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말의 힘

감동을 되새겨 주는 일곱 개의 박스

by 이경희


한국으로 짐을 붙이며 박스마다 내용물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다른 짐들은 알맞은 자리에 정리

했지만 일곱 개의 박스는 2년 넘게 밀봉된 채

베란다 구석에 쌓여 있었다. 박스마다 붙여진

이름은 제각각이다.

- 스크랩, 정리할 프린트, 정보, 아이들과 주고

받은 이메일 프린터 , 자료 file-남들에게 암호

같은 이 박스들은 읽을 시간이 부족했던 내겐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볼 수 있을 거란 아쉬움을

달래던 방법이었다.


국제이사 박스: 한글로, 박스 넘버로, 영어로


나의 취미는 스크랩이다. 분류해둔 다양한 내용

재구성하여 일들에 실현시키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집과 회사의 인테리어부터 사무기기 배열,

가구 주문, 그림 걸기, 정원 디자인, 연못 디자인,

나무와 식물 적재적소 심기, 직원 유니폼 디자인,

회사 로고, 도서관 만들기, 회사 대문, 울타리

디자인까지를 아우를 수 있었다. 인테리어 업체에

일괄 맡기는 것보다 개성 있고 회사의 이미지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어 효과가 컸다. 나의 업무는

아니었으나 관심이 있어 장기간에 걸쳐 만들었던 'Factory Gallery' 역시 모은 자료의 재창조

였고 근무환경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항상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스마트폰

으로 저장한 뒤 불러내어 읽기가 불가했던 시기

여서 마음에 드는 내용은 수년간 프린트만 해두고

잊은 것도 많았다. 마음껏 자유스러워진 지금에야

박스 하나씩을 풀며 프린트해둔 내용들을 읽고

있다.


오늘은 시인 박목월 선생님의 아드님인 박동규

교수가 쓴 글을 발견했다. 나와는 시대가 다르고

겪은 내용은 다르지만 나의 허물을 감싸며 키워

주신 엄마를 생각하고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지내온 나의 삶을 반추하며 이 글을 옮긴다.



글: 박동규



내가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

으로 가셨다.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 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

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의 힘

프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

들고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

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 젊은 청년이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라고 하였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

이 빨랐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 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청년을 따라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하고 불렀지만 청년

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쌀자루

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 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는

한참 있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라고 하시

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

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 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중략


그런 위기 상황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 되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다시 읽으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옮겨보니-

그 절박한 순간에도 아이를 탓하지 않고

절절한 마음으로 시인을 대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소년의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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