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생활 ㅡ 게릴라성 노점
푸성귀의 푸짐함에 위로받는 저녁
퇴근길에 전철역에 내리면 조그만 간이매점이 있다. 간단한 음료수며 과자, 겨울에는 붕어빵과 오뎅, 요즘에는 찐 옥수수 등을 판다. 그리고 그 옆에 언제부턴가 채소 파는 아주머니가 온다. 이것저것 가져다 파는 게 아니라 두어 가지 왕창 들고 와서 그 자리에서 다듬어가며 판다. 가격표도 없고 누가 파는 사람이고 누가 손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늘 네댓 명 둘러앉아 욕실용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같이 다듬고 있는데 옷차림도 각양각색 ㅡ정장부터 등산복에 그냥 편한 옷차림ㅡ이니 원래 아는 사람들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한눈에 봐도 밭에서 당일 따온 싱싱한 채소들이다. 어느 날은 쪽파. 어느 날은 열무, 어느 날은 깻잎단을 무더기로 쌓아놓더니 요즘은 일주일째 호박잎이다. 나는 그동안 채소들을 사고 싶기도 했고 이 게릴라성 노점의 시스템도 궁금하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호박잎을 사야겠다 싶어 주의 깊게 저녁마다 훔쳐보았다.
우선, 파는 사랑은 한 명이고 간이매점 주인과 지인이거나 가족인 듯 같이 움직였다. 거스름돈 계산도 매점 아주머니가 대신해주는 모습도 보였다. 호박잎 아욱 같은 채소는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야 하는데, 그건 사가는 사람이 거들면서 같이 다듬으면 덤을 듬뿍 얹어주는 거 같았다. 마트와는 비교도 안되게 싱싱하고 싸니, 어디 모임 다녀오시는 듯 명품백에 진주 목걸이 걸친 사모님이나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 나온듯한 아주머니가 같이 자리 잡고 앉아 수다도 떨고 알뜰하게 레시피를 교환해가며 채소를 다듬는 정다운 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집에 가서 다듬으면 음식쓰레기만 더 생기니 사는 자리에서 다듬어가는 게 일거양득이다.
오늘은 시간이 좀 일렀는데도 호박잎이 거의 다 팔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 노지 아욱'이라고 박스 종이에 매직으로 써놓은 가격표가 있고 아욱 어린순이 가득 쌓여있었다. 오늘은 꼭 사야지. 마음을 먹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ㅡ 이 호박잎 얼마예요?
ㅡ이천 원. 다 다듬어놓은 거예요.
ㅡ 아욱은요?
ㅡ 천 원. 그건 다듬을 것도 읎어~
아주머니의 느긋한 대답에 어서 사야지, 했다가 아차. 현금이 없다. 급 소심해진 내가 망설이며 말했다.
ㅡ 저... 현금이 없어서... 내일도 파세요?
ㅡ 아이고~~ 핸폰으로 계좌이체하믄 되지~~~ 요새 무슨 현금 걱정을 한다냐~~ 호박잎도 살 거지? 번거롭게 찌지 말고 그냥 끓는 물에 데쳐서 양념장에 찍어먹어도 돼~~
아.
이 디지털 천국 대한민국은 정녕 위대하고나.
아욱과 호박잎을 가득 담아서 빵빵한 검정 비닐봉지 두 개를 들고 집에 오노라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가득가득인데 커피 한 잔 값인 사천 원밖에 안된다.
진한 멸치육수에 된장 풀어 아욱국을 끓였다. 한 그릇 떠서 밥 말아서 갓김치 얹어먹으니 속이 확 풀어지며 시원한 게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가을에는 아욱 된장국이지, 암.
호박잎은 내일 저녁에 먹어야지.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이구나. 내일부터는 퇴근길에 노점 아주머니에게 인사도 건네야겠다.