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창이 되어줄게 6
'부모와 다른 아이들Far from the Tree' 2015.08.26
* 글에 등장하는 '레이(Ray)'는 제 아들의 애칭입니다.
무지개 태몽을 꾸고 난 후 태명을 '레인보우 Rainbow'라 불렀으나, 그 보다 짧고 연관 있는 말을 찾다가 무지개를 구성하는 스펙트럼 상의 다양한 '빛'을 일컫는 단어 'Ray'로 부릅니다.
모든 엄마는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밑천 삼아 아이를 키운다. 육아는 어쩌면 가장 개인적 경험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육아 관습은 오랜 세월을 두고 축적되어 온 사회적 자본이기도 하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 레이를 키우며 가장 힘든 것은, 나의 육아는 개인적인 경험은 물론이고 앞서 언급한 '사회적 자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레이는 엄마인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발달 과정을 거치며 자라고, 다른 일반 아이들과도 매우 다른 경로로 천천히 성장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나보다 앞서 자폐 아동을 키운 선배 엄마를 수소문하여 만나기도 하고, 인터넷 카페를 기웃거리며 정보를 얻는다. 두어 달에 한 번 주치의를 만나러 갈 때면 메모지에 질문을 빼곡히 적어가서 묻고, 자폐 관련 뉴스 검색은 일상생활이다. 그러나 어느 분야건 늘 그렇듯이, 가장 실질적이며 실감 나는 진짜 정보는 엄마들의 입소문이다. 치료실마다 엄마들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열심히 나누며 아이들 성장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온갖 정보를 교환한다. 아이를 키우며 겪는 일도 화제에 오른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어떤 할머니가 우리 애한테 말을 걸었어. 애가 대답을 안 하니까 대뜸 '엄마가 애를 어떻게 키우길래 어른 말에 대답을 안 하냐'며 역정을 내는 거야. 그래서 애가 아파서 그렇다고, 우리 애는 지금 아파서 누가 물어도 잘 대답을 못한다고, 아픈 애한테 그러시지 말라고 했더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한참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야. 어찌나 기분 나쁜지. "
"우리 애들처럼 자폐로 아픈 애들은..... "
"이렇게 아픈 애한테 그렇게 하는 건..... "
아프다고? 나는 이 표현이 참으로 낯설었다. 아프다는 건, '감기나 복통, 아님 위암이나 관절염, 우울증처럼 몸과 마음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정의해온 내게 다른 엄마들의 표현은 어리둥절했다. 자폐는 병일까? 공식 명칭은 자폐스펙트럼 '장애' 아니었나? 병과 장애를 다른 걸까, 아님 같은 걸까? 머릿속에서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그 무렵, 이 책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의 TED 동영상을 봤다. 제목은 Love, No Matter What. 번역한다면, '누가 뭐래도(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 쯤 되려나. 심리학자이자 언론인인 작가는 본인이 동성애자로서 '병이니 치료해야 한다'는 부모의 강권에 따라 '동성애 치료'도 받은 적이 있는 소수자이다. TED 동영상 속의 그는, 차분한 표정과 따뜻한 눈빛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한 배경, 책을 쓰면서 만난 사람, 연구 과정 중에 느낀 점과 생각의 변화를 아름답고 함축적인 언어로 잔잔히 말한다. 정말이지, 한 단어 한 단어 받아쓰고 싶을 정도로 의미가 풍부하고 단단한 문장이었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발간되고 그 소개를 위한 연설이었는데, 한국에는 아직 출간 전이었다. 두어 달 기다리니 완역본이 나왔다. 그리고 그 어느 책 보다 열심히, 아니 결연한 마음으로 한 단어 한 단어 숙독했다.
