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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마일 Dec 10. 2019

너의 창이 되어줄게 5

여름마다 자라는 아이 2015.08.12


*2015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


산과 들이 펄펄 끓듯 더웠던 한여름이 주춤했는지, 어제 내린 비로 바람이 한결 서늘하다. 땀구멍에서 끈적하게 솟아나는 땀에, 뜨거운 햇살에, 에어컨을 틀어도 꿉꿉한 실내에 지쳐가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고 맑은 가을 호수처럼 찰랑찰랑 기분이 좋아졌다. 한 여름은 힘들다. 휴직을 하고 특별한 아이와 부대끼며 보낸 지난 세 번의 여름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이유는 아이의 예민한 청각과 불안정한 감각 때문이다. 하지만, 더운 여름 산과 들의 식물과 작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듯, 아이도 여름마다 이전 해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 우리 부부를 흐뭇하게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적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결여, 둘째, 행동 및 관심사에 대한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집착, 셋째, 과소하거나 과다한 감각반응 및 넷째, 언어적 비언어적 행동 및 표현의 고착 등이다. 이 특징이 두 가지 이상, 초기 아동 발달 단계 즉 유아기에 나타나면 자페 스펙트럼 장애로 진단된다.(미국 정신의학학회 진단기준 DSM-5의 내용을 일부 요약함) 서너 줄로 요약된 이 추상적 진단 기준을 구체적인 증상이나 행동으로 열거하자면 책 한 권이 모자란다. 아이마다 모두 다르고, 성장하면서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난 3년의 경험 동안, 아이 자신과 주변 가족을 힘들게 하는 자폐성 장애의 특징은 바로 감각 이상이다. 나의 경우, 아이가 청각과 시각, 촉각에 지나치게 예민한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청각이 예민하면, 일단 소음이 큰 곳에 가지 못한다. 사람이 많은 모든 장소, 기계음이 많이 나는 모든 장소가 여기 해당된다. 사실 집 밖의 모든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지하철 소리, 버스 문 닫히는 소리, 오토바이 부릉거리는 소리 등은 아직도 무서워한다. 작년까지는 에어컨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못 견뎌했다. 집에 있다가 갑자기 덥다 싶으면 아이가 어느 틈에 살짝 에어컨과 선풍기를 꺼놓은 것을 발견하곤 했다(두 돌 무렵부터 기계조작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 자다가도 일어나 선풍기 꺼달라고, 에어컨 꺼달라고 해서 부채질로 그 더운 여름밤을 나야 했었다(다행히 올해는 선풍기와 에어컨 민감성에서는 해방되었다. 야호!!!).
 
네 살까지는 촉각이 예민해서 샤워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바가지로 살살 물을 부으며 닦아줘야 했고, 최근에서야 머리 감을 때 거부하는 모습이 잦아들었다(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아직도 안 감겠다고 말한다). 치료사 선생님들 말로는, 예민한 자폐성 아이들이 느끼는 샤워기의 강도는 어른과는 다르단다. 마치 바늘이나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촉각이 예민하니, 손에 뭐가 묻으면 기겁을 한다. 재작년과 작년 여름, 이제 좀 괜찮겠거니 바다에 갔더니 그늘막 텐트에서 나오지 않고(그 뜨거운 해변에서!) 바닷물은 커녕 모래에 발조차 대지 못했다. 다행히 해가 가면서 감각 민감도는 낮아져서, 올해는 드디어 바다에 입수했다. 만세~! 세 번째 간 바다에서 입수 성공이라니, 역시 '3'이다. 아이는 구명조끼를 입고는 물장구도 치고, 둥둥 물에 몸을 띄우고 놀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수영을 가르치는 것도 해볼 만하겠다 싶어 나는 정말 기뻤다. 물속에서 나올 생각도 안 하고 노는 아이 덕에 나도 해수욕을 실컷 했다. 아이와 둘이 물속에서 손잡고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 아들, 저기 하늘과 바다가 만난 곳이 수평선이야.
아들: 수평선.. 저기로 가면 어디예요?
나: 응, 저기로 쭈욱 가면 태평양이라는 큰 바다를 지나서 미국이 나와.
아들: 미국?
나: 응, 우리 미국에 가볼까? 어푸어푸~ (크게 수영하는 흉내를 냄)
아들: 미국에 엄마랑 나랑 둘이 가요~ 어푸어푸 (나를 따라 수영하는 흉내를 냄)
 
바닷가에서 아빠와 모래성도 쌓고, 엄마와는 두꺼비집도 만들었다. 물살을 가르며 바다 위를 달리는 제트스키도 관심 있게 보는 걸 보니, 좀 더 크면 바나나보트도, 제트스키도 탈 수 있겠다 싶다. 과거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일들을 아이와 함께 하나씩 이루어가는 일이 이리도 기쁠 줄은 몰랐다. 결혼이 늦었고, 기나긴 싱글 생활 동안 여행이며 등산이며 공연이며 온갖 레저 취미활동을 섭렵했던 나는 각종 경험이 풍부한 편이었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오욕칠정을 대충 다 경험했으므로 결혼 후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겠다고 생각한 오만한 여자였다. 특별한 아이가 내게 온 덕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절망을 느껴야 했으나, 반대로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 온몸이 날아오를 듯한 벅찬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 나의 아이에게 감사한다.
 
이번 휴가의 첫 일정은, 동해안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워터파크였다. 그러나, 입장하자마자 소음 때문에 무섭고 힘드니 나가자며 아이가 우는 통에 환불하고 나와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에서 나는 많이 실망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굳이 힘들어하는 일을 내가 강요해서도 안되고, 아이에게 시간을 주면 스스로 찾아 나서 즐길 때가 올 것임을. 스스로 나가자고 의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감사해야 함을. 그리고 영영 워터파크를 가지 못해도 사실 삶에서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휴가 마지막 날, 우리가 갔던 동해안의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바닷가에 한 일가족이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와 체격이 비슷비슷한 성인 가족 네 명이었다. 아이가 없는 가족은 드문 편이고, 우리 자리에서 가까워서 오가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동류를 알아보는 사람의 촉은 무섭기까지 하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집의 아들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들은 한눈에 보아도 굳건한 믿음으로 뭉쳐진 가족이었고,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넷이 나란히 앉아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알 것 같았다. 어떤 삶을 지나왔고, 어떤 마음으로 넷이 앉아있는지를. 이 뜨겁고 평화로운 여름날 한 때, 그 평범한 한 순간을 위해 어떤 전쟁을 치르며 살아왔는지를.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추며, 나는 그 가족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마음속으로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다시 아이와 한참 놀다 보니, 그들은 올 때처럼 조용히 자리를 뜨고 없었다. 바다는 푸르렀고, 모래는 따뜻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졌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휴가였다.   201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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