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단편

한 조각, 과일처럼 가볍게 읽는 초단편집

by 김희주

향이 너무 좋아 길 가던 사람을 뒤돌아보게 만든다는 비싼 섬유유연제로 빨래를 했는데, 자외선이 싫어 집 안의 버티컬 블라인드를 죄다 치고 있었더니 빨래가 제대로 건조되지 않아 옷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날은 잘 보이고 싶은 남자와 처음 단둘이 만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아껴둔 비싼 향수를 뿌리고 집을 나섰다. 매번 외출 전이면 무언가 중요한 걸 빠뜨린 기분이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내가 빠뜨린 건 항상 향수였다. 항상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쓰는 진정한 미녀이고 싶었는데, 이번엔 쿰쿰한 빨래 덕분에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한다지?
그날의 나는 그간 부족했던 2%까지 채워 자신감이 충만했다. 집을 나서고 20분 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전까지. 비는 미모의 적이다. 30분 동안 손질한 풍성한 헤어를 한순간에 물미역으로 만들고, 향수 아래 깔린 쿰쿰한 냄새까지 한층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이런 걸 시너지라고 한다지?
하지만 포기하기엔 일렀다. 위치 기반 서비스에 올리브영을 검색하니 주변 지점만 3곳. 가장 가까운 곳에 방문해 여러 향을 테스트했다. 몇십만 원짜리 향수가 해결하지 못한 악취를 만 원짜리 탈취제가 해결해주었다. 나 같은 사람에겐 싼 게 비지떡이 아닐지도 모른다.
덕분에 간신히 다시 향기로운 여자가 될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향은 아니지만, 대중적인 향기를 지닌 여자. 다만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축 처져 있었다. 헤어가 풍성하고 지각한 여자와, 헤어가 가라앉고 개념 있는 여자 중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첫인상엔 이쪽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아직 없었다. 휴, 다행히 내가 먼저 도착했다. 나는 10분 일찍, 그는 2분 늦게. 올리브영에 10분만 더 머물렀더라면 좋았을 걸. 그래도 비 오는 카페에서의 분위기는 좋았고, 우리는 내내 즐겁게 대화를 나눴지만, 연인이 되지 못했다. 가끔 생각한다. 그날 내가 헤어가 풍성하고 지각한 여자였다면, 혹은 쿰쿰한 냄새까지 나지만 지나치게 개념 있는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아무래도 그는 그쪽을 더 선호했을까? 아무튼 요즘은 빨래를 말릴 때에 버티칼 블라인드를 치지 않는다. 모쪼록 그게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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