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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마일 Feb 19. 2023

책의 숲

<그리움의 문장들>

롤러코스터 같은 한 주를 보내고 느지막히 일어난 토요일 아침. 얼마 전 받은 2년 전의 생일선물 림태주 시인의 '그리움의 문장들' 첫 페이지를 아무 생각없이 들추어 보았다. 사실 나는 이런 에세이 류의 책을 멀리 한 지 꽤 되었다. 일에 몰두하는 기간에는 시와 산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각종 이메일, 페이퍼, 의견서 등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하루 종일 써제끼는 직장의 언어가 내 몸을 다 차지해 버리기 때문이다. 직장의 언어가 사무적이고 건조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송곳처럼 날카롭고 그물처럼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언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마음 먹고 공격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이메일을 받은 날이면 나 역시 소울푸드 순대국을 먹고 힘내서 싸움에 나선다. 내가 가진 자료, 논리 그리고 대책을 다듬어 상대방에게 던진다. 나도 아마 누군가에게 날카롭게 공격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에 나는 매주 두세 번 순대국을 먹는다. 내 메일을 받는 누군가는 김치찌개를 매주 먹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습관이 된 무형의 그리움이었다는 걸 한참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문장에서 회사에서 쓰던 갑옷같은 언어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어제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며, 내가 가지 않은 여러 길을 생각했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꼭 그럴 때만 글을 쓰게 된다-, 나는 지난 여러 시절을 복기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반복하는 이건 그저 '습관이 된 아쉬움'일 뿐이라는 걸 림태주 시인의 글에서 깨달았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리고 홀가분했다. 나는 드디어 이 습관을 버릴 준비가 되었다.


하루 종일 오가며 천천히 이 책을 읽었다. 저녁으로 버섯소고기스테이크 솥밥을 지어 가족들과 먹고, 설겆이를 끝낸 후, 향기 좋은 '달빛걷기'라는 이름의 차를 우려놓고 부드러운 성시경의 음악을 튼 후 혼자 앉아 책을 마저 읽었다.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을 치고, 책 모서리를 접어 놓았다. 시인의 산문은 해독제였다. 송곳과 그물의 언어로 몸에 스민 독기가 풀려나갔다. 아아. 내가 평생 말하고 쓰고 싶은 언어는 이런 것이었다. 한 때 나는 세상의 모든 말을 알고자 했고 어설픈 실력을 과시하며 철없이 으시대던 때도 있었다. 말보다 숫자를 다루던 시절에는, 여러 복잡한 상황과 원인과 결과 등 모든 것이 몇 개의 숫자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음에 놀라고 또 그 아름다움에 반했었다. 간결하고 명확한 숫자에 심취하여 서점에 쌓인 책들의 길고 수선스러운 '말과 글'이 초라해 보였다.


이제는 안다. 그 언어들은 내가 아니다. 그저 내가 잠시 입어야 하는 옷일 뿐이다. 옷을 입은 동안에는 단정히 역할을 수행해야겠지만, 옷을 벗고 나로 돌아오는 시간에 나의 '언어'를 잊지 말자. 다만, 방향을 잃은 에너지로 날뛰면서 애꿎은 상대방을, 또는 나 자신을 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나는 책장을 덮고 다짐했다.


.....'나는 세간에서 쓰는 화려한 말들의 기교와 치장을 생각했다. 교양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상대의 권위가 다치지 않도록 살피느라 한껏 포장한 화법의 가식과 낭비를 생각했다. 우리 시대의 불량한 자본주의처럼 나도 말의 본성을 잃고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았다.'


......'슬픔은 기쁨보다 착해서 사람들이 아파할까 봐 이따금씩 찾아오곤 했단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알려준 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어. 사람의 모든 사랑에는 그래서 슬픔이 묻어 있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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