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도 사라지는 좋은 날
추석을 보내고 나니 완연한 가을이다. 매일같이 산책을 나가니까, 산책길이 조금만 달라져도 차이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저 며칠 못 봤을 뿐인데도 유자와 나의 산책길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이젠 낮에도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나뭇잎에도 슬슬 붉은빛이 올라온다. 어쩐지 공기의 냄새마저 다른 것 같다.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계기는 매번 다른데, 산책을 통해 느끼는 건 정말 행복한 경우다. 최악은 출근길에 실감하는 경우고.
여름 내내 밤에 산책을 다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낮엔 햇볕이 뜨거워서 유자를 데리고 나올 생각도 못했다. 오늘은 집안에서도 선선한 날씨가 느껴져서 오랜만에 밝을 때 산책을 했다. 기분 탓인지, 낮에 나온 유자도 더 쌩쌩해 보였다. 이제 내년 여름이 올 때까지는 다시 낮 산책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을이야 밤낮에 관계없이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지만, 짧은 가을이 가면 밤 산책이 어려운 겨울이 온다. 산책하는 발걸음이 계절을 타고 움직인다.
심지어 가을은 사진 찍기도 좋은 계절이다. 오랜만에 카메라도 들고 산책에 나섰다. 평소랑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유자를 찍는데도 왠지 가을 느낌이 묻어나는 것 같아 흡족했다. 네 살짜리 개의 표정에서 주윤발이 보인다고 말하면 바보 같은 콩깍지를 인증하는 꼴이겠지만, 오늘 낮의 유자는 마치 전성기 때의 주윤발처럼…. 가을과 함께 유자 사랑도 깊어가나 보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지만, 점점 산책하기 좋은 봄과 가을에 마음이 간다. 산책하지 않던 사람과 매일같이 산책하는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그저 잠깐 동안 바깥바람 맞으며 걷다 오는 것뿐인데, 그 별 것 아닌 습관이 사람을 좀 바꿀 수도 있다. 제일 좋은 점 한 가지만 말한다면, 제멋대로 발산하던 고민들이 한 점으로 수렴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가끔은 유자를 데리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고민을 덜 수 있다. 빛과 바람과 카메라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가을은 참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