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며 만나는 어려움과 기쁨

by KH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게 쉬운 사람들이 있다. 정돈된 글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다. 에세이는 일기와 달리 타자를 인식해야 한다. 방법을 익히고 매일 글을 쓰며 부단히 실력을 쌓아야만 읽어줄 만한 글이 완성된다.


본격적으로 타자를 의식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1년에 한 번 책 한 권 쓰기라는 목표를 친구와 함께 정하고부터였다. 소설은 진입 장벽이 높으니 우선 접근이 쉬운 에세이를 선택했으나, 이는 자기 실력을 과대평가한 판단오류였다. 페이지 수를 맞추기 위해 문장은 길어졌으며 어느샌가 불평·불만이 가득한 일기의 가죽을 쓰고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트레바리 쓰기 클럽 가입이었다. 마침 첫 번째 책이 글을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기에 기대도 컸다. 이 또한 판단오류였다. 50%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책을 덮어야 했으니 말이다. 미국의 언어, 사회,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니 작가가 예시로 든 인용문이 와닿지 않았다. 어느 부분이 잘못되고, 어느 부분이 우수한 지 구분이 안 됐다.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작동하는 선택적 난독증이 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알려주는 글쓰기 방법의 일부만 취해도 대성공이리라.


명료한 생각이 명료한 글이 된다고 하는데(p.21) 이렇듯 세 문단 만에 필자와 독자 모두를 미아로 만들어버렸다. 부족한 실력에도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그 행위가 주는 성취감과 안정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좋은 글감이 떠올랐으니 써야지!’라는 기쁜 마음보다는 ‘오늘 화가 났으니 어디에라도 분풀이해야겠어’라는 분노의 마음으로 노트북을 켠다. 분노로 시작해서 평온으로 끝나는 글쓰기 과정은 모나지 않는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할 말이 떠올라 타자를 칠 때는 저명한 작가라도 된 양 손가락이 키 사이사이를 신나게 활보한다. 내가 쓴 서평이 출판사 홍보로 쓰이거나 짧은 글을 친구에게 건네어 “너 글 잘 쓴다!”라는 칭찬을 받으면, ‘독서를 괜히 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하다.


하지만 다 쓰고 읽어보면 디테일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매일 쓰고 있는 에세이를 보면 글에 묘사(보여주기)는 찾아볼 수 없고 이기적인 말만 가득하다. 소리, 냄새, 노래 제목 등의 디테일을 사용하여 삶의 한 부분을 보여주어야 한다(p.116)는데, 소설만 봐도 그렇다. 어떤 소설은 당최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환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앞에 광경이 펼쳐지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일기가 될지 에세이가 될지는 이 묘사의 차이에서 드러나며, 글쓰기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매일 쓰고, 고쳐 쓰고, 다양한 글을 읽다 보면 일방적인 글이 아니라 소통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오늘도 미숙한 글쓰기를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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