 조금은 해법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