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것' 이상으로 해야 것은 '계속하는 것'

'Keep Going'으로 결국 그 지옥을 통과해버리는 것이었다.

by 이경희


부모에게 가장 힘든 것은 배고파 우는 자식에게 먹을 것이 없어 주지 못할 때라고 한다. 나보다 윗 세대들이 겪었던 생활이다. 내가 어린 두 아이를 기르고 있었던 1997년은 국가부도 위기인 IMF가 온 나라를 강타했다. 모두들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 정체불명의 재난 앞에 어쩔 줄 몰라했다.


2008년 나는 이게 뭐지 싶은 상황을 베트남에서 맞았다. 당시 세계경제는 미국 40%, 유럽 40%,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이 20%의 몫을 담당 중이었다. 회사 경영은 위기면 위기대로 좋은 시절이면 좋은 대로 대체로 죽는소리를 한다. 조심스럽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기에 미리 방어벽을 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내가 일했던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은 죽는시늉이 아닌 위험하고 가파른 절벽 위 상황이었다.


어느 날부턴가가 가 미국 본사에서는 더 이상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며 급속히 생산라인을 줄이고 감원을 하며 이미 발주가 난 철강과 모든 운영계획을 취소하라고 했다. 2008에 시작되어 이어진 2009년 내가 속해있던 세상은(미국 회사의 상황) 급속히 공황상태로 접어들었다. 미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전망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회사에 출근해보면 총무부서를 조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거래업체들에서 나와의 독대를 원했다. 은행에서는 위기의 순간이 증폭될 때마다 약속했던 대출을 무한정 미루거나 취소했고 끝없는 대출금 회수에 나섰다. 본사에서 송금한 모든 자금은 인출이 제한되면서 숨을 옥죄는

상황이 나날이 커져갔다.


관리자들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다수가 본국으로 돌아갔고 현장 직원들도 엄청나게 해고되었다. 자존심 센 일본과 대만 회사들도 일감을 좀 나눠줄 수 없겠냐며 사장이 직접 나서서 부탁해오곤 했다. 하지만 우리 코가 석자라 나눌 여력없었다.


회사 살림을 맡았던 나는 말 그대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닌가 하여 매 순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두 아이에겐 단 돈 1달러도 아껴 써야 한다고 당부했고 혹시 엄마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말하면 그때는 억지 부리지 말고 유학을 그만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큰 아이에게 일러

두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어느 날 본사에서도 더 이상 견디기 어렵고 송금 자체가 불가능하니 회사 문을 닫고 나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하라 했다. 돌아가던 회사가 한번 문을 닫게 되면 끝장 수순을 밟게 된다. 은행과 거래업체들은 달려들어 담보 물건과 돈 될만한 것들을 챙겨갈 것이고 불안감이 확산되면 직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순식간에 풍비박산으로 이어진다. 재기 불능이 된다.


그 와중에 미국으로 실려가지 못하는 제품들 때문에 물류창고를 몇 개씩이나 더 구해야 해서 고정비 지출은 극에 달했다. 엎친데 덮친 형국으로 이웃 회사들에서 촉발된 노동자들의 데모는 활활 타는 들불처럼 순식간에 크고 작은 회사들을 태풍의 눈 속으로 몰아갔다.


날마다 혈압이 오르고 극도의 긴장이 계속되니 목이 굳어져 옆으로 돌리 수도 위로 쳐다볼 수도 없어 옆을 바라볼 때는 몸을 같이 돌려야만 했다. 버티는 것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본사에서는 모두들 몸집을 줄여가는 것과는 반대로 retail계의 거대 그룹인 HOMEDEPOT를 공략 중이었다. 써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절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휘청거렸고 우리와 동종의 경쟁 업체였던 100년 된 회사가 넘어갔다.


업체들의 결제 요구로 정신없는 날들 속에서도, 나와 본사의 정직한 정보와 최선의 결과를 위한 여러 시도들을 믿어주며 반년을 넘어 일 년 이상을 견뎌주는 업체들이 있었다. 조건은 피하지 않고 그들이 요구할 때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며 그들에게 먼저 연락하고 메일을 쓰고 은행과 나누는 회사의 기밀인 재무상황도 있는 대로 오픈하며 숨지 않고 나아갔다.


한 은행에서는 BIS(자기 자본비율)을 강조하며, 쓰러지기 직전의 회사 우산을 뺏어갔다. 더 심각한 건 거래 은행 세 곳에서 우리 내부의 상황을 공유하며 압박해 왔다. 나는 그들과 오전 미팅을 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오후에 은행을 다시 방문하고 사무실에 돌아와서도 조금의 방책이라 여겨지는 것이 있으면 퇴근 전에 은행을 또 방문했다.


그러다 우리가 그처럼 기대하던 홈디포에 제품 전체를 납품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왔다. 홈디포는 미국 전역 50개 주와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포함하여 2000개 이상의 매장을 갖고서 총매출이 월마트 바로 다음이다. 포버스 기업 순위에서도 선두주자다.


어려움은 소리 없이 우리를 확 덮쳐버리지만, 기쁜 소식들은 천천히 조금씩 알려졌다. 한국이 IMF를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벗어난 예라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각했다는 재앙을 미국 역시 놀라운 속도로 극복했다.


한 번은 현지은행 지점장이 함께 베이징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700개 지점 중 성적이 우수한 20개의 지점에 시상이 내려졌는데 자신의 지점이 뽑혔다고 했다. 부상으로 최우수 고객 1인과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전 직원이 만장일치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이들 역시 우리 회사 때문에 극도로 긴장했을 때가 있었을 텐데 극복하고 나니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주었다.


끝까지 우리 회사를 지원하며 함께 고통분담을 했던 회사들은 어찌 되었을까?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면 반드시 과실을 함께 나누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이행되면서 우리는 함께 발전을 이루었다. 직원들은 다시 채용되었고 매주마다 신입을 뽑았고 회사 규모와 설비들도 전보다 2배의 규모가 되었다. 모두의 고생으로 그 지옥의 시간을 통과하였다.


이미지 출처:peoplequotes.org


18살 나의 첫 해외 여행지는 타이완이었다. 하지만 중국을 지척에 두고도 방문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중국과 국교 수립이 되지 않아 '중공'이라 불렀으며 '죽의 장막'이 쳐져 대한민국 사람에겐 비자도 나오지 않았고 방문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나라를 마음 놓고 갈 수 있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날 북경호텔의 나의 방엔 큰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침대로 또 다른 하나에는 트렁크를 올려놓고 두 팔을 만세 자세로 뻗친 뒤 나는 눈을 감았다.


써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인들이 어처구니없는 금융사기극에 휘말려 한바탕 난리를 치른 재앙이었다. 본사는 말 그대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절묘한 마케팅 전략과 비교불허의 제품력과 현명한 가격정책으로 시장 점유율을 엄청나게 높여나갔다. 모두들 고생은 많았겠으나 그 후 나에게도 감동할만한 보상이 주어졌다.


다행한 것은 부모로서 아이들의 공부 지원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거고, 가족의 결속력 또한 더 공고해진 것이다. ' 세계화'의 물결 속에 함께 흘러가게 된 시대에 참으로 안정은 없다. 우리 모두는 자기 앞의 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마땅히 물을 데도 없다. 하지만 절대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은 맥 빠지는 이야기, 부정적인 푸념들이다. 버티고 견디는 것도 중요하지만 'Keep Going'하여 통과해 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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