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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마일 Dec 31. 2020

책의 숲 ㅡ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산사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처럼  

연말이면 되도록 며칠 휴가를 쓰는데, 올해처럼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집에서만 지낸 휴가는 처음이었다. 두어달 전에 계획했던 모처럼의 제주도 여행도 취소해야 했고, 대신 탄천의 산책로를 매일 아들과 한 두시간씩 걸었다. 갈대숲이 우거진 강변은 쓸쓸하지만 평화로왔다. 시가지의 소음이 강변까지 내려오지 않아 조용했고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한터라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편안했다.

얼마전 페친의 포스팅에서 보자마자 산 책, 정호승 시인의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휴가 동안 천천히 읽었다. 칠순을 기념하여 자신의 시와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인데 오랫 동안 정호승 시인 팬이었던 내게는 대부분 친숙한 시였다. 그 친숙함 속에는 시끄러운 마음을 잠재우지 못하고 그의 시에 의지했던 젊은 날의 내가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같이 이루어지지 않던 이십대 시절, 고된 하루를 보내고 차가운 방 안에 들어와 낡은 책상에 앉아 그의 시를 읽던 날들이 떠올랐다.

시인의 시와 글은 한결같이 그 맑고 고요함을 잃지 않고  책 속에서 잔잔히 빛났다. 어쩌면 칠순의 나이에도 이렇게 평화롭고 정결한 영혼을 지닐 수 있을까. 내가 나이를 먹으며 때가 묻고 닳은 만큼, 나와 다른 깨끗한 영혼을 더 잘 구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단어들 - 희망, 꿈, 나무, 영혼, 기도, 침묵, 추억, 풀잎, 새벽.... -이 새삼스러웠다.  

문학이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고 또 생각을 바꾸던 가장 강력한 -유일한- 도구였던 시기에 태어나 그 정신을 잃지 않고 지켜온 시인의 시 한 줄 한 줄이 보석처럼 귀하다. 우리는 표현할 도구와 채널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외로움'이란 한 마디를 표현하지 못해 화려함에 더욱 집착하며 사는 것 같다.  

'종소리도 외로와서 울려퍼진다'고 시인은 말했는데, 올해는 심지어 12월 31일인데도 보신각 종소리조차 울리지 않는다. 산사에 가서 종소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마음이 충만해질 수가 없다. 종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파장이 잔잔히 산사 아래의 땅과 숲과 인간과 짐승을 감싸안으며 퍼져나가는 것 같다. 보신각의 종도 12월 31일에만 울릴 것이 아니라 매일 밤 울리면 어떨까. 하루에 한 번씩 종소리를 들으면 그 평화로운 파장으로 하루 동안 마음에 쌓인 짐과 피로를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12시가 아니라 10시쯤이 좋겠다. 야근을 끝낸 직장인들, 문닫을 준비를 하는 상인들이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도시의 밤 풍경은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울까.

현실은 이래저래 춥고 마음 쓸쓸하다. 그런 12월 마지막날, 시린 하늘에 불타는 노을이 고왔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고, 삶이 있다고 노을이 내게 말했다. 그러니 내일 내년을 별다를 것 없이 담담히 시작하자. 지금의 고통, 지금의 쓸쓸함, 지금의 외로움은 다 의미가 있을 테니.

.....그동안 당신의 인생은 외로웠는가. 당신은 인생이라는 종루에 매달려 무엇을 기다렸는가. 보신각종처럼 아니면 어느 산사의 범종처럼 당신은 누가 때려주기를 기다리는 숭고한 기다림의 자세를 지녀보았는가. 내가 하나의 종이라면 내 외로움의 고통은 당연하다. 산사에 고통의 종소리가 울려퍼지지 않으면 산사가 아름답지 않듯이 내 인생에 고통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p.262 -263,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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