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생활ㅡ 따뜻한 겨울
수증기처럼 모락모락 희망이 피어나길
눈뜨자 마자 커튼을 열었을 때 눈이 쏟아지는 아침을 맞이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출근 걱정 없는 일요일 아침, 모처럼 포근히 눈이 나린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얼마 전에 만든 배생강청을 연두색 도자기잔에 덜면서, 일부러 물을 오래오래 끓였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힘차게 증기를 내뿜는 걸 보고 싶어서. 아직은 몸이 풀리지 않은 아침 뜨거운 증기가 주방을 채우는 것처럼 따뜻한 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 주방이 집안의 중심이 있는 요즘 아파트의 구조 때문에 무언가를 끓이거나 구우면 그 따뜻한 증기와 음식 냄새가 집안으로 퍼져나가는 게 좋다.
어릴 적 외갓집 부엌이 생각난다. 한옥의 안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부엌은 문지방이 높았고, 바닥이 깊었는데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다. 세 개의 아궁이에는 크기 순으로 반들반들 검게 빛나는 가마솥이 놓여 있었고 큰 솥은 뜨거운 물이, 중간 솥에는 밥이, 마지막 솥은 국이 끓고 있었다. 솥을 한 번 열면 푸짐한 증기가 뭉게뭉게 벽을 타고 올라가 높은 천장에 나란히 줄선 서까래를 순식간에 가려 버렸다. 마치 지니의 램프에서 나온 뭉게구름 같았다. 천정이 높으니 증기가 솥에서 아무리 나와도 사람 눈높이까지는 시야가 가려질 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옥의 곳곳에는 과학이 배어 있다.
점심에는 오래 끓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토종닭 백숙을 끓였다. 닭을 씻어 인삼 황기 당귀 대추 마늘 찹쌀과 큰 냄비에 넣고 한 시간 정도 푸욱 끓였다. 찹쌀과 약재와 닭이 끓는 구수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는 그 따뜻함이 좋다. 밖에는 하염없이 흰 눈이 나리고, 세상엔 무서운 역병이 돌아 힘들고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따뜻한 증기로 덥혀진 집안에서 창 밖 눈을 바라보며 담백하고 뜨끈한 국물을 떠먹으면 모든 걸 이겨낼 희망과 에너지와 뱃심이 생길 것 같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노인의 입을 빌어 "희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가장 큰 죄인"이라고 했다. 잠시 모든 걸 잊고, 각자의 안식처에서, 가장 소박하고 따뜻한 그 무엇을 누린다면, 아무리 두렵고 어두운 세상이라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이란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당장은 혹한이 찾아온다는 내일 아침 출근길을 겁내지 않고 씩씩하게 나갈 기운을 내는 것, 그렇게 한 발짝 내딛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