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창이 되어줄게 3
자기만의 길 2015.07.13
"엄마, 귀여워요. 엄마, 이뻐요. 엄마, 일어나세요."
아이가 사랑스러운 말을 속삭이며 나를 깨웠다. 여름이 되면서 해가 일찍 뜨자 아이는 여섯 시에 일어난다. 나는 어제 오후에 마신 커피가 제법 진해서 늦게까지 이것저것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다 새벽 2시에야 잠들었다. 엄마가 계속 자고 있으니 아빠가 출근 전에 잘 놀아준 모양인데, 아빠가 출근하고 나자 금새 심심해진 아이가 저리도 이쁜 말을 해가며 엄마를 깨운다. 엄마인 내가 "우리 아들 귀여워~ 우리 아들 너무 이뻐~"를 입에 노상 달고 사니 저도 엄마에게 적용해서 그대로 말하면서. 기특하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아이는 벌써 좋아하는 그림책들을 거실 한 가득 늘어놓고 보고 있었다. 책 한 권을 진득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가득 펼쳐놓고 돌아가며 보는데, 내용을 금방 기억하지만 싫증 내지 않고 수없이 반복하며 소리 내어 되뇐다. 어린이집에 등원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어지르며 책을 같이 보기도 하고,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놓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 먹인다. 양치 후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지하 주차장에 가서 차를 10분 정도 타고 어린이집에 간다(구립이라 차량 운행을 지원하지 않음). 대부분 평화로운 아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자기가 정해놓은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순서를 바꾸면 견디기 힘들어하며 울고 불고 떼를 쓰기 일쑤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규칙은 지하주차장에 가는 길인데, 복도식 아파트인 우리 집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두 개다. 아이는 항상 서쪽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자기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출입구 버튼도 자기가 눌러야만 했다. 한 번은 지하 2층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것을 깜박하고, 지하 1층에 내렸다가 실수임을 깨달았다.
"엄마가 지하 2층인데 깜박 잘못 알았네. 우리 계단으로 한 층만 내려가자. "
"싫어요. 다시 엘리베이터 타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우리 집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단계를 밟아 내려오자는 것이다. 시간이 늦었을 때는 나도 맘이 급해져서 아이를 설득하고 강압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를 설득한다는 것은 대부분 시간낭비이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평화롭게 마무리가 된다는 것을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강박'은 자폐성 스펙트럼 장애가 가지는 수많은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바꾸고, 또 새로운 규칙을 만들면서, 자폐성 장애 아이들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상황 파악력이 발달(이 경우 지하 2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다시 집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보다 훨씬 쉽고 시간도 적게 걸린다는 점을 스스로 판단하게 되는 것)하면 이런 성향도 조금씩 옅어진다고 한다. 언어로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하고 인지가 높아지면 강박 성향도 서서히 사라질 수 있음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정말이지 평생 아이가 이런 강박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힘들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아이가 고집을 피울 때마다, 자기가 세운 규칙이 자기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이가 평생 살아가는 건 아닐까,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었다. 조금씩 언어 이해력이 높아지고 상황 파악하는 인지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아이는 '자기만의 규칙'과 타협하는 법을 깨우치고, 다른 사람의 설득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또래와 비교한다면 두 살 정도 지연되고, 감각이 예민하고, 운동 능력이 떨어져서 겁도 많지만, 나는 이제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자기 속도대로 성장하고 있고, 어제보다 오늘 또 발전하고 있으며, 내일은 오늘보다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노루꼬리만큼 작은 발전이라 해도, 이 세상 모든 아이의 성장은 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제 여섯 살도 중반을 넘어섰다. 처음 진단받고 2-3년간은 치료에 열을 올리고, 나 자신도 조급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찾아가도 속시원히 말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족 중에 자폐성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24시간 함께 지내며 관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론적으로 전문가라 하더라도 임상에 적절하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폐성 장애는 특성이 천차만별 백인백색이라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인 특성이므로 더욱 힘들다. 자폐성 장애는 조기치료가 최선이고, 조기 치료가 예후를 좋게 할 수는 있으나, '완치'는 극히 드물다. 사실 완치되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인지가 매우 발달해서, 자폐 성향을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masking' 마스킹).
이런 사실을 알아가면서 나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래, 치료는 한계가 있어. 한창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이렇게 치료실에 몇 시간씩 가둬놓는 나는 과연 나쁜 엄마가 아닐까? 내가 아직도 아이가 자폐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 그 힘들다는 사춘기에 내가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은 대부분 나의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고, 두려움과 불안에 찬 엄마는 분명히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터였다. 주변 엄마들과 얘기도 많이 나누고, 자폐성 장애 아동을 기른 엄마들이 쓴 책도 읽으면서, 긴 생각 끝에 나는 한 가지 작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내 아들은 자폐이지만 성격도 밝고 애교도 있고 순하지. 감각이 예민하긴 하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예민한 청각과 시각이 어쩌면 나중에는 재능이 될 수도 있겠지. 말도 늦고 운동 능력도 더디지만, 조금 천천히 가르치면 되는 거지. 우리 세 식구가 즐겁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많이 표현해주고, 재미난 추억을 많이 쌓으면, 나중에 힘든 일이 있어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겠지. 아이는 아이일 뿐이니까. 유년 시절이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예쁘고 소중한 때니까.
결국, 자폐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행복을 위해,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길을 의심 없이 따라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과제를 해결해 가야겠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 우리 가족은 배우고 성장할 것임을 나는 믿는다. 201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