책을 쓰기 위한 인터뷰만 3만 시간, 집필 기간만 십 년 걸린 이 역작은, 장애나 질병 그 자체만을 현상적으로 다루던 다른 책들과 달리 넓고도 깊은 통찰력으로 장애를 둘러싼 관련인, 즉 당사자, 가족, 지역 사회 등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역학구조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힘들고 어렵지만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밝히고 나아가는지 생생한 모습을 비춘다. 동성애 부모는 이성애 부모에게 나고, 대부분의 자폐아동은 비자 폐 부모에게 태어나며, 심신이 건강한 부모에게서도 식물과 유사한 상태의 극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사실에서 - '신의 실수'라고 책 속의 어떤 이는 얘기한다-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는 어떤 삶을 살까, 부모와 다르게 태어난 그 아이들은 어떤 과정으로 정체성을 형성해갈까, 작가가 의문을 제기하며 이 책이 시작되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서문을 읽은 후, 곧바로 제5장 자폐증(번역자는 아무래도 '자폐스펙트럼 장애'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일반적인 용어를 선택한 것 같다)을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가며 이렇게 힘든 책은 또 처음이었다. 저자가 인터뷰한 인물들, 즉 자폐 아동의 부모들의 입에서 내가 했던 생각이 나와 그대로 활자가 되어 책장 위에 쏟아져 있었다. 부모들이 고통을 호소한 글들은 그대로 공감되며 통증마저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자폐증은 '병'이고 '아픈' 것이니 고쳐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다양성을 어디부터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정체성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폐를 정체성으로 확립한 후에는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등등 치열한 고민이 줄줄이 이어졌다.
작가는 피부색, 쌍꺼풀, 머리카락 색깔 등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수직적 정체성 외에, 부모와 무관하게 동류 집단을 통해 배우는 수평적 정체성을 제안한다. 다운증후군, 자폐증, 왜소증, 중도 중복장애, 범죄자, 트랜스젠더, 신동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수직적 정체성과 수평적 정체성이 대체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일반적 가정과 달리, 위의 범주에 속한 가정은 계속해서 커다란 딜레마를 겪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평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개개인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촘촘히 짜여 결국은 크고 넓고 건강한 사회를 이루게 된다.
자폐증 편을 읽고 난 후, 나는 작가가 다룬 방대한 정보와 깊은 통찰력에 우선 감탄했다. 그리고 나와 내 아들 레이 역시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범주에 속하는 개인이며, 책 속에 등장하는 부모들처럼 아이와 함께 힘들고 어렵지만 정체성을 찾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가 아들 레이를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것처럼, '세상이 대체로 수치스럽게 또는 측은하게 여기는 어떤 것' 중 하나인 자폐성 장애아를 키우는 가족들이 자신과 아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내디디고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어 감사했다.
곧 괜찮아질 거야, 레이는 좋아질 거야, 너 힘들어서 어떡하니... 그동안 내가 들었던 위로는 대부분 이런 말이었다. 그러나, 일면식 없는 작가는 책에서 나의 모든 행동과 삶이 진정 용기 있는 것이고, 표현이 다르고 어렵지라도 나와 레이가 지극히 사랑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이고, 정체성이 확실히 세워진 인간은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말해주었다. 이걸 깨닫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쏟아졌는지 모른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각주와 색인을 제외하면 두 권 합쳐 1400페이지 이상인 이 책을 정성껏 읽어나가다, 나는 내 머릿속에 견고하게 서있던 사고의 벽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걸 경험했다. 나와 레이의 사례를 객과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자폐는 백인백색, 모든 이의 사례가 각각 다르고, 원인은 알려진 것이 미미하며, 그로 인해 온갖 진단과 치료법이 난무한다. 자폐는 치료될 수 있는 병이라 주장하며 극한의 식이요법과 투약을 제시하는 요법(동종 치료 homeopathy: 자폐가 독성물질로 인해 뇌와 신경체계가 오염되었다고 보고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치료법) 도 있고, 산소탱크 치료, 세상과 완전히 단절한 후 자폐아동의 모든 행동을 양육자가 따라 하며 아이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치료(Son-rise 치료), 돌고래 치료 등등 자폐 인구수만큼이나 많은 치료법이 있고, 새로 나오고 있는 중인 듯하다. 나는 각각의 다양한 접근법이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인류를 질병에서 구한 약이 모두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내 아이에게 맞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다양한 요법을 연구하고 시도해야 언젠가는 자폐도 치료가 가능해질 거라 믿는다. 그러나, 이들 치료를 설명한 그 어떤 책에서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아이가 자라며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말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니, 이 두 권은 내 삶을 바꿨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자폐 진단받은 후 많은 책을 읽었다. 이 책과 더불어 자폐성 장애를 이해하게 되고, 희망을 준 템플 그랜딘,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이 마음을 울린 '안녕 제이콥스' 등 여러 책이 막막한 어둠 속의 빛처럼 내 갈 길을 비추어 주었다. 나를 일으켜 새운 그 책들에 대해서도 조만간 써보련다. 그중, 가장 귀한 이 책을 자폐 관련 첫 독후감으로 소개하게 되어 뜻깊다. 정말이지, 새에게 날개가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책이 있는 게다. 2015 0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