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그레코 목동들의 경배 (Adoración de los pastores)
사실 엘 그레코는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eotokopoulos)가 그의 진짜 이름이죠.
유학을 위해 건너간 이탈리아에서 그는 일 그레코(Il Greco), 즉 ‘그리스 남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페인에 정착한 후부터 오늘날까지 엘 그레코(El Greco)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탈리아어 남성형 정관사 일(Il)이, 스페인어 남성형 정관사 엘(EL)로만 바뀐거예요.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로 살고자 했지만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서 귀족과 종교인을 위한 그림을 그리며 삶을 마감합니다.
스페인 화가도 아니고 왕의 궁정화가도 아니었던 엘 그레코가 어떻게 스페인의 3대 화가가 됐을까요?
아마도 그의 그림이 르네상스 화가들이 보여준 세계와는 다른,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줬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의 화가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중반,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며 “이미 완벽한데. 이제 뭘 더 할 수 있을까?”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예술가들이 생겨납니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 르네상스 화가들이 중시하던 비례, 조화, 균형 등의 규율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작업들을 이어나가죠. 그들은 비례를 무너뜨리고, 색을 과장하고, 빛을 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엘 그레코는 이 흐름에서 활동하던 예술가였죠.
프라도 미술관 9B번방에 전시되어 있는 <목동들의 경배>는 엘 그레코의 후기작이자, 그의 매너리즘 기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어두운 마굿간 한 가운데, 파란 천을 두른 마리아와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목동들이 모여들어 경배를 하고 있죠.
목동들의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다보면, 작은 얼굴에 비해 몸이 기형적으로 길쭉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겁니다. 이게 매너리즘의 첫 번째 특징이에요. 르네상스가 중시하던 ‘비례’, ‘균형’을 의도적으로 깨는겁니다. 이 이유때문에 사실 엘 그레코 그림 속 인물들의 신체를 보면서 ‘아, 저건 좀 오바인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매너리즘의 두 번째 특징인 '강렬한 명암'도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엘그레코는 의도적으로 모든 빛을 아기 예수에게 몰아줍니다. 빛을 통해 관람객들이 모든 관심을 예수에게 보이게 합니다. 아기 예수가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그리고 화가는 예수에게 모인 빛에 반사된 마리아, 목동들의 피부 그리고 그들 위를 날고 있는 천사들의 피부를 하얗게 질려서 표현하고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빛을 받지 못한 부분은 어둡게 나타냅니다.
사실 이러한 명암 대조는 오늘날의 연극에서 독백하는 배우에게 사용하는 스포트라이트 조명과 유사합니다. 이 이유때문인지, 우리는 이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