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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쏘 Apr 23. 2024

배낭여행 생각은 없지만 배낭을 샀습니다

생일선물로 받은 배낭 덕분에 떠난 50일 배낭여행

"언니, 필요한 거 없어?" 작년 10월 생일, 동생이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친구들이 사주기로 했다. 더 필요한 게 있던가. 옷, 휴직 중이라 꾸밀 일이 없다. 화장품, 작년 선물로 받은 화장품들 중 절반은 미개봉한 상태다. 신발, 이것도 마찬가지. 가방, 핸드백은 이미 2개나 있고, 그럼 배낭...? 배낭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게 낙점된 생일선물, 배낭여행용 커다란 배낭.


배낭은 캐리어와 태생적으로 다르다. 캐리어는 바퀴가 있어 땅에 기댈 수 있다. 하지만, 배낭에는 어깨끈만 있다. 배낭 속 짐은 스스로 짊어매야 한다. 배낭여행자는 평균 10~15kg 짐을 든다. 여행 동안 일상을 좌우할 짐이다. 견딜 수 있는 무게를 정하고, 필요한 물건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분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책임이다. 내 결정이 일구는 배낭여행 일상, 그게 멋져 보였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삶을 산다. 그래서 배낭 모양새도 제각각이다. 같은 여행길의 배낭이라도, 어떤 건 헐렁하고 어떤 건 꽉 차있다 못해 양옆에 신발이 대롱댄다. 배낭여행자들을 불러 모아 토론회를 열고 싶다. 왜 이 물건을 가져오기로 했는지,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지. 묻다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배낭에는 짙은 사람 냄새가 난다. 언제나 각진 캐리어에선 맡을 수 없는 냄새다.


중학교 2학년부터 시크릿 '끌어당김 법칙'을 믿었다. 저자 론다 번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선 '이미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했다. 배우자를 찾고 싶다는 내담자에게, 론다 번은 배우자가 쓸 옷장과 신발장 공간을 마련하라고 한다. 내담자는 조언을 따랐고, 얼마 후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첫 취업 준비 목표는 면접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 백화점부터 갔다. 면접 때 입을 파란색 블라우스, 검정 슬랙스와 5cm 통굽 구두를 사기 위해서였다. 면접 복장은 취업 준비 내내 책상 옆을 지켰다. 끌어당김 법칙이 통했다. 그 옷을 입고 면접을 4번이나 봤고, 최종 합격까지 했다.


그로부터 5년 후, 배낭여행자가 되고 싶었던 난 생일 선물로 배낭을 확보했다. 새까만 배낭은 내 등을 덮을 정도로 컸다. 가방 전면부를 잡아당겨봤다. 스타킹 마냥 쫀쫀하게 늘어난다. 일상을 담을 준비를 완료했으니 얼른 떠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비행기표를 알아보진 않았다. 아니, 알아보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나는 여행력(力)이 바닥난 상태였다. 작년 5월 우울증과 불면으로 휴직 후 도망치듯 여행 다녔다. 전주, 군산, 서산 등 5개월 동안 11개 도시로 부유했다. 비일상이었던 여행은 일상이 되었고, 이전 일상은 비일상이 되었다. 그러자 비일상이 된 일상이 그리웠다. 객지 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12월 20일 잠잠했던 불면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은 새벽 4시에도 말똥 했다. 10일만 지나면 24년이다.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몸이 감각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 쿵쿵대는 심장에 물었다. "복직하면 어떤 게 가장 아쉬울까?" 3초 만에 대답이 나왔다. "장기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거지."(여기서 '장기'는 1달 이상을 의미한다.)


스카이스캐너를 켰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디지털 노마드 성지, 치앙마이> 피드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디지털 노마드로 성공하고 싶기에 첫 번째 목적지는 치앙마이로 정했다. 이런, 하필 치앙마이 성수기가 12~1월이다. 텅장을 조금이라도 보전하고자 쥐 잡듯 최저가를 뒤졌다. 두 시간 만에 찾은 가장 저렴한 표, 1월 26일 오전 11시 비행기. 잊어버릴까 캡처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가족들과 남자친구에게 조심스레 선언했다. "긴 여행을 떠나보려고 해. 배낭이 아깝잖아." 그렇게 치앙마이 편도 표를 끊었다. 언제 올지, 어떤 여행을 할지는 정하지 않은 채로, 7kg짜리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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