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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

읽은 날짜 2025.7.26.(토)

설명되지 않은 기다림은 설명된 기다림보다 길게 느껴지고 불확실한 기다림은 확실한 기다림보다 길게 느껴진다.

『경험의 멸종』, 크리스틴 로젠(어크로스, 2025) p.134


오늘 경험한 일에 들어맞는 문장이다. 치과 진료가 끝나고 병원비 결제를 위해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워도) 부르질 않아 답답했다. 예전엔 알아서 잘만 부르더니! 내 기준으로는 10분 기다렸나? 나보다 진료를 더 늦게 받은 어린이가 먼저 계산하는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저는 언제 결제하나요?”라고 물어보고 나서야 바로 결제하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려고 대기표 2번을 뽑고 기다리는데 직원이 바쁜지 자기 일만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은 대기 인원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 1번 사람조차 부르지(누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들 많이 바쁘구나’ 생각하고 서가 사이를 헤맸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대기 1번 벨이 울리고 아무도 카운터에 찾아오지 않자 직원은 또 자기 일만 하려 했다. 2번을 안 누르길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선을 보냈다. 그제야 2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몇 번이나 사과하며 내 책을 바코드에 찍기 시작했다.


결국 또 나는 기약 없이 기다리며,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한 기다림을 경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읽은 날짜 2025.10.11.(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또 개인은 사회적 관계의 구성물이다. 그러니 하나의 사건을 설명하려 해도 말이 길어지는 건 필연적이다. 나도 처음엔 남의 말을 자르는 일이 두려웠다. 상대가 무안할까 봐, 반대로 말의 흐름이 끊겨버릴까 봐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런데 남은 질문이 많으면 마음이 초조해져서 상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인터뷰이 말을 끊는 게 실례가 아니라 인터뷰이의 풍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게 결례라고 생각하면 용기가 난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고 했을 때 불쾌해하는 인터뷰이는 없었다. 외려 시간의 제한이 대화의 밀도를 높여주기도 하는 걸 경험하며 배웠다. 인터뷰의 기술은 시간 안배의 기술이다.

『아무튼, 인터뷰』, 은유(제철소, 2025) p.157~158


학교에서 북토크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업무를 맡아서 하고 있다. 보통 2시간 동안 북토크를 진행한다. 주제별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번 작가님은 질문을 하나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통해 15분 이상 성실히 답변해 주셨다. 다른 질문을 통해 이야기를 확장하고 싶어서 입술만 달싹거리기를 여러 번, 질문을 준비했는데도 하지 않는 학생에게 참여를 독려하니, “지금 이 흐름에 맞는 질문이 아닐 것 같아서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며 저어했다.




읽은 날짜 2025.10.11.(토)

고통 그 자체, 사건 그 자체는 글이 될 수 없다. 이에 대해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언급했다. "삶은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내지만 우리가 그것을 해석하고 또 이해하려고 애쓰고, 거기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경험으로 탈바꿈한다"라고. 단순한 이치다. 한 사람이 겪은 고생과 고난을 독자들이 왜 알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가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퍼뜨려야 할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며 그가 내린 해석들, 즉 경험에서 얻은 지혜나 깨달음이다. 삶이란 이렇다는 감각, 인생에 대한 통찰 같은 메시지다.

『아무튼, 인터뷰』, 은유(제철소, 2025) p.102


그동안 내가 주절거렸던 글들은, 정말 ‘주절거림’에 불과했다. 일기장도 아니고,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는 페이지에 나 힘든 것 좀 알아달라 투정 부리기만 했다. 활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소중한 시간을 들여 읽는 이들에게 고통 자체만 얹어주었으니, 불친절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도 힘든데 다른 누군가의 힘든 이야기(그 과정을 통해 얻은 성찰이 없는)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눈을 돌려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라고 말한 인터뷰이의 말을 통해 조금은 숨통을 열 수 있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